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남을 먼저 챙기던 시절

불과 약 35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 해외로 여행가는 건 꿈도 못꿨다. 1989년 여행자유화가 시행되면서 그제서야 우리에게 다른 나라를 기웃거릴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 

우훗~~ 이게 웬 떡이람. 대학 때 일본으로 난생 처음 여행을 갔다. 지금이야 흔해 빠진 일제 머리핀, 스티커, 자잘한 소품에서부터 워크맨, 카메라, 코끼리표 전기 밥솥에 이르기까지 일제는 그 당시 가장 힙한 아이템임과 동시에 부의 상징이었다.

20대 초반 꽃다운 나이에 일본 여행을 왔으니 얼마나 눈이 휘둥그레 졌겠는가. 한국에선 듣도 보도 못한 물건들이 넘쳐났다. 신기하고 예쁘고 아기자기한 물건들을 쓸어 담느라 바빴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는 내 짐가방 안에는 친구들의 선물로 가득찼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빨간 운동화, 각종 티셔츠, 화장품에 악세사리까지. 

친구들 하나하나 얼굴을 떠올릴때마다 나는 행복했고 신이 났다.

집에 와서 떡하니 짐을 풀어 놓고도 몰랐다. 

나를 위한 선물은 단 하나도 사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쇼핑을 하는 와중에도 친구와 친지들의 좋아할 얼굴만 가득했다. 선물을 나눠주니 주위에 친구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내가 돈이 없어진 상황에 이르자 아무도 곁에 남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바보같이 살았었다.

컴플렉스를 보상받기 위해 돈으로 남자를 고르던 시절

나는 왼쪽 뺨에 보기 싫은 흉터가 있다. 

학창시절 병적으로 여드름이 많이 나 결국에 심한 여드름 자국이 얼굴 가득했는데 내가 봐도 좀 징그러웠음. 당시 가장 권위 있던 엄마 친구인 연대 세브란스 성형외과 과장에게 흉터 제거 수술을 받은게 아뿔싸… 오히려 독이 됐다. 더욱 움푹 파인 채로 흉물스럽게 내 뺨 위에 그대로 남았다. 

근데 여기서 더 문제인게 뭐냐면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그냥 생긴대로 살래. 요따위 마인드로, 근거없는 자심감으로 똘똘 뭉쳐있던 그 시절의 객기가 나이 들어 더 큰 컴플렉스로 남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어린게 무식하고 용감하기만 했지 뭐.. 시간이 지나고 의료기술이 나날이 발전하면서 피부 박피를 위한 신제품, 새로운 피부 미용 기계가 우수수 쏟아져 나올 때도 나는 아프다는 이유로, 매일 술 마셔야 하는 핑계로 외면했었다.

딸내미 얼굴을 더 최악으로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울 엄마는 어지간히도 말 안듣는 나를 위해 산부인과에 피부과도 함께 하며 새 기계를 몽땅 사들였다. 나는 마루타가 되어 딱 한번 필러 시술을 받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다. 너~~~~어무 아아팠던 기억 때문에, 마취에 마취를 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건 생지옥, 생고문이었기에 나 그냥 이대로 살래!! 했다.

예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남자친구가 끊긴 적은 없었다. 백옥같은 피부와 여리여리한 몸매의 소유자가 아니었기에, 그 와중에 한없이 어린 남자만 좋아했기에, 방법은 단  하나. 돈을 쓸 수밖에 없었다. 술값이던 명품 선물이던 돈을 아끼지 않았다. 압구정동 유흥가에서 한때 가오 누나, 혹은 아파트 누나라는 별명으로 살았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자. 조용히 묻자. 

암튼 나는 그렇게 등신같이 살았었다.

실속보다는 보여지는게 더 중요했던 시절

2010년 미국에 혈혈 단신 떨어졌을 때 내 수중에 달랑 3천불이 있었다. 뭐라도 하고 먹고 살아야 했기에 2천 7백불을 주고 중고차를 하나 샀다. 정확히 2주 후, 운전 중 엔진에서 희뿌연 연기가 올라 오며 차는 멈췄다. 백불을 받고 폐차를 했다. 그렇게 나는 아주 철저히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했다. 

2년 뒤 제대로 된 첫 차를 BMW로 뽑았다. 보상심리에 보여주기 식 허세 마인드가 더해져 쥐뿔도 없으면서 투 도어에 늘씬한 스포츠 카를 장만했다. 특히나 한국인 비즈니스를 상대로 한국말로 글을 쓰고 마케팅을 하는 직업이었기에 차는 아무거나 탈 수 없었다. 당연히 명품 가방을 들어야 했고 화려한 모습이 내 자존감을 세우는거라 착각했었다. 집을 사야할 이유도 원인도 욕구도 없었다. 미국에선 다 렌트 살잖아. 자식에게 집 물려주는 사람이 어딨어? 부자들도 다 렌트 살잖아, 절대 쪽팔리지 않아. 으이구 집, 집거리는 촌스런 한국 것들… 

데이트도 백인들하고만 했다. 미국 우월주의의 대명사인 백인들과의 교류가 내 자신을 업그레이드 시킨다 믿었다. 한국 남자는 무조건 시댁이나 가족 중심 사회 그리고 아이들이 걸렸다. 섹스를 못하는 것도 큰 이유 중 하나였다. 우리 세대에 레이디 퍼스트나 자상함을 겸비한 한국 싱글 남자는 없다!!

제 아무리 미국이 이민자의 나라라 해도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을 몸소 느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니야, 나는 남들과 달라, 억지로 억지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이방인으로 살지 않기 위해 버둥거렸다. 

결국 나는 그렇게 쪼다같이 살았었다. 

나를 조금 더 사랑하는게 과연 이기적인 행동일까?

기아 포르테라는 작은 소형차를 샀다.

미국 와서 가장 잘못한 큰 실수 중 하나가 바로 내 주제에 BMW를 탄 것이다. 엄마 찬스로 외제차를 타던 시절과 비교하면 안되는 일이었다. 정확히 5년이 지나자 잔고장이 넘쳐났고 수리비는 따블이었다. 에어컨은 늘 문제였고 운행 중 신호등 앞에서 차 시동이 꺼지는 경우도 허다했다.

베가스까지 데려왔던 BMW를 과감히 처분하고 기아를 사고 나니 세상에 이렇게 고마운 차가 또 없다. 여차하면 우버를 할까, 대학생이었던 딸내미가 필요하면 줄까 했더니 아니다. 유지비 적게 들고 잔고장 없고 승차감 좋고 튼튼하고 아무튼 대한민국 만세다!

한국에서도 이렇게 후진 차를 탄 적이 없었다. 

대학 입학 선물로 소나타를 탔다. 근데 지금에 와서 50이 훌쩍 넘어, 그것도 외제차 넘쳐나는 미국에서 기아?? 근데 그거 알아? 당시에는 내돈으로 산 게 아니었어. 온전히 엄마 찬스 때문이야. 한국차 진짜 짱이야. 미국까지 와서 소형 한국차 타는 내가 잠시 창피했던 적 있다. 그런데 아니더라. 차가 슝슝 잘나가니 인생도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명품백을 모두 딸내미에게 줘버렸다.

오래된 건 과감히 처분하고, 그나마 들 수 있는 걸 골라 미련없이 보냈다. 도저히 들고 다닐 데도 없다. 투잡, 쓰리잡하면서 어디 근사한데 갈 일도 없고, 데이트를 하더라도 작은 손가방 하나면 족했다. 내가 에르메스를 들던 15불짜리 티제이멕스 가방을 들던, 날 좋아할 놈은 나한테 미치고 날 싫어할 놈은 거들떠도 안본다. 쓸데 없는 지출을 줄여 집을 사고 한국에 빌라를 사고, 비록 아직은 내 집이 아닌 은행 집이지만 나는 오늘도 여기 미국에서 구질구질한 삶을 계속하고 있다.

여기저기 오지랖 떨며 밥 사는 일도 안하기로 했다. 코리안 바비큐 먹어봤니? 아니? 그럼 내가 사줄게 가자! 코리안 바비큐 먹어봤니? 응! 잘됐네, 그럼 내가 사줄게 가자! 

친구나 심지어 남자를 꼬실 때도 이 방법 하나면 100% 성공률을 자랑했다. 근데 이젠 더이상 그 짓도 안하기로 했다. 

물론 사람들을, 친구들을 만나고 팬미팅도 한다. 미쿡 스타일로 딱 더치페이를 몸에 익혔다. 처음엔 나보다 나이 어린 사람과 반반 내는게 죽기보다 싫었는데 익숙해지니 그것도 꽤 괜찮은 생활방식이었다.

특히나 어려운게 팬미팅이었다. 

100이면 100 모든 분들이 밥값을 내고 싶어 했다. 그들에겐 단 한 번이지만 나는 늘 해오는 일 아닌가. 모든 분들에게 얻어 먹는 건 반가운 마음에 서로 얼굴 보는 일보다 더 불편했다.

할 수 없이 화장실 가기 전 몰래 계산을 한다던지, 심지어 식당에 들어가기 전 미리 카드를 맡겨 놓는 식의 오지랖을 떨다가 이제는 사정사정해 반반씩 낸다. 가끔은 얻어먹기도 한다. 때로는 얻어먹는 게 행복할 정도로 좋은 분을 만나기도 한다. 너무 맘이 불편하지만 그들의 해맑은 미소를 보며 스스로 이번엔 얻어 먹어도 괜찮다 위로를 한다. 내 기준에선 참으로 이기적인 삶이 아닐 수 없다.      

내친 김에 조금 더 이기적으로 살기로 했다

그까짓 것, 민소매 입고 다니고 작은 차 타고 다니면서 밥 값 더치페이 하는 게 이기적인 삶이라고? 

그렇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식당에서도 남이 먼저 주문하길 기다리기 보다 내가 먼저 먹고 싶은 걸 말하기로 했다. 

더이상 남자에게 쓸데 없는 돈을 쓰지 않기로 했으며 양보하는 습관도 조금은 자제하기로 했다. 

남의 말 하기 좋아하고 매사에 부정적인 표현만 하는 친구는 과감히 걸렀다. 

내가 피곤하고 행복하지 않은데 친구고 지인이고 나발이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빌려 준 돈은 악착같이 받으려 애쓰고 억울한 상황에선 싸워서라도 내 권리를 쟁취하기로 했다. 조금 더 나에게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기로 마음 먹었다.

호의가 계속되면 둘리.. 아니 권리인 줄 안다고,

배려가 지나치면 부담일 수 있다고 목소리 높여 말하기로 했다. 

쓸데없는 감정 낭비 따위로 내 소중한 시간과 남은 인생을 허비하지 않기로 했다. 

더이상 남의 눈치를 안 보기로 했으면 온전히 나의 삶에 충실하기로 했다.

미움받을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단 남을 미워하지는 않으려 노력해 본다.

강한 자에게는 강하고 약한 자에게는 한없이 약했던 지난 날 내 삶의 모토를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어느새,

살아 온 날보다 살아 갈 날들이 짧아졌다.

젊을때 신명나게 부어라 마셔라 막 살아온 댓가로 언제 죽을지 나도 모르겠다.

암이나 불치병이 더이상 남의 얘기가 아닌 늙으막한 나이에 접어들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니 오늘부터 조금 더 이기적으로 

남이 아닌, 보여지는 내가 아닌 진정한 나를 위해 살기로 마음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