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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앤 Anne이야기 4) 묵시록 su jin lim (jjamlim) 2020-12-4 16:24:46

2 ♡ 4

쪽지

There is a book of Revelation in everyone’s life, as there is in the
누구의 인생에나 묵시록이 있다. 성경에 묵시록이 있듯이

고등학교 때, 이 구절을 참 좋아했다. ‘묵시록’이 무슨 뜻인지는 잘 몰랐다. 성경을 잘 읽던 때가 아니라서 성경 중에 하나구나, 정도만 알았다. 그러나 이 구절이 좋았다.

폭풍우 치는 밤,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 인생에서 처음으로 가슴을 울리는 진실과 마주해야 하는 순간.

앤의 마음 속에도 짙은 어둠이 깔리고 깊은 절망의 폭풍우가 치고 있었다. 그리고 마주하지 않을 수 없는 고통스러운 진실. 그리고 진심.

그 밤에 앤은 자기 인생의 ‘묵시록'을 열었다.

앤 4권. 레드먼드의 앤

앤 시리즈의 10권은 하나하나가 주옥같고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다. 아름답고 즐거운 어린 시절에서 시작해 처녀가 되고 사랑을 깨닫고 행복한 신부가 되고, 엄마가 되며 자식들에게 주인공 자리를 양보해 나가는 인생의 이야기. 아이를 잃기도 하고 전쟁을 관통하며 아픔을 겪기도 하는 앤의 후반부 이야기도 아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들이다.

그럼에도 그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편을 꼽으라면 몹시 어렵지만 아마도 ‘4권'일 것이다. 바로 ‘길모퉁이'를 돌아 레드먼드 대학에 가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앤. 친구들과 ‘숭배자들'에 둘러싸이고, 즐거운 대학생활을 해나가며 진정한 사랑과 우정을 찾아나가는 이야기이다.

앞의 글에서 이야기했듯이 내가 기억하는 ‘앤'은 1963년 초판본 창조사 출판 신지식 번역의 ‘앤'이다. 그 책에서 4권의 제목은 ‘앤의 사랑’이었다. 요즘 나온 출판사들의 제목은 ‘레드먼드의 앤'이 많은 듯 하다. 영어 원제목은 ‘Anne of Island’이다.

4권이 주는 청춘의 풋풋함과 아기자기함이 즐겁지만, 내가 이 책을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앤이 진실된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이 안타깝고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즐거운 대학생활

레드먼드에 간 앤은 늘 친구들과 ‘숭배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학과 성적도 우수했고, 특유의 매력은 역시 이곳에서도 통했다.

사교계의 여왕은 아니었지만, 여왕 그 자체인 앤의 친구 ‘필립파'가 앤을 숭배해 마지 않았다. (‘필립파'도 린드 부인 다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조연 중 하나이다. 매력 투성이인 그녀! 나중에 필립파 글도 한 번 써야겠다.)

그래서 앤은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사교계의 중심을 차지했고, 모두의 부러움을 샀다.

레드먼드의 즐거움은 ‘패티의 집'에서 절정에 이른다. 우아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워서 앤과 프리실라가 사랑했던 ‘패티의 집'을 그들이 빌릴 수 있게 되면서, 답답한 하숙 생활이 아닌 자신들만의 아기자기한 집을 꾸미고 살아가는 앤과 친구들. (생각만 해도 부럽다! )그들은 그곳에서 마음껏 공부를 하고 꿈을 꾸고 미래를 설계한다. 그리고 빠질 수 없는 사랑과 연애도 이어진다.

첫 고백

그리고 마침내... 길버트의 첫 고백.

- 제발 길버트, 얘기하지 마
- 아니, 해야겠어. 이제 더 이상 이렇게 지낼 순 없어 앤. 너를 사랑해. 너도 알고 있겠지.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 마음을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어. 언젠가 나의 아내가 되어준다고 말해줘.

자꾸만 ‘남자'로 다가오려는 길버트를 앤은 외면하고자 해 왔다. 하지만 불안한 길버트는 결국 앤에게 청혼을 하고 앤은 거절한다.

‘나에게 아주 조금의 희망이라도 줄 수 없어?’라고 애원하는 길버트에게 그마저 안된다고, 친구로서는 너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길버트는 뒷모습만 남긴 채 사라져 버린다.

바보같은 앤! 그런 앤을 보며 어찌나 답답했는지...길버트의 저 애절한 고백과 절망은 어찌 한단 말인가.

하지만 원래 진짜 사랑은 가장 늦게 스며들고, 진실은 경계선 앞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진실을 그렇게 빨리 알기엔 청춘은 너무나 청춘이지 않은가. 그 바람같은 시절을 지내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청춘은 진실을 깨닫지 못하기에 청춘이라는 걸.

사랑의 환상

앤은 아직 인생의 진실을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꿈꾸고 공상하는 것을 좋아하던 그린 게이블스의 소녀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었다. 갑자기 동화 속 왕자님처럼 나타날, 운명같은 사랑을.

그렇게 만나게 된 로이 가드너. 레드먼드 내에서는 그와 공식 커플처럼 되어 졸업과 동시에 그들이 결혼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고, 부와 명성을 모두 가진 로이 가드너와 앤은 모두의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로이로부터의 청혼을 받은 순간, 앤은 모든 것을 깨닫는다. 자신이 얼마나 실체가 없는 환상을 사랑하고 있었는지를.

바로 그 때, 앤은 낭떠러지에서 뒤로 주춤 물러날 때처럼 온몸이 떨려왔다. 앤에게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번쩍거리는 자각의 섬광이 비쳤다. 지금까지 살면서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한꺼번에 깨닫게 해 주는 눈부신 섬광이었다.

그렇게 허무하게 꿈 속에서의 한나절 같았던 사랑은 끝났다.

그리고 다신 연애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은 앤.

진실한 사랑

레드먼드의 사 년을 지내고 애본리로 돌아온 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고통스러운 소식이었다.

누나, 길버트 형이 거의 죽게 된 거 알아?

데이비가 전해준 소식으로, 앤은 절망에 빠진다. 그리고 자신의 방에 가서, 조용히 창문 앞에 무릎을 꿇고 인생의 진실과 마주한다.

앤 인생의 묵시록을 읽는 순간이었다.

‘묵시록'

챕터 제목이 영어로는 ‘A Book of Revelation’, 요즘 번역된 책에는 ‘계시록'이라고 되어 있다. 내가 기억하는 그 책에는 ‘묵시록'이었다. 찾아보니, ‘아포칼립스', ‘덮개를 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줄여서 하는 말이 ‘계시록'이다.

비밀을 풀고,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성경에서 마지막에 있는 예언서이다. 가장 어렵고 해석이 쉽지 않은 책이지만, 전체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읽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알고 싶지 않은 미래의 재앙과 고난까지도 적혀 있어 때론 두려움에 외면하고 싶지만, 읽고 묵상하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이러한 배경지식이 어릴 때의 나에겐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냥 ‘앤'의 그 마음을 너무나 공감했기에, 배경지식 없이도 ‘묵시록'과 인생의 연관성을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묵시록'을 성경을 통해서가 아니라 ‘앤'을 통해서 먼저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앤은 자신의 묵시록을 읽기 시작했다.

앤은 길버트를 사랑했다. 언제나 길버트를 사랑하고 있었다. 아! 사랑을 이제야 깨닫다니.* 앤은 자신의 오른손을 잘라내 버리는 것과 같은 고통이 없이는 자신의 인생에서 길버트를 잘라내 버릴 수 없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을 너무 늦게야 알았다.

하지만 길버트는 앤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이 세상을 떠나갈 것이다. 오, 이제 앞으로 펼쳐질 공허하고 암담한 세월이란! 그런 세상을 살아나갈 자신이 없다. 자신이 없다. 앤은 창가에 웅크리고 앉아 기도를 올렸다. 그동안은 무척이나 행복한 삶을 살았지만 지금 앤은 처음으로 자기도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길버트에 대한 사랑.

그것이 바로 앤의 묵시록이었다.

헛된 환상과 포장에 눈이 어두워 볼 수 없었던 사랑.

앤은 몹시도 아프지만, 자신의 몸의 한 부분이 잘라져 나가는 고통을 느끼며 그 사랑을 인정한다.

그리고 길버트를 행한 자신의 사랑을, 자신을 향한 길버트의 사랑을 확신한다.

그러나 그 밤의 앤에게는 모두가 이미 지나가 버린 것.

비바람 치는 어두운 밤. 그린 게이블즈의 다락방, 밖을 향해 난 창문 앞에 고요히 앉아 묵시록을 여는 앤을 본다. 언제나 특유의 긍정과 유머로 힘들 때마다 길모퉁이를 돌아 온 앤이었지만, 이 고통은 ‘고통을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음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