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준이는 생일.
어느 새 이만큼 자랐다.
'자란다'는 것은, 어쩌면 '무의식'에 가까운 것일 줄로만 알았다.
자라는 그 순간을 눈으로 목격하기는 쉽지 않으니까.
우리는 '자란' 모습을 보고, 의식할 수 있는 것이지,
자라는 모습을 볼 수는 없는지 모른다.
어느 지점에 서서 보면,
이만큼 자라있는.
그런데 준이의 '자람'은 달랐다.
나는 내 모든 의식을 동원해 아이의 '자람'에 집중했다.
계속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느 시간 동안을 그랬다.
그런데 아이는 자라지 않는 것 같았다.
1밀리씩 '자람'을 의식하고 있었던 탓일까?
아이는 달팽이마냥, 거북이마냥 천천히 간다....고도 할 수 없었다.
그냥, 자라지 않는 것 같았다.
슬프고 속상하고 불안하고 화가 났다.
왜 자라지 않지?
그런데 아니었다.
준이는 자라고 있었고, 어느 새 이만큼 자라 있었다.
그 증거로 어제 생일을 맞았다.
생일에 새삼 보니, 아이는 몸도 마음도 굉장히 많이 자라 있었다.
키가 안 자라서, 마음이 안 자라서, 머리가 안 자라서 발을 동동 굴렀드랬다.
아이를 눈앞에 두고 5년, 10년 미래만 생각했다.
눈앞의 아이가 자랄 리가 없다...
[느려도 성장한다]
준이를 키우면서 큰 감명을 받은 책이다.
그 중에서도 단연 이 문장들이다.
우리가 ‘버릇’이라 부르는 행동도 전문용어로는 ‘자기 자극’이라 부르는 자폐증의 한 특징이다.
“운전 중 신호 대기에 걸렸을 때 코를 긁거나 귀를 파는 행위도 자기 자극이랍니다.”
많든 적든 누구라도 자폐증과 관련된 인자를 몇 개는 가지고 있다.
가장 중증인 자폐증을 흑색으로, 가장 경증인 일반인을 백색으로 비유할 때,
약간 회색이 되면 과잉 행동이나 커뮤니케이션 장애가 생기고,
더 검정에 가까워지면 ADHD나 아스퍼거 증후군이 된다.
일반인과 자폐증 환자는 백에서 흑까지 퍼져 있는
하나의 그라데이션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맞는 말이건, 틀린 말이건, 무리가 있는 말이건 어떻건,
나는 이 문장을 보고 나도 'ASD' 그라데이션에 속한다는 걸 알았다.
나는 티브이 보면서 계속 입술 각질을 뜯는다.
어떨 때는 피가 나야 멈춘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하는 행동이다.
책을 읽을 때는 아무리 재미있어도 30분을 넘기지 못한다.
다른 책을 건드리든, 물을 마시든, 다른 일을 잠시 해야 다시 집중이 된다.
이런 내가 계속 손톱 각질을 뜯는 준이를 보며 절망해도 되는 걸까?
이런 내가 책 읽다가, 공부하다가 금새 한눈 파는 준이를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어도 되는 걸까?
일반인과 자폐증 환자는 백에서 흑까지 퍼져 있는 하나의 그라데이션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일반인을 ASD로 끄잡아 들이려는 게 아니다.
과연 그 경계가 무엇이길래.
그리고 그 경계가 그리 큰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 글을 읽고 든 생각이 있다.
이 책의 글처럼, 나와 우리가 자폐증의 그라데이션 안에 존재한다면
나와 우리는 더는 누군가의 '육체'를 놓고
자신의 육체를 자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 책에서 감명받은 또 다른 문장이다.
“감정을 실어서 마치 배우가 된 것처럼 칭찬해주십시오.”
연구팀은 이렇게 칭찬 방법을 지도해줬지만 칭찬에 연기는 전혀 필요치 않았다.
딸아이가 매일, 정말 조금씩이라도 말을 배우고 뭔가 새로운 것을 해낼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감동이 북받쳐 진심으로 칭찬이 우러나왔다.
리카는 칭찬을 받으면 무척이나 기뻐했다.
딸아이가 기뻐하는 모습은 나 자신에 대한 포상이었고, 나는 칭찬하는 게 더 좋아졌다.
딸아이 곁에 있으면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미소 천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딸아이로부터 미소 테라피를 받은 셈이다.
훈련된 것은 딸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돌아보면, 준이를 기르면서 나도 많이 자랐다.
굉장히 많은 면에서 자랐다.
아이를 훈련하면서 내 자신이 훈련된 것이다.
훈련은,
무언가 목표로 한 것을 이루기 위해 연습하고 단련하는 것이다.
난 무엇을 목표로 훈련을 받은 것일까?
준이가 (좋은) 대학에 가는 것?
준이가 스스로의 힘으로 사회에 나갈 수 있게 되는 것?
그럴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앞서야 하는 건
준이를 준이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나는 준이를 훈련하면서 그 훈련을 받았다.
나의 훈련은,
천천히 자라는 아이와 함께하며
웃음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아직 다 웃으려면 멀긴 했다.
그러나 나는 최소한, 지금 웃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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