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랑 방 바꾸기로 결정했어?"

"응, 엄마가 내 방 노크 잘 하면"

"무슨 소리야, 엄마 매번 노크 하는데?"

"노크하고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들어오잖아, 내가 들어오라는 말도 안했는데" 

".... 아 그랬나"

가만 생각해보니 그랬다.

매번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아주 많은 경우가 그랬다.

무언가 할 말을 잔뜩 입에 물고는 아들방으로 뛰어가 

똑똑똑똑, 요란하게 문을 두들기고 벌컥, 아이의 공간에 침입하던 나. 

그리고 블라블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짜고짜 쏟아내는 나.

어릴 때 아이는 내가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는 내 세상에서 살았다. 

나의 상식 선에서, 내가 허락하는 범위까지가 아이의 세상이었다. 

내가 불가하다고 선을 긋는 곳은 넘으면 안되는 영역이었고 

아이는 완벽하게 내 룰에 순응하며 내 세상에 머물렀다.

그런데 아이가 자라면서 아이의 세계도 자랐다.

그것은 나와는 다른 것이었고 고유했으며 계속 자라나는 생명같은 것이었다.

문제는 내가 그 세계가 커지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데에 있었다.

첫째 딸아이가 6학년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애가 사춘기를 지날 때 나는 아이의 세계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음을 보았다.  

나의 것과는 너무 다른, 어디로 폭발할지 모르는 위험한 세상이었다. 

딸에게 반 지하에 독립적인 공간을 만들어 주었는데 너무 안락했던지

하루 종일 방에서 나오질 않았다. 우리끼리는 딸을 '두더지'라고 불렀다. 

두더지는 학교 갈 때와 식사 시간에만 굴에서 나왔다. 

식사도 국에 밥을 말아서 제 방으로 가져가 혼자 먹었다. 

친구 만나는 일도 에너지가 draining 된다며 꺼려했다. 

두더지는 태권도를 했는데 검은띠 승급심사를 몇 달 남겨둔 어느 날

태권도가 지겨워 죽겠다고 했다. 그리고 돌연 태권도를 그만두었다.

학교는 시작이 8시인데 맨날 7시 50분에 일어나 

세수도 양치도 않고 옷만 입고 털레털레 걸어갔다. 

전날 밤 학교가는 옷을 입고 잠이 들어서는 

아침에 그대로 일어나 좀비처럼 집을 나서기도 했다. 

7학년 때는 tardy가 18번이었나...? 그랬다. 

일요일에 깨우지 않으면 오후 2시까지 잤다. 

두더지 굴에 들어가 보면 

먹었던 음식 그릇은 하루치 혹은 이틀치가 책상에 쌓여있고

입었던 옷은 방바닥이 제자리인양 다 떨어져있고

방 구석에는 머리카락이 털실뭉치처럼 엉겨있다.

두더지 굴의 풍경을 보고 입을 떼기 시작하면 

나는 그동안 참고 참았던 울분이 화산폭발처럼 터져나와

이성을 잃고 악을 쓰기 일쑤였다. 

그냥 눈 감고 입을 막고 용건만 전달하고 나오는 것이 현명했다.

도대체 저 세계는 어떻게 생겨먹은 세계냐?? 

내가 난장판을 부리고 아이를 내 세계로 다시 끌고 나와도 

아이는 곧 자기 세계로 돌아갔다.

그리고 빗장을 더욱 굳게 채웠다. 아무도 들어올 수 없도록.

누나/언니의 변화는 동생들을 슬프게 했다. 

"엄마, 언니는 왜 굴에서 안 나와? 같이 놀고 싶은데..."

"언니는 지금 여행중이래. 모르는 세상으로 맨날 여행다녀서 피곤한가봐. 좀 기다려주자"

이렇게 동생들을 안심시켰지만 큰 애가 스윗했던 내 딸로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나는 두려웠다.

아이 때문에 속상한 날은 배신감과 울분으로 기도를 시작해 

내가 애한테 뭘 잘못한걸까하는 자책과 반성으로 끝났다. 

기도는 빛이 되어 아이가 아닌 내 내면을 비추었다.  

그리고 나야말로 빗장을 걸어잠근 우물 안 개구리처럼 융통성도, 여유도 없이

내 세계가 전부인양 아이에게 강요하고 안달하고 있음을 보았다.

내 안에 내가 세운 '잘 자란 이민 2세대 모범생'의 우상이 있었다.

그 우상이 무너지는 일은 내 세상이 무너지는 일 같았다.

세계의 무너짐은 그야말로 죽음이었다.

내가 유아세례를 받고 평생을 교회 울타리에서 살아왔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진실한 인격적인 관계를 시작한게 40세가 넘어서였는데 

그 40년 동안 하나님은 나의 세계를 지나칠 정도로 인정하고 기다리셨다. 

세상의 소리는 너무나 무례하게 예고도 없이 나에게 들어와

내 존재를 흔들어놓고 정신을 마비시키고 바람처럼 나가버리지만

예수님의 소리는 너무 점잖고 고요하고 매너있어서 

내가 싫다면 절대 내 세계를 흔들지 않으셨다.

백가지 좋은 것을 들고 있어도 받는 이가 싫다하니 그 분은 한없이 기다리기만 했다.

내 존재 밖에서 나를 40년 동안 기다려준 예수님을 생각하며 큰 애를 생각했다.

큰 아이의 세계가 자라는 동안 힘겹게 내 세계도 자랐다. 

이제 9학년이 되는 우리딸은 여전히 자기 공간에서 음악듣고 유투브보고

채팅하고 책보고 뒹굴거리는 걸 좋아한다.

집 밖으로 나가는 게 제일 싫고 안전한 자기 공간에서 게임하며 노는 것이 

제일 즐거운 일이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가끔씩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 나를 

뒤에서 살며시 안으며 I love you, mom이라고 말해주는 거, 

아침에 학교로 걸어갈 때 나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드는 거. 

어느 날 갑자기 스케이트 보드를 사달래서 

집 앞에서 슬슬 밀고 다니기 시작한 거.

그래 그거면 됐다. 

엄마와의 관계도 너 스스로의 관계도 끊어지지 않고 계속 알아가고 있구나.

그래. 너의 속도로 천천히 가자. 엄마가 계속 기다려 볼게.

세 아이 중 둘째, 아들은 12살 이번에 7학년이 된다.

이 세계도 보아하니 만만찮다. 

아직까지 폭발적으로 커지지는 않아서 내 손으로 조물락거리면

맘에 드는 모양을 만들 수 있지만 

이 세계는 어느새 튕겨나가 부풀어오를지 모르는 '남자'의 세계! 

아들의 말을 듣고 이제는 노크를 신경써서 해야지 라고 다짐했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고 사랑하는 일이란 쉽지 않지만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그렇게 자라나게 하실 것을 믿고

오늘도 그 믿음의 씨앗을 뿌린다. 내 안에 진실된 참사랑이 자라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