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를 떠올리면 반짝반짝하는 어린 시절,

그곳의 한 거리가 떠오른다.

평소에 수천 번 오갔음에도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갑자기 가슴설레는 장소로 변하고 마는 낯익은 거리.

낡은 화방은 이것저것 각종 색지와 반짝이를 넣어서 만든 크리스마스 카드 재료를 사기 위해 아이들로 붐빈다.

평소에도 롤리팝을 먹고 싶어 침을 꿀꺽 삼키게 했던 시내의 ‘성심당' 빵집은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더욱 화려한 버터케이크와 산타할아버지가 장식된 롤리팝들로 우리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들어가는 순간부터 심장이 두근거리게 만드는 건 ‘바른손 팬시'.

가족들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무엇을 사야할까 한참을 고민하게 만들고, 편지지 하나하나에 계절의 감성이 듬뿍 들어가 있어 눈내리는 계절을 더욱 황홀하게 만들던 곳.

거기에 나에겐 ‘앤'의 에피소드들이 더해져 더욱 따뜻하고 반짝거리는 계절이 된다. 아줌마이자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도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애번리 마을의 감성으로 혼자 빠져들곤 한다.

언젠가 ‘빨강머리 앤과 함께 하는 크리스마스'라는 책을 구입했다.

물론 그 안에 있는 에피소드들은 거진 다 내 책들 속에 있는 이야기지만, 고즈넉한 그린게이블즈의 밤 그림에 앤과 다이애나, 그리고 작은 트리가 있는 크리스마스 표지그림. 내가 사랑하는 ‘앤'과 ‘크리스마스'라니!

나에겐 도저히 간직하지 않을 수 없는 책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짐작하듯이 역시나 첫 시작은

‘매슈 아저씨의 크리스마스 선물’ 이다.

이 세상 무덤덤하고 옷 따위엔 정말이지 관심이 없을 것 같은 매슈아저씨의 이 기가 막힌 의문의 순간,

이미 나의 가슴은 설레기 시작한다.

읽어도 읽어도 또 설렌다.

앤의 소매에만 ‘커다랗게 부풀린 소매'가 없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달은 아저씨.

이 얼마나 근사한 깨달음인가!

아저씨가 앤에게 근사한 드레스를 한 벌 맞춰주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알아도 알아도 또 흥미진진하다. 마치 앤에게 최고의 크리스마스를 주기 위해 나도 비밀을 간직하고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마릴라에게는 말할 수 없고, 시내에 가게로 가지만 갑작스레 처음 보는 여자점원에 당황한 매슈 아저씨는 진땀을 흘리며 필요도 없는 ‘갈퀴’며 ‘흑설탕'만 잔뜩 사와서 마릴라의 핀잔을 받게 된다. 그 때 구세주처럼 등장하는 린드 부인! 린드 부인은 앤 전체 책을 통틀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 중 하나이다. 앤과의 시작은 꽤나 시끄러웠지만 언제나 앤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역시 린드부인은

이 한마디로 매슈 아저씨와, 그리고 책을 읽는 우리의 걱정까지도 한 큐에 날려버리게 해 준다. 그래. 역시 소매야. 저 부푼 소매! 그게 핵심이지!

기다리는 매슈 아저씨는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크리스마스 아침.

에이번리 마을의 크리스마스를 축복하려는 듯 밤사이 함박눈이 조용히 세상을 덮었다.

그날 아침 그린 게이블스의 창밖에는 하얀 눈이 가득 내려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었고, 학예회에서의 연극과 시낭송을 앞두고 있는 앤의 마음은 가득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드디어 매튜 아저씨의 선물! 거기에 다이애나가 헐레벌떡 숨도 안쉬고 가져다 준 조세핀 아주머니의 구슬과 리본이 달린 덧신 선물까지!

그리고 이 이야기의 마지막은 ‘엄청난?’ 복선으로 마무리 된다

참, 그거 알아? 네가 ‘요정의 여왕'을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오다가 머리에 꽂았던 장미꽃 한 송이를 떨어뜨렸거든. 그런데 길버트가 그걸 얼른 주워서 자기 앞 주머니에 꽂더라.

다이애나의 한마디

참으로 로맨틱한 복선이다.

그리고 참으로 완벽한 크리스마스의 행복이다.

이 이야기는 나와, 독자들의 어린아이다운 허영심을 만족시켜주는 에피소드이다.

화려하지 않아도 따뜻한, 그 어느나라 공주님의 럭셔리한 옷장보다도 나를 들뜨게 하는 앤의 단 한 벌의 아름다운 드레스!

그거면 충분하다. 크리스마스의 이야기로, 크리스마스의 선물로, 이보다 더 완벽할 순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