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있는 청소기를 나 몰라라했다는 남편에 관한 글을 쓰고 난 후 주위에서 말했습니다.
"이계숙 씨가 보기엔 왈왈 동네깡패같은데 마음씨 곱기가 비단결같네. 어찌 그 꼴을 보고 찬물 한 잔으로 마음을 다스렸을까. 내 남편이 만약 그랬으면 절대 그냥 안 넘어간다. 그 자리에서 패죽여버리지...”
누군들 안 그랬겠습니까. 나 역시 그랬습니다. 나 역시 그 자리서 패죽이고 싶었습니다. 지난번에 설명했듯이 구석도 아니고 거실 한 복판에 널부러져 있는 청소기, 장님이 아니라면 불 보듯 눈에 뜨였으니까요. 그런데도 남편은 그걸 치울 생각조차 없이 내버려두고 소파에서 태평하게 텔레비젼에 정신이 팔려 있었어요. 지가 인간이라면 그럴 수는 없을 텐데 말이죠.
사실 그 정도는 약과입니다. 밖에 널어놓은 빨래가 갑자기 내린 소나기에 젖고 있는 걸 뻔히 보면서도 걷을 생각을 못하는(안하는) 화상입니다. 그러니 멈추어있는 청소기 안 치우는 일 쯤이야 애교에 불과한 일입니다. 지난번 글에도 언급했다시피 지칩니다, 이제는. 짜증이 납니다, 이제는. 나이가 드니까 몸도 예전같지않고 몸이 힘드니까 남편이 조금이라도 도와주었으면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잔소리 안합니다. 화 안냅니다. 두 가지 이유에 의해서입니다. 하나는 타고난 성격은, 그러니까 천성이라고 하지요. 천성은 남의 충고나 잔소리로 고쳐지지 않는다는 걸 일찍이 깨우쳤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고쳐보려고 이를 악물고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면 모를까 남에 의해서는 절대로 바뀌지않는 것이 천성입니다. 고쳐지지도 않을 걸 말해봐야 내 입만 아프고 듣는 사람은 또 기분나쁘고 집안 분위기만 험악해집니다. 힘이 좀 들더라도 속이 상하더라도 그냥 내가 해치우는 게 낫습니다.
또다른 이유는 나한테 일체 화를 내 본 적 없는 남편이라 나도 그렇게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결혼생활 20여년동안 단 한번도 나를 탓한 적 없다면 누가 믿을까요. 아무리 큰 실수를 해도, 이를테면 금방 산 새 차를 들이받아 우그러뜨리고 들어가도 ‘조심 좀 하지 그랬냐. 안 다쳤으니 됐다’ 고 넘어갔다면 누가 믿을까요.
두어달 전 토요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간만에 스테이크를 구워 멋지고 근사한 저녁을 먹었으면 싶었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마주앉아 저녁 먹을 기회가 거의 없다시피합니다. 출퇴근 시간이 서로 달라서 그렇습니다. 출근시간도 나보다 2시간 빠르고 따라서 퇴근시간도 빠른 남편이 먼저 저녁을 먹어요. 집에 들어서면 바로 먹을 수 있게 내가 아침에 저녁식사를 미리 준비해놓고 출근합니다. 나중에 퇴근한 나는 나대로 저녁을 해서 혼자 먹습니다. 휴일에는 삼시세끼 끼니를 차려먹는 게 아니라 각자 배 고플 때마다 먹기때문에 식탁에 같이 앉을 기회가 또 없습니다. 남편의 배 고픈 시간과 내 배고픈 시간이 각각 다르기에 말입니다. 코스코에 가서 네 덩어리에 육십 몇불짜리 벽돌같이 두툼한, 최고로 좋은 고기를 샀습니다. 두 덩어리는 양념소금을 재고 한 덩어리는 반을 잘라 잘게 썰고 남은 반과 다른 덩어리는 냉동고에 얼렸지요. 잘게 쓴 반 덩어리는 구워서 강아지를 주려고요. 강아지도 먹어야하지 않겠습니까.까. 온 집안에 고기 냄새를 풍길텐데 고문 아니겠어요. 이왕이면 와인도 한 잔 했으면 싶었습니다. 그래서 손님이 선물로 가져다 준 와인도 꺼내고 와인잔도 꺼내 세팅을 했습니다.
바베큐그릴은 없습니다. 일년에 한 두번 쓸까말까하면서 자리만 차지하길래 없애버린지가 옛날입니다. 프라이팬에 구워야합니다. 두껑달린 두꺼운 프라이팬을 꺼내놓고 저녁이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배가 좀 출출하다고 쿠키 봉지를 꺼내는 남편을 말렸어요. 약간 시장해야 스테이크를 맛있게 먹을 수 있다고. 두어시간을 기다려 드디어 저녁이 되었습니다. 일단 프라이팬을 불에 놓고 달구었지요. 그런데 부엌을 기웃거리던 남편이 말합니다. 고기가 너무 두꺼운 것 아니냐고. 가운데를 갈라 펼쳐서 굽는 게 좋겠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얇으면 육즙이 빠져버립니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육질을 맛보려면 두꺼워야만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습니다.
달구어진 프라이팬에 고기를 던져넣고 두껑을 닫았습니다. 고기가 익을 동안 곁들여먹을 채소를 준비해야지요. 감자랑 양파를 파랑 피망을 길게 채 썰어 기름을 넣고 볶았습니다. 고기가 타다닥타다닥 소리를 내면서 익는 소리가 들립니다. 몇 분후 고기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다시 몇 분을 기다려 두껑을 열어보니 아주 노릇노릇하게 잘 구어진 것 같았어요. 접시에 담아 파랗고 희고 빨간색 야채를 옆에다 곁들이니 일류식당 스테이크 못지않습니다. 아주 근사합니다. 남편이 감탄을 하며 나이프와 포크를 듭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고기가 하나도 익지 않았어요. 겉에만 갈색이고 안에는 시뻘건 생살이 그대로입니다. 피까지 비칩니다. ‘레어’ 를 좋아하는 사람도 도저히 먹을 수 없을 정도일 것 같아요. 남편이 포크를 내려놓으며 말했습니다. 반을 잘라야 된다니까. 지금이라도 반을 잘라서 다시 익혀요. 고래심줄보다 더 질긴 고집의 나는 남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누가 뭐라든 처음 정한대로 무소의 뿔처럼 끝까지 가려고 작정한 나는 고기를 주섬주섬 걷어다가 프라이팬에 던져넣고 불을 지폈어요. 남편이 거듭 말했습니다. 반을 잘라야 속에까지 익어. 너무 두꺼워. 내가 대꾸했지요. 기다려봐봐요. 금방 될 테니까.
남편은 식탁에서 기다리고 나는 스토브 앞에서 고기가 구워지기를 기다립니다. 기다리면 시간은 더디 가요. 어쨌든 5,6분을 기다려 고기잡시를 남편 앞에 갖다가 놓았습니다. 그리고 호기롭게 말했지요. 이번엔 맛있게 잘 익었을 거야. 익기는 뭐가 익어. 아까보다는 좀 나은 것 같지만 아직도 속은 시뻘겋습니다. 웬놈의 고기가 그렇게 말썽을 부리는지! 짜증이 팍 솟구칩니다. 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걸 본 남편이 다시 부드럽게 말합니다. 반을 자르면 금방 익을 거야. 아니면 전자렌지에 몇 분 돌리든지. 그쯤 되니 오기가 불끈 생깁니다. 절대로 반을 자르지않겠다는 오기가! 죽어도 통째로 익히고 말겠다는 오기가! 다시 프라이팬 불을 켜고 고기를 던져넣었어요. 남편은 아무말 않고 내 행동을 쳐다보기만 합니다. 그래서 세 번째에 고기가 익었냐고요. 아니요. 고기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고기에 붙어있던 기름이 프라이팬에서 졸아붙어 타면서 연기를 마구 내뿜기 시작한 거예요. 그 바람에 화재경보기가 삐이익삐이익 귓청 떨어지는 소리를 내면서 집안을 뒤흔든 겁니다.
남편과 나는 뒤집어지듯 놀랐지요. 이제나저제나 고기 한 점 얻어먹을까, 턱 받치고 있던 강아지도 알람소리에 소스라쳐 놀라더니 미친 듯이 짓기 시작합니다. 남편이 얼른 신문을 집어들고 알람있는 천정을 향해 부채질을 합니다. 그리고 내게 외칩니다. 팬을 빨리 틀고 현관문과 뒷뜰로 나가는 문을 열라고. 알람소리에 혼이 빠져 우왕좌왕하던 나는 집안을 뛰어다니며 문을 열어젖혔지요.
집안이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전쟁이 터졌습니다. 문을 열고 부채질을 하고 팬을 최고한도로 틀어도 귓청을 떨어트릴 듯한 알람소리는 멈추지않았습니다. 근사한 저녁이고 나발이고 남편과 나는 알람소리를 멈추게하기 위해 죽을 용을 다 써야만했어요. 내 질긴 고집이 초래한 비극이었습니다.
몇 분후, 가까스로 알람은 그쳤고 나는 그제서야 고기를 반 갈랐습니다. 그리고 새 프라이팬에다 지졌습니다. 서너번을 꺼냈다 넣었다 한 고기는 육즙이 다 빠져 바짝 말라있었습니다. 애시당초 남편말을 들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웬만한 사람같으면 엄청 화를 냈겠지요. 고집부리다가 그 난리를 초래한 나를 그냥 두었겠어요. 그러나 남편은 아무소리 안합니다. 그저 묵묵히 포크를 놀릴 뿐입니다.
최근에도 고집부리다가 곤경에 빠졌던 일이 있었습니다. 주말만 되면 금 캔다고 산으로 내빼는 남편이 지지난 주말은 쉬겠다고 했습니다. 참 잘 되었지 뭐예요. 중국마켓에 갈 일이 있었거든요. 집에서 25마일 정도 떨어진 중국마켓에서 꼭 살 게 있었지만 혼자 가기가 좀 힘들어서요.
남편이 말했습니다. 중국마켓 주소를 알아놓으라고. 나는 고개를 저었어요. 주소 필요없어. 그 쪽 근처에 가기만하면 금방 찾을 수 있으니까. 아주아주 큰 건물이라 쉽게 눈에 뜨여요... 5,6년전 지인들한테 묻어서 한 번 가 본 기억이 있습니다. 길가에 위치한 크고 웅장한 건물이었습니다. 문을 닫지만 않았다면 그 중국마켓은 분명히 그 자리에 있을 겁니다.
토요일 아침, 떠날 채비를 차리며 남편이 말했습니다. 주소 알아 놨어? 나는 대답했습니다. 주소없어도 된다니까. 그럼 상호는, 하고 남편이 물었습니만 상호도 몰라요. 간판이 어마어마하게 컸다는 것만 떠오를 뿐 상호는 기억이 안납니다. 남편이 어이없어하며 말했습니다. 주소도 모르고 상호도 모르는 데를 지금 가시겠다? 괜한 고생하지말고 누구한테 전화해서 물어 봐. 상호라도 알아야지. 나는 또 고집을 부렸지요. 일단 거기까지 가면 금방 찾을 수 있다니까. 바로 길가에 위치해있는 건물이야.
고속도로에서 빠져 내가 일러준 지역으로 들어서면서 남편이 또 말했습니다. 누구 아는 사람한테 전화해서 상호라도 알아내면 좋을 텐데...들은 척도 안했지요. 중국마켓이 위치해 있는 지역에 들어섰으니 금방 어딘지 알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저 신호등을 건너면 바로 왼쪽에 있을 거야"
나는 확신에 차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웬걸. 신호등을 지났는데도 내가 찾는 건물은 없었습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아마 다음 신호등인가봐. 다음 신호등을 지났습니다. 역시 없습니다. 다음, 다음, 다음 신호등을 외치며 몇 개의 신호등을 지났지만, 애타게 찾는 건물이 눈앞에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상가가 즐비한 길을 지나고 주택가가 슬슬 다가오도록 말입니다.
"아무래도 그냥 지나쳤나봐요. 유턴해서 돌아갑시다..."
남편은 말없이 차를 돌렸습니다. 좀 천천히 가자고 남편에게 부탁한 다음 나는 창 밖으로 시선을 고정시켰습니다. 그렇게해서 그 중국마켓을 찾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 긴 길을 두 번이나 올라갔다 내려갔다하면서 샅샅이 뒤졌는데 없습니다!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어요. 분명히 그 길 옆에 그 중국마켓이 있었단말입니다. 6, 7년 전에!
젠장, 그날따라 햇볕은 왜 그리 따갑던지. 에어컨디션을 켰지만 직선으로 내려 꽂히는 햇볕은 차 안을 찜통처럼 달구었어요. 설상가상으로 주유기의 기름도 바닥을 보이고 있습니다. 얼마나 짜증이 나야지. 정말로 다 뒤집어엎고 싶은 걸 참으며 나는 남편에게 말했어요.
“그냥 집으로 돌아 가요. 그 마켓건물이 통째로 사라졌나봐...”
남편은 잠자코 운전을 계속했습니다. 나는 소리를 질렀어요. 그냥 집으로 가자니까! 남편은 내 신경질에 아랑곳없이 좀 더 가더니 한 주유소앞에 차를 갖다댔습니다. 차에서 내리면서 남편이 말했습니다. 기름 넣을 동안 누구 아는 사람한테 전화해서 위치를 물어봐요. 그 마켓에서 꼭 살 게 있다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사갖고 가야지...
나 때문에 아무리 곤경에 처하는 일이 생겨도, 열통터지는 상황이 발생되어도 남편은 나를 탓하지 않습니다. 비난하지 않습니다. 힐난하지 않습니다. 그저 부드럽게 타이를 뿐입니다. 어때요? 패죽이지않고 살려두는 이유로 아주 합당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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