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 중 하나를 꼽으라면 중앙일보사를 그만 둔 것입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칼로 무우 자르듯 내렸던 결정이었습니다. 사직서를 내자 신문사에서도 얼떨떨해하는 눈치였어요. 나름 성실하게 일도 잘했고 표면적으로는 기자일을 재밌어하는 것같던 사람이 갑자기 그만 둔다고 하니까.

물론입니다. 재미 있었습니다. 새로운 사고(事故)와 사건을 접하는 일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이. 특히 인터뷰하는 일이 내 적성에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사람한테 관심이 많습니다. 남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것이 늘 흥미롭고 즐거워요. ‘한 사람이 내게 온 것은 한 우주가 온 것과 마찬가지다’ 는 말처럼 나와는 판이하게 다른 삶을 산 사람의 성장배경 및 가치관, 그리고 사고방식과 생활철학 등을 전해듣는 일이. 그들의 삶을 통해 얻을 수있는 지혜와 교훈은 덤이었고.

그래서 10년 넘게 일하면서도 지겹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그만 둬버렸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영어때문이었습니다. 한국 신문사인 만큼 사장도 한국인, 직원도 한국인, 상대하는 사람도 한국인, 모두 한국인입니다. 게다가 기사도 한글로 씁니다. 영어가 늘리가 없습니다. 어느날 문득 강한 자괴감이 들더군요, 내 형편없는 영어실력이. 그래서 미련없이 그만두어버린 겁니다.

내 인생에서 제일 잘한 일이 신문사를 그만둔 것이기는 하지만 제일 잘한 일을 또 꼽으라면 신문사에서 일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 아이러니하지요. 그렇습니다. 신문사에서 일한 것이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잘한 일도 됩니다. 신문일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때문입니다. 내 글에 가끔 언급되는 ‘내 친구할배들’ 말입니다. 그들을 빼놓고는 내 미국생활에 대해 말 할 수 없습니다.

그동안 나는 내 또래의 여자친구가 전혀 없었습니다. 같이 수다떨고 쇼핑가고 취미를 공유할 만한. 대신 할배들이 30년 내내 나와 함께 했습니다. 내가 싱글일 때도, 결혼한 후에도 한 달에 서너번은 반드시 만나서 밥을 먹었고 차를 마셨으며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내 친구할배들. 미국까지 흘러들어 오기는 했지만 한때는 한국사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던 인사들이었습니다. 매일매일 송곳 위를 걷는듯한 시청률 경쟁을 견디다 못해 피신해 온 방송국 PD 할배, 아내의 외도로 이혼한 후 전재산을 정리해 아이들 셋을 데리고 미국행을 택한 전직 고교 교사 할배, 가난한 집 장남으로 동생들 뒷바라지에 지쳐 자기인생을 찾겠다며 밀항해 온 중학교 수학교사 할배, 어용교수 물러나라는 학생들의 등쌀에 밀려 이민을 결심한 지방의 대학교수 할배, 학벌은 높지않으나 어릴 때부터 미군부대 근처에서 놀아서 영어 하나는 현지인 뺨치게 하는 할배, 육이오 전쟁시, 삼대 독자인 아들만은 어떻게든 남한으로 피신시켜야 한다는 부친의 뜻에 따라 어머니랑 누나들과 생이별을 한 할배, 직원 50명의 회사를 주식으로 털어먹고 빈털터리로 가족이민 온 할배 등.

전쟁 직후 국비장학생으로 유학와서 미국 학계에 종사한 박사들, 의사들 서넛도 내 친구였지요. 전화 첫 마디를 늘 ‘나 김 생원이올시다’ 로 시작하던 한 영문학교수는 한글로 자서전을 쓰겠다고해서 나랑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미국 정신의학계의 저명한 정신과 의사 한 사람도 나랑 깊은 친분을 맺었더랬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악랄한 살인범인 찰슨 맨슨를 직접 상담했던 분입니다.

정치인 김근태, 손학규 씨랑 같은 동기인 할배가 있어요. 당시 최고명문인 경기고등학교에서요. 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를 지망했다가 낙방, 건국대에서 장학금으로 공부했다고 했습니다. 뭐 그런가보다 했는데 고향의 남자친구가 할배와 같은 대학출신입니다. 그 친구가 말합니다. '그 학번은 우리 학교의 전설로 통한다. 대한민국 최고 수재들로 이루어진 학번이었지. 그런 분과 친분을 나누고 있다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삼아라'.

기자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림자도 밟아보지 못할 쟁쟁한 할배들과의 인연을 맺으면서 나는 견문이 많이 넓어졌습니다. 다방면의 지식과 소양도 쌓을 수 있었고. 아울러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사람을 이해하는 폭도 깊어졌습니다. 할배들과 만나면 군대부터 시작해서 교육계, 정치계, 재계, 학계 등 각계에 걸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들이 살아온 세월의 길이 만큼이나 소재는 무궁무진했습니다. 시집식구, 남편, 아이들, 패션, 인테리어, 음식 등 대부분 실생활에 국한되어 있는 여자들과는 대화 소재가 달랐던 거지요. 어느 가정에서나 발생하는 부부싸움도 나는 그들, 남자들의 입장에 서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끔 부부 갈등을 하소연하는 독자들에게 여자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조언을 해 줄 수 있게 되었지요.

유독 내 흥미를 많이 끌었던 것은 군대 이야기였습니다. 사병으로 훈련받던 경험들이 아니라 장교나 장군으로 군대를 이끌었던 실전들이라서요. 특히 월남전 참전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나 들어도 구미가 당겼던 소재였어요. 영화나 책으로서만 막연하게 접했던 월남전을 그들 할배들로부터 생생하게 들을 수있었던 것입니다. 숨을 쉴 수 없는 극한의 더위와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공포속에서 직접 군대를 통솔하고 진두지휘했던 이야기는 그 어떤 영화보다도 흥미진진했습니다. 바로 눈앞에서 적이나 동료의 사지가 떨어져나가고 피가 강물처럼 흐르는 무시무시하고 참혹한 전쟁터의 상황을 그들 입으로 직접 들으면서 오늘 내가 누리는 자유에 안도와 감사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한국정부는 몇십년이 지나도록 이 참전용사들을 모른 체했답니다. 그러다가 이명박 대통령 때부터 약간의 참전수당을 지급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남자들인 만큼 그들 사이에 ‘남성’에 관한 소재도 빠질 수 없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쇠퇴해지는 성기능, 그리고 정력제 등에 관한. 오랜세월을 같이 했던 때문인지 부끄러움이나 체면이나 남녀간의 예의같은 건 애시당초 사라진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같이 거듭니다. 딸 나이 대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내 나이 대도 아닌 여자가 여러 할배들과 앉아 ‘바이그라’가 어떠니 ‘팔팔정’이 어떠니, 하는 요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광경을 상상 해보세요. 참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었지요.

요즘, 그 할배들이, 거의 3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했던 그 할배들이 하나 둘씩 스러지고 있습니다. 흐르는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앞 다투어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연기처럼 허망하게. 이슬처럼 덧없이.

현재 살아있는 사람들도 건강이 썩 좋지 못합니다. 많이 아픕니다. 치매에 걸려 가족들마저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에 있거나 자리보전해 바깥에 나오지를 못하거나 나무토막처럼 양로원에 누워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거나 건강은 아쉬운대로 괜찮지만 눈이 안 보여 운전을 못하거나. 한때는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나던 사람들이, 5월의 꽃처럼 화려하던 사람들이, 나무처럼 푸르던 사람들이 먼지같이 보잘 것 없는 존재들이 되었네요.

며칠전 서류함을 정리하다가 구석에 얌전히 놓여있는 명함집을 발견했습니다. 예전, 기자일을 하면서 받은 명함들입니다. 필요없다고 여겨지는 건 뭐든 후딱후딱 잘 버리는데 웬일로 그건 잘 보관해 두었네요. 통째로 쓰레기통에 넣으려다가 나랑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의 이름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명함을 하나하나 빼서 살펴보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더군요. 꽤 두꺼운 명함철에 빽빽하게 꽂혀져 있던 사람들, 그 중 절반 이상이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신문에 부고가 나거나 바람결에 들어서)이었고 아니면 나랑 연락이 두절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모르긴해도 대부분 내 친구할배들같은 처지에 있겠지요. 남의 손길 없이는 화장실도 혼자 못가는 무기력한 존재들이 되었을 겁니다. 금박으로 자랑스럽게 박혀있던 그들의 이름, 지위, 사업체들은 이제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을 겁니다.

명함들을 쓰레기통에 넣으면서 우리 인생이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학벌이나 명예나 잘난 인물이나 지식이나 지위나 재산도 세월 앞에서는, 늙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금 살아서 기어가고 있는 개미 한 마리 보다 보잘 것 없습니다. 헛되고 헛됩니다. 그 보잘것 없고 헛된 것들을 위해 죽을둥살둥 매진하는 우리들. 중요한 건 오늘인데. 오늘 하루를 즐겁게 충실하게 만족하게 사는 것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