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명절날이면 한 차에 다섯 가족 꽉꽉 꾸겨타고서 

10시간이 넘게 고속도로를 달려 할머니 댁에 가곤 했습니다. 

아주 먼 시골, 온 동네사람이 친척인 작디작은 마을에 도착하면 동네 어귀부터 사람들이 나와 반겨 인사해주던 곳이었습니다. 

저희 할머니 말투인지, 그 동네 사람들 말투인지는 모르겠는데, 그곳에 가면 모두가 저희가족에게

“예쁜 사람 왔소?”, “착한 사람 왔소?” 하셨습니다. 

차에서 내려면서 옆을 휙휙 둘러보면, 제 눈에 오빠들은 하나도 안 예뻤으니, 저만 “예쁜 사람"되어 두 배로 행복해지는 곳이었지요. 

제 할머니는, 

농지를 하나도 물려받지 못해 가난하게 신혼을 시작해야 했던 농사꾼 집안의 셋째 아들에게 시집온 

더 가난한 산골마을 출신의 아가씨였습니다.

키가 150cm가 채 안되셨고, 허리가 한줌도 안되셨던 제 할머니는 

‘소녀'같은 외모와 달리 마음씀씀이가 크고 넉넉하여 늘 남들을 보살피셨대요.

한국전쟁때 동네에 숨어든 젊은 청년들을 위해 땅을 파서 몇 날 몇 일 용감히 품어주시고, 

흉년이 드는 해면 곳간을 열어 쌀을 무료로 나눠 주셨다고 하셔서 언젠가부터 ‘마님'으로 불리워졌다 하더라구요. 

그런데, 어린아이었던 제 눈에는 할머니가 주변에 인심을 많이 사서 멋있으셨던게 아니었습니다.

할머니 방에는, 

벽에 숨은 다락이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예쁜사람 이리 와보소~”하시며 저에게만 그 공간을 열어 보여 주셨는데, 

거기엔 서울 살던 제 눈에도 귀했던 과자가 가득했고,  

할머니가 아끼시던 비녀와 옥반지, 비단으로 만든 한복 같은것들이 있었으니.. 

제 눈엔 마치 알라딘이 발견한 보물 동굴과 같았지요. 

할머니는 한없이 근사했고요. 

미국에 와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위해 장을 봐와 팬트리에 물건을 가득 채울때면 할머니 생각이 납니다.

아이들 손에 과자 쥐어주면서 할머니 생각에 “예쁜 사람~ 많이 먹어~”라고 말해보기도 합니다. 

공간이란게 다 같이 네모낳고, 문 달린 것인데.. 

그 안에 뭘 놓느냐에 따라 이렇게 의미가 생기네요. 

한국의 곳간, 광, 미국의 팬트리, 쉐드..

그곳이 곡식, 식재료를 수납하는 공간이든, 농기구를 수납하는 공간이든 

집 안에 위치하든, 집 밖에 위치하든

지붕, 창문, 문 등등의 구성요소가 조금씩 다르긴해도 

우리는 살면서 물건을 기능적으로 수납할 수 있는 공간을 필요로 합니다. 

다양한 공간 중에 우리가 애정하는 팬트리. 

오늘은 그 팬트리에 대해 이야기 나눠볼께요. 

사람의 주거형태는 여러번 크게 변해왔지만, 

그 중 가장 크게 변한 시기는 '이동시설과 냉장시설'이 발전한 1900년 초반 이후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동시설과 냉장시설이 있기 전에는 

사람들은 걸어서 시장을 가서 자주자주 신선한 식재료를 사야했으니 시장에서 혹은 도시 중심에서 5마일내에 주로 살곤 했답니다. 

이동시설과 냉장시설이 발달하기 시작한 이후에야 좀 더 멀리, 좀 더 싼 지역으로 이동이 가능하게 된거구요. 

그렇다면 이동시설과 냉장시설이 발달하기 전에 사람들은 얼마나 자주 시장을 가야했을까요? 

야채야 텃밭에서 따먹거나 건조시켰다가 먹는다 쳐도

메인 재료 때문에 당연히 고민이 되었겠지요? 

그래서 고안해낸게 라더룸(larder room_고깃간) 이었답니다. 

집이 작은 경우엔 캐비닛, 집이 큰 경우는 방(room)을 하나 만들어 부엌과 구분된 정육만을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고 해요. 

냉장시설이 없던 시절에 고기를 좀 더 오래보관하기 위해 ‘생고기를 라드(지방)로 덮어' 라더룸에 보관하였다고 하는데, 
1305년에 최초기록이 남겨져 있고, 가정용 냉장고가 발명된 1913년까지 600여년간 집집마다 필수공간으로 존재되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집의 그늘진 쪽에 위치하고, 

인접한 벽에는 벽난로나 뜨거운 굴뚝이 없으며, 

쇠로 된 철망(방충망 같은)을 낀 창문이 있어 창문을 열고 닫는것으로 환풍이 가능하고, 

종종 더 낮은 온도를 유지하는 자재로 만든 외벽으로 구성되기도 합니다. 

지리적으로 가능한 곳은 선반을 돌로 만들어 온도를 낮추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것이 현 팬트리의 기원이라고 합니다. 

현재도 유럽에서는 이 공간에서 치즈를 발효시키는 등 여전히 사용하는 집들이 있다고 하고요. 

제가 사는 곳에서는 1900년 초반의 집을 자주 만날 수 없지만, 딱 한번 ‘이건가?'싶은 집을 본 적이 있어요.

워킹 팬트리였는데, 

팬트리인데도 불구하고 창문이 있었고, 

한쪽 벽에 선반이 있었는데, 그 외엔 사람 한 몸 돌리기에도 비좁아서 

‘이거겠다' 싶더라구요. 

혹시 미씨님들 집 보시다가 1900년 초반에 지은 집에 집의 그늘진 구석에 창문이 달린 아주아주 작은 방이 있다면,

라더룸 아닌가? 한번 생각해보세요. 

창문이 있는 워크인팬트리는 식재료 보관상 그리 좋지 않더라도, 

역사가 느껴져서 엄청 엄청 반가우실꺼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