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남매의 둘째인 친척언니가 있습니다. 불우한 성장배경을 가진. 아버지가 정신지체입니다. 엄마는 유머감각도 풍부하고 인물도 빼어났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왜 정신지체를 가진 남자에게 시집 왔을까요. 어른들의 말로는 가난한 친정을 살리려고 억지 결혼을 했다는 것 같습니다만 확실한 건 모릅니다. 어쨌든 열심히 살았는데 막내아들이 또한 정신지체입니다. 정신지체 남편도 힘든데 아들 마저도. 얼마나 버거웠을까요. 어느날 언니의 엄마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엄마의 짐을 대신 지게 된 큰딸. 곧이어 큰딸도 어머니의 뒤를 따릅니다.

정신지체를 가진 사람이 둘이나 되는 집에서, 또한 둘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집에서 맨정신으로 사는 게 이상하지, 꽤 똑똑해서 주위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언니는 비구니가 되고 싶다면서 속세를 떠납니다. 그 후 몇 년, 바람결에 들었습니다. 한 남자와 불같은 사랑에 빠져 하산했다고.

그리고 나는 미국에 왔고 그 언니에 대한 소식은 끊어졌습니다. 한국에 갈 때마다 우리 부모를 비롯, 친척 어른들에게 언니의 소식을 물어봤지만 결혼해서 아이 둘을 낳았다는 이야기만 전해줄 뿐 자세하게 근황을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집전화와 이메일로만 소통하다가 주위의 성화와 남편의 강권에 밀려 스마트폰을 장만하게 되었습디다. 그동안 소식이 깜깜하던 고향친구들과 금방 연락이 되었고 내 근황을 전하기 위해 '카카오 스토리'를 시작했습니다. 어느날 카카오 스토리 친구추천에 낯익은 이름이 떴습니다. 바로 그녀, 비련의 여주인공인 언니였습니다.

한국나가서 시골에서 작은 찻집을 하고 있는 그녀를 만났습니다. 이혼했답니다. 당신을 파계시킨 남자와 결혼했었더냐, 물어보지 못했어요. 너무 세속적인 질문같아서.

지금, 자녀를 출가시킨 후 백년 가까이 된 한옥집에서 혼자 사는 그녀.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습니다. 그것들을 카카오 스토리에 올리는데 (혼자 감상하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빼어난 작품들이 많아요. 그래서 퍼다가 내 주위사람들에게 나릅니다) 그녀의 작품에는 늘 비탄과 외로움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참 가슴이 아픕니다. 웬만한 사람은 감당도 못할 어둡고 기구한 가족사를 지닌채 살아가야하는 그녀가 불쌍하고 가엾습니다. 매일매일 그녀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울까요.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옆에 누가 있으면, 자상하고 이해심많고 가슴 넓은 남자라도 있으면 사는 게 좀 수월할 텐데.

그러다가 내가 생각하는만큼 그 언니가 자신의 삶을 비애스럽게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자성을 했습니다. 언니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면서 만족과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내 잣대로 그녀의 인생을 함부로 매도하고 동정한 것은 아닐까요. 건방지고 외람되게 말이지요. 단편 영화 한 편을 보고난 후 든 생각이었습니다. ‘이웃집 창문'이라는 영화.

‘The Neighbors'Window'. Marshall Curry이라는 감독의 단편영화로, 2020년 제92회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단편영화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주인공 앨리는 서너살 된 남매를 둔 삼십대 중후반의 여성. 배가 나오고 머리가 슬슬 벗겨져 남자로서의 매력을 잃어가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셋째를 임신 중입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엄마 손을 필요로 하는 남매와 매일 산더미같은 가사와 자상하지 못한 남편과 함께 단조롭고 심심한 나날을 보내는 그녀입니다.

반면 반대편 건물, 큰 창문을 통해 보이는 아이 없는 젊은 부부의 일상은 매일 매일이 ‘신나는 달밤'입니다. 파티를 자주 합니다. 산해진미와 가넷빛 포도주가 놓인 식탁에서 친구들과 파안대소를 하고 춤을 추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같습니다. 밤이 되면 젊은 부부는 열정적으로 섹스를 합니다. 커튼을 닫지 않은 채 말입니다. 반대편 건물에서 내부가 훤히 보이는 걸 알면서도 완전 나체로 거리낌 하나 없이 섹스를 하는 강심장이 놀라울 따름.

앨리는 젊은 부부의 열정과 자유와 활기가 부럽습니다. 아울러 올챙이같이 부른 배가 지겹다는 생각을 합니다. 매일매일 육아와 집안일에 치여서 동동거려야하는 자신의 삶이 구질구질하게 느껴집니다. 짜증과 울화가 치밉니다. 마침내 망원경까지 동원해서 반대편 집안을 훔쳐보는 앨리.

어느날 반대편 집안 남자의 머리가 빡빡 깎여있는 걸 발견하게 되고 그후부터는 침대에만 계속 누워있는 걸 보게 됩니다. 늘 웃음소리가 뒤덮이는 것같던 집안은 어항속처럼 조용해 보입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의 앨리. 집안일을 하는 틈틈이 그쪽 동정을 살핍니다.

한밤중, 앨리는 여느때와 같이 망원경으로 옆집을 살피던 중 갑자기 응급대원들이 들이닥치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곧 하얀 시트에 덮여 집 밖으로 실려나가는 남자. 앨리는 불에 덴 듯 벌떡 일어섭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뛰어나가지요. 응급차에 실리는 남편의 주검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아내. 주춤주춤 다가가며 위로의 말을 건넬까, 말까 망설이는데 반대편 건물 여자가 먼저 앨리를 알아 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당신, 우리집 건너편 건물에 사는 사람이군요. 당신은 참으로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을 가진 여자입니다. 남편과 더불어 아들 딸에 둘러쌓여 있는 당신의 모습은 내가 꿈꾸던 이상적인 가정이었어요. 당신의 모습을 창문 너머로 훔쳐보면서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내가 싱글일 때 늘 부러워하던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돌아볼 만한 미모를 가진 여성이었습니다. 또한 영화배우처럼 잘 생기고 멋진 남편과 예쁘고 똑똑한 아들과 딸을 두었어요. 어릴 때 미국에 왔기에 현지인처럼 완벽한 영어를 구사했지요. 부모와 형제들도 가까운 곳에 살았습니다. 그야말로 바늘끝 만큼의 부족함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삶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온가족이 성장(盛裝)하고 외출하는 걸 간혹 보면서 세상에는 저렇듯 축복받은 여성도 있구나, 그녀를 선망했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하나도 가지지 못한 전부를 가진 그 여성이 내가 부러워하던 것 만큼 썩 행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그녀가 말했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갈구하는 결혼생활이었다고. 자기가 사랑하는 만큼 남편의 사랑이 부족한 것 같아서 항상 결핍을 느꼈었답니다. 가슴 한 켠이 허전했었답니다. 밖으로만 밖으로만 도는 남편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었답니다.

아주 이상적으로 보이는 가정에도 남 모르는 아픔이 있고 기구하고 불행해 보이는 사람의 인생에도 웃음과 평안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가끔씩 창문으로 들여다 보는 남의 집 사정을 우리가 어떻게 속속들이 다 알겠어요. SNS로 남의 집 상황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현대사회에서 우울증 환자가 급증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다 나랑 남을 비교하면서 야기되는 문제입니다. 나만 빼놓고는 다 잘먹고 잘사는 것 같아보이니까요.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데. 보이는 것으로 남의 삶을 멋대로 판단하지말고 오늘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면 사는 일이 참 쉬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