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 B, 사전적 의미는 말그대로 최선이 어렵다면 차선을 취하라는 말이다. 보완책, 대안책, 차선책 등의 의미로 기존의 계획이 통하지 않을 때, 상황이 변했을 때, 비상 시가 닥쳤을 때, 혹은 예상치 못한 사태에 대비하고자 하는 “대체 계획”을 말한다.

지금에야 유명한 영화나 책은 물론이고 평상시에도 플랜 B라는 말을 자주 쓰곤 하지만 구글도 컴퓨터도 핸드폰도 없던 그 시절에는 분명 낯선 단어임에 분명했다.

당시 자만심에 가까운 자신감만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에게  플랜 B라는 단어 하나는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난생 처음 느껴 본 좌절이었다. 안그래도 당시 야간 대학원을 병행하던 때에, 무슨 벽돌 두께보다 더 두꺼운 영어로 된 수두룩한 원서 책을 번역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 한껏 풀죽어 망연자실하고 있던 시기와 맞물려 핑계 김에 소주 잔만 주구장창 기울이고 있던 나는 순간 결심했다. 미국 가자! 영어부터 배우고 그리고 그 다음에 내 인생의 플랜 B를 한번 고민해 보자!! 라고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철닥서니가 없다 못해 무모하기까지 했다. 언제나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고 싶었다. 미안하다는 말, 실수였다는 말이 죽기보다 싫었다. 잘못된 일임이 명백했지만 내 결정을 번복하고 싶지 않았다. 거짓말과 사기치는 것만 빼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덮어버리고 싶었다. 나만이 옳다고 느꼈다. 플랜 B 따위는 패배자들이나 쓰는 단어라는 선입견에 갇혔다. 그게 얼마나 위험하고 허황된 망상인지 깨닫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영원한 플랜 B의 굴레에 갇히다=====

말이 좋아 플랜 B지, 해외 여행이나 유학, 이민이라는 단어조차 생경한 당시 플랜 B라는 고오~~급 단어를 통해 미국 와서 혼자 살고 싶은 욕망이 더 컸다. ‘유학생’이라는 한 마디에서 풍겨나오는 부티 철철나는 차별화를 통해 조금 더 많이 똥 폼 잡고 싶은 욕심이 컸다는 말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리기 전만 해도 해외여행은 아무나 못 갔다는 걸 요즘 애들은 알까? 유학생 특유의 옷차림과 화장, 당시 캘빈클라인으로 추정되는 독특한 향수 냄새가 있었다는 걸 알랑가 모르겠다. 해외여행이 일반화 되던 시기가 아니다 보니 일명 ‘미제’, 미국 제품에 대한 동경심과 일방적 부러움은 부의 상징이 되곤 했었다.

하지만 역시 인생은 내 계획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1997년 한국에 IMF가 터져 속수무책으로 오르는 환율 덕분에 별 성과도 없는 유학생이었던 나는 다시 한국으로 기어 들어왔고, 10여 년 전 40이 훌쩍 넘은 나이에 혼자 미국 땅을 밟기까지 내 인생은 그 무엇도 원래의 계획대로 된 적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사회 초년생 시절 받았던 플랜 B라는 단어의 충격으로 인해 모든 인생에 두 번째, 세 번째  차선책을 세우는 버릇이 생겼다. 그것은 내 인생에 또다른 전환점이 되어 위기에 대처할 힘을 주었다. 직업을 선택할 때도, 중요한 결정이 필요할 때도, 남자를 고를 때도, 심지어 밥을 먹을 때도 나는 플랜 B를 한 쪽 뇌에 심었다. 언제나 꺼내 쓸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