배심원 2

첫번째 호명이 있었다.
200여 명 가운데 80명의 이름을 불렀다.
불리는 사람은 "Here" 라고 말함으로 그 자리에 있음을 나타내야 했다.
무엇을 근거로 뽑은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나도 첫번째 호명을 받았다.

호명을 받은 사람에겐 따로 안내가 주어졌다.
배심원 지명이 오후 2:15에 있을 예정이니
그때까지 나가서 밥을 먹든지, 쉬든지 자유롭게 지내다가
시간에 맞춰 알려준 장소(진짜 배심원을 뽑는 장소)로 오라 했다.

그 시간까지 4시간 정도가 여유가 있어 나는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오기로 했다.
어제 딸래미에게 힌트를 얻어 카레를 만들기로 결정.
양파를 카라멜라이즈하고 감자 대신에 아는 언니가 준 늙은 호박을 넣고 돼지고기 썰어넣었다.
'늙은 호박 카레'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이었던 호박을 해치워버려 다행이다.

점심을 챙겨먹고 다시 법원으로 와보니 무료 주차장은 이미 만석이었다.
미터기 주차를 하고 지정된 장소로 가보니 이미 사람들이 다 와 있는 듯
대기실이 꽉 차 있다.

2시 40분 쯤 다시 이름이 호명되고 법정 문이 열렸다.

판사가 입장하고,
배심원 선정을 앞둔 우리 모두는 사실에 입각해서 진실만을 말할 것을 약속했다.
판사의 자기 소개와 재판에 대한 소개, 이를테면 이 재판이 어떤 재판이고 대략 얼마간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며 매일 법정 앞으로 와야 할 시간은 몇 시인지를 구체적으로 말해주었다.

그러고나서 판사는 물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배심원을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일어서시오!"

스무 명 가량 되는 사람이 일어났고,
그들은 내일 아침 다시 이 자리에서 배심원 결정에 참여하기로 하고 법정을 나섰다.

이제 이런저런 이유로 배심원을 할 수 없다는 사람이 60 명 남았다.

이제 판사는 남은 60 명에게 자기 이름을 대고 배심원을 할 수 없는 이유를 말하라고 요구했다.

한사람씩 이유를 댔다.
어떤 사람은 이유가 타당하다고 여겨져 바로 법정을 떠났고,
어떤 사람은 그냥 계속 그 자리에 앉으라 했다.

사연도 가지가지였다.
전시간 학생이라 어려운 사람도 몇 되었고,
직장에서 배심원 임금을 따로 주지 않는다는 사람,
아이를 돌봐야 해서 안된다는 사람,
병든 배우자를 돌봐야 하는 사람..
60 명 가운데 영어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할 수 없다고 답한 사람은 오로지 나 뿐이었다.

생활 영어 겨우 하는 주제에 어려운 법정용어를 어찌 이해하겠는가!

그럼에도 판사는 나를 바로 보내주지는 않고 자리에 앉아 기다리게 했다.

모두 발언이 끝나고 판사는 다시 이름을 호명했는데 호명된 사람은 배지를 반납하고 돌아가도 좋다고 했다.
내 이름도 호명되었고 그제서야 법정에서 나올 수 있었다.

이름이 불리지 않은 사람들은 내일 다시 나와야 했을 테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함께 나온 사람들은 판사의 '빡셈'에 대해 이야기했다.
빡셈이란 결국 열심히 제 할일을 한다는 의미겠지?
그 판사의 빡셈 덕택에 배심원 선출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으니 어쨌든 좋은 경험을 한 셈이다.
그러니 몸과 마음은 좀 힘들었어도 수확이 큰 하루였다고 할 수 있겠다.

법원을 빠져나오니 다리가 풀린다.
퇴근 시간이라 차가 밀리지만
그래도 무사히 마친 긴~하루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