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에 사촌 언니한테

큰 언니 아들의 급작스런 한국행 소식을 그 전 날에나 입수한 바

정말로 급하게 동네 싸구려 옷가게에서 원피스 두 벌만 보냈다고

인사 전화 했을 때

 

 

언니가 물어 보잖아요.

돌아오는 인편에 그 쪽에서도 뭔가를 챙겨 보내야 하니.

 

 

뭐 필요한 거 없냐고.

 

 

제가 빤쓰 좀 보내 달라고 했어요.

 

 

워낙 경우 바르고 자기 것은 안 사도 남의 것은 잘 사주는 셋째 성이

언젠가 이모가 뉴욕 다니러 오셨다 한국 돌아가실 때

이것 저것 챙기면서 이런 말을 했었어요.

 

 

선물은 받는 맛이라고.

 

 

주는 거 보다 받는 게 좋다는 뜻이 아니고

내용물을 떠나서 누군가 나를 챙겨 줬다는 그 마음을 받는 맛이라는 뜻에서.

뭐가 됐던지 이렇게 오고 가야 기분이 좋다고요.

 

 

뉴욕에서야 한국에 있는 거 없는 거 없고 (모든 먹거리 포함)

한국에도 미국에 있는 거 없는 거 없지만

그래도 사람 오가는 편에 빈 손이면 기분이 그러니깐. 그렇죠?

 

 

뭐 필요 하냐고 묻는데

'필요한 거 없어' 라고 저는 절대로 대답하지 않아요.

예의상 던지는 멘트 따위는 제 사전엔 없어요.

 

 

어쨌든 저 쪽에서는 뭐라도 챙겨 보낼 작정인데

기왕이면 품목 딱 집어서 얘기 하는게 상대방 수고 덜어 주고 좋은 일이잖아요.

 

 

언니가 알았다면서

칫수는 어떻게 할까...묻길래

지난 번에 이태원 어드메서 샀다는 그것도 좋았고

여튼 큰 걸로 사라고 했어요.

이제는 꽉 끼는 빤쓰가 너무 싫다고.

한국식 할머니 빤쓰로 알아서 사달라고 했습니다.

 

 

 

내가 아가씨 때는 '아줌마 빤쓰'라고 불렀고

아줌마가 된 지금은 '할머니 빤쓰'라고 부르는

톡톡한 면에 꽃무늬가 그려진 엉덩이를 다 감싸 안는 새 팬티가 여섯 장이나 왔어요~!!

 

 

 

한국 내복 매니아인 남편한테도

이모가 내복 한 벌을 보내 주셨고요.

 

 

조카가 뉴욕에 다시 돌아온 지 무려 열 흘쯤이나 지나서 제 물건을 받았는데...

큰 언니가 자기 시간날 때 가져다 주는거 기다리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그런데 손해가 막심합니다.

무조건 사람 들어올 때 공항까지 나가서 그 길로 쫒아가서

가방 푸는 현장에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키고 있었어야

이런 불이익을 안 당하는 건데...

 

 

 

팬티와 내복이야 지명 선물이니 이건 걱정 안해도 되지만

이모가

알아서들 나눠 먹으라고 보내 주신 

고춧가루와 미숫가루.

 

 

제가 딱 보니까

고춧가루는 노여사가 많이 안 더셨을 거예요.

이건 음식 많이 해먹는 저희집 밀어 주느라 아마 조금 덜고

큰 언니한테도 그러셨을 거예요.

 

 

막내는 김치도 담가 먹고 밥 많이 해 먹으니까 걔 많이 주라고.

 

 

그런데 일단 큰 언니 손에 먼저 가면

난 그녀의 양심을 믿지 못하는 거죠.

워낙에 캐릭터가 욕심 덕지덕지라.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날 더 주지는 않고 아마 노 여사가 덜고 나신 거에서

나랑 반씩 나눴을 것임.

 

 

그 다음 미숫가루요.

이건 셋째 성이 워낙 좋아하는 거라

분명 노여사가 먼저 듬뿍 더셨을 거예요.

아마도 전체의 반쯤?

 

 

다 저의 총기 충만한 100% 추측입니다.

먹거리를 앞에 두고

동물적인 본능으로 발동시킨 촉.

 

 

그럼 나머지 반 남은 미숫가루를

큰언니가 나와 반씩 나눴을까.....

흠...이것도 절대 아닐겁니다.

자기 집이 식구가 더 많으니

자기가 알아서 셀프 가산점 부여하고 2:1 이나 3:1 비율로 해서

제 몫을 책정했을 듯 합니다. 

 

 

 

분하다...

 

 

 

그래도 이게 몇 년 만에 보는 미숫가루인지

울분을 삭이며

락앤락 500ml 쉐이커 꺼내 가지고

듬뿍 세 숟갈 넣고

황설탕 넣고

쉑쉑쉑 흔들어서 얼음도 넣고

뚝딱 한 통 타서 한 입.

 

 

옆에서 눈을 반짝반짝 거리며 기다리고 있던 남편도 한 입,

 

 

나 한 입

남편 한 입

사이 좋게 나눠 먹었어요.

 

 

남편이 미숫가루 엄청 좋아 하거든요.

보자마자 신이 나가지고.

저 사람은 맛있는거 먹을 때 꼭 더 있냐고 질문하는 버릇이 있어요.

더 있다고 하면 몇 번 더 먹을 만큼 남았냐고 또 묻고.

 

 

 

진실은...

한 세 번 정도 더 먹을 수 있을 거 같았는데

제가 두 번이라고 거짓말 했어요.

남편 속이고 살고 싶지 않은데...

그런데 거짓말 했어요.

한 통 타서 나눠 먹은게 아쉬워서 몰래 한 통 더 타서 혼자 먹으려고.

 

 

 

남편이 미숫가루 다 먹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 갔거든요.

저는 거실에 있고

저 사람은 방에서 기타 치면서 저 시끄러울까봐 방문을 꼭 닫고.

 

 

 

그래서,,,,,,,,,

 

 

제가 바로

통에 미숫가루 넣고 설탕 넣고

순식간 후다닥 다시 타서

얼음 넣고 또 쉑쉑쉑~!

방문 닫고 안에서 기타 치고 있으니 이 소리가 들릴리 없지~~

후후~~~

 

 

 

책상 앞에 앉아 흐뭇하게 혼자 야금야금

반쯤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려 가지고

 

 

 

엄마야!!!

 

 

얼마나 놀랬는지..

 

 

남편이 방 문 앞에서 얼음처럼 굳은 표정으로 서서

제 얼굴과

손에 든 미숫가루를 번갈아 쳐다 보고 있는 거예요.

 

 

 

어머 자기 뭐 필요한 거 있어~?

조금 더 마시려고 한 통 더 탔는데

자기도 한 입 더 먹을래?

 

 

 

했더니

통을 제 손에서 받아서는 말없이 방으로 들어가 앉네요.

 

 

잘 먹을께요.

이건 제가 다 먹으면 된다는 거죠?

 

 

 

분명히 저는 '한 입' 더 먹을래냐고 물어 봤는데

저 사람도 뭔가 오기가 났는지

딱 보니 반 이미 먹고 반 남았으니

쎄게 나오더군요.

저는 이미 치사한 짓을 하다 들킨 터라 한 입만 먹고 내 놓으란 소리 못하고

다 먹으라고 했어요.

 

 

 

고춧가루로는

다음 날 바로 배추 두 포기 사다 김치 담그고

롱 핫 페퍼 넣고 감자 조림도 하고

콩나물도 무치고 했어요.

 

 

 

김치 익은 다음에 이모한테 전화해서

고춧가루 아주 맛있다고 감사 인사 드렸고요

미숫가루 혼자 타 먹다 폴 서방한테 들켜서 망신 당했다고 하니까

이모가 너무 즐거워 하세요.

폴 서방이 내복 받고 입이 귀에 걸리도록 좋아 했다고 말씀 드리고

 

 

 

이번엔 언니한테 전화해서

 

 

빤쓰 잘 받았다고

아주 잘 맞는다고 좋아했더니

언니가 깜짝! 놀래요.

 

 

진짜로 그게 맞더냐고.

 

 

이번엔 남대문 가서 샀는데

언니 생각엔 아무래도 100 은 큰 거 같아서 망설이는데

이모가 옆에서 100 사야 한다고 하셔서 그냥 샀다고.

100은 잘 나오지도 않아서 두 박스 찾느라 힘들었다고.

 

 

 

어머나???

내 궁댕이가 하마 궁댕이인가?

다들 궁댕이가 얼마만 하길래???

 

 

 

어쨌거나, 잘 맞아요.

언니한테도

미숫가루 혼자 먹으려다 실패한 얘기 해주고

보내준 빤쓰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서 부부 사이가 좋아진 얘기도 해주고

전화 통화 마무리 했어요.

 

 

 

 

미숫가루 혼자 몰래 먹으려다 들키고

조금 미안도 하고

무안도 했던 그 날 저녁.

이 상황을 무마하고 좋은 분위기로 전환을 해야 하니까

괜히 명랑 발랄한 척 하면서

한국에서 온 팬티 한 장씩 꺼내서 남편한테 보여 줬거든요.

 

 

 

자기야 이거 봐.

여섯 개나 돼.

내복도 한국 내복이 최고~

빤쓰도 한국 빤쓰가 최고~~

 

 

 

네. 맞아요.

할머니 빤쓰지만 그래도 귀여워요.

모양도 별로 나쁘지 않아요.

꽃무늬 예뻐요.

 

 

 

근데 있잖아.

나 이제 이거 할머니 빤쓰라고 안 부르기로 했어.

'정조 빤쓰'라고 부를거야.

있잖아~~~

나 이거 입고 다니면

저얼대~~~~~~~~~ 바람 못 핀다.

그래서 정조 빤쓰!

 

 

 

마음에 든다네요 할머니 빤쓰의 새 이름이.

그러면서 한 마디 더 덧붙이면서 느끼하게 윙크를 찡긋~! 했는데

19금 멘트라 이건 생략 하기로 하고.

 

 

 

이래서

여하튼

한국에서 온 선물 받은 날,

기쁘게 잘 마무리 했어요.

 

 

이번 주말에

오랜 만에 한국 마켓 가게 될 거 같은데

(두어 달 만인거 같아요)

곡물 파는 섹션에서 미숫가루 한 봉지 사오려고요.

한 번도 사먹을 생각은 안 해 봤는데

이모가 보내 주신 것 같지야 않겠지만

대량 생산된 거라도 한 봉지 사다가

몰래 타 먹지 말고 당당하게 실컷 타 먹어야 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