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마이 갓!"
목욕탕쪽에서 소스라치는 듯한 남편의 비명이 들려옵니다. 뭣 때문에 또 저러나. 얼음같이 차갑고 날카롭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수선과 부산 떠는데 일등인 남편입니다.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별로 놀랍지도 않은 사소한 일에도 오마이갓을 찾으며 세상이 끝난 듯 난리를 쳐대 날 놀라게 한 게 한두번이었어야지.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부엌에서 내 할일을 합니다.

내가 별 반응이 없자 남편이 부엌으로 뛰듯이 오더니 말합니다.

"9파운드가 늘었어, 자그마치 9파운드나!”

자기 몸무게를 말하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날 덥다고 아이스크림을 달고 살더니 꼴 좋게 됐다’ 라고 비아냥거리려는데 남편이 말해요. 블루가 그렇다고. 목욕탕 저울로 달아보니까 지금 블루가 19파운드가 됐다고.

아이고머니나,정말로 오마이갓이네요. 최근들어 둥실둥실,두둥실, 몸매가 공처럼 둥글어지는 것 같길래 털이 길어서 그런가했더니 살 때문이었네요.

운동부족은 아닙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한 시간 정도는 뛰고 걷습니다. 게다가 잠시도 가만 있지않고 사부작거리며 하루종일 집안을 헤집고 다니는 블루입니다. 운동이 부족할 리는 없습니다. 블루가 살이 찐 건 아마 너무 많이 먹어서일 겁니다.

작년 8월 말, 공항에서 이동봉사자로부터 처음 건네 안았을 때의 블루는 솜사탕처럼 가벼웠습니다. 하도 야위어서 갈비뼈가 드르륵드르륵 만져져요. 입양공고에는 11파운드라고 명기되어 있었지만 집에 도착하자마다 몸무게를 재어 보니 10파운드가 조금 안 되더군요. 얼른 닭죽을 큰 양푼으로 하나가득 주었지요. 허겁지겁 덤벼들어 설거지가 필요없을 정도로 밥알 한 톨 남기지 않고 싹싹 핥아먹은 블루. 그래도 양이 차지않는지 밍키의 밥그릇으로 돌진하더니 거기 담긴 사료를 다 먹어치웁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어서 배탈날까 걱정도 되었지만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와그작와그작 소리를 내며 정신없이 먹어대는 블루를 아픈 마음으로바라만 봤지요. 그동안 얼마나 굶주렸으면...


식탐이 별로 없는 밍키 밥그릇에는 사료가 늘 남아 있습니다. 배가 고파야 조금 먹고는 물러서는 밍키입니다. 블루가 오고부터는 그릇에 사료가 남아날 틈이 없습니다. 있으면 있는대로 다 먹어버리니까. 그래서 시간 맞추어 배식을 할까 생각했었습니다만 남편이 말렸어요. 길거리에서 떠돌며 배를 주린 기억에다 유기견 보호소에서 또 수십, 수백마리의 동료들과 사료 쟁탈전을 벌여야했을 습성이 남아서 그럴 거라고. 욕심내지 않아도 밥그릇에 밥이 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면 괜찮아질 거라고.

남편 말이 맞았네요. 일 주일 쯤 지나자 블루가 달라졌습니다. 그릇에 사료가 부어지기가 무섭게 달려들던 블루가 밍키처럼 배가 고프면 좀 먹고 그렇지 않으면 본척 만척하는 겁니다. 간식은 여전히 잘 먹습니다. 문제는 간식을 너무 자주 주는 데 있어요. 아침에 눈 뜨자마자 모닝 간식을 비롯해 산책 나가기 전에, 하고 들어와서, 바깥에 나가 오줌 한 번 싸고 들어올 때마다, 중간에 심심해 보이면, 예쁜 짓하면, 등등의 이유로 하루에도 열 번 이상 말린 닭고기를 간식으로 줍니다. 오전, 오후에 닭가슴살을 넣고 끓인 죽을 주고. 일 주일에 한 번 소금 안 친 계란 프라이를 주고 또 한 달에 한 번은 스테이크를 구워 잘게 썰어 주고.

이제 살을 좀 빼야할 것 같습니다. 간식도 닭죽도 조금씩만 줘야겠습니다. 빵빵한 몸매를 좀 홀쭉하게 만들어야겠습니다. 한국 보호소에 수용되어 있는 개들은 여전히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다는데 여기 있는 개들은 너무 먹어 다이어트를 시켜야 할 지경입니다. 세상이 평등하지 않습니다.

한국으로부터 유기견을 입양한 사람들로 구성된 '단체카톡방'이 있습니다. 사십명 가까운 사람들이 서로의 강아지 소식 및 정보를 교환하는 방입니다. 나는 제일 마지막으로 이 방에 조인했는데 누구보다도 글과 사진을 많이 올립니다. 갈수록 똑똑해지고 인물이 훤해지는 블루의 모습을 혼자만 볼 수가 없어서. 자랑하고 싶어서.

그 방에는 유기견들을 미국에까지 잘 입양되어 올 수 있도록 절차를 밟아준 한국의 봉사자도 한 명 있습니다. 한국의 길거리에서, 동물보호 센타에서 천대와 서러움 속에 있던 강아지들이 우리들에게 와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내는 걸 늘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시집가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딸을 보는 친정엄마처럼.

하루는 이 봉사자가 글을 하나 올렸습니다. 한국의 한 유기견 보호소에서는 이틀에 한 번씩 배식을 한다는 글. 물론 사료가 모자라서지요. 세상에서 제일 큰 서러움이 배고픈 서러움이라고 했는데 하루에 한 번도 아니고 이틀에 한번이라니!

정말로정말로 가슴이 아팠습니다. 사료를 좀 보내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에게 입이 떼어지가 않았습니다. 기부금에 대한 나쁜 경험때문에요. 우리가 보냈던 기부금이 도움을 필요로하는 사람에게 전달되지 않고 중간에서 사라져버린 경험이 몇 번이나 있었거든요.

아는 사람은 알지만 또한 나는 한인단체에 적지않은 기부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보낸 기부금이 어디에 쓰이는지 전혀 모릅니다. 어느 단체든 제대로 된 결산보고를 안 합니다. 단체의 누구누구가 중간에서 착복했다는 소리만 들리고. 그래서 요즘은 일체 기부를 안 합니다. 한 할배는 일단 기부금을 보낸 후의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게 편하다고 말하지만 사람 마음이 어디 그렇습니까. 절 모르고 시주할 수는 없잖아요.


물질과 돈에는 만족이라는 게 없습니다. 99섬 가진 놈이 한 섬 가진 놈을 탐낸다는 속담처럼, 말 타면 경마잡히고 싶다는 속담처럼요. 무슨 말인고 하니 형편이 넉넉해서 기부를 많이 하는 건 아니더라 이겁니다. 돈이 남아서 하는 기부는 없더라 이겁니다. 없는 살림이지만 남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 하나로 내 주머니를 터는 것입니다. 변변한 직장도 없이 김치 만들어 팔면서 연명하는 지인이 있습니다. 그 어려운 살림에서도 한 달에 20불씩 기부를 합니다. 그렇게해서 보낸 우리들의 정성입니다. 우리의 바람대로 적재적소에 잘 쓰여져야지 않겠어요. 그러나 슬프게도 그 반대의 경우가 많습니다.

망설이다가 남편한테 한국 유기견 보호소 사정을 얘기했습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남편이 순순히 허락을 합니다. 지난번에 블루를 입양하면서 한국에 있는 단체들은 믿을 수 있을 곳이라는 확신이 생겼다네요. 얼씨구, 좋을시고! 서둘러 돈을 보냈습니다. 혹시라도 남편이 변심하면 안 되니까.

얼마후, 내가 보낸 돈으로 사료를 1톤(2천여 파운드)이나 구입할 수 있었다는 감사편지를 보호소로부터 받았습니다. 사진도 몇 장 왔습니다. 우와, 증거사진까지 받을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신바람이 나서 사진을 남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역시 한국 단체들은 정확하고 정직하네,하면서 남편이 미소를 지었어요. 나도 미소를 지었습니다. 보호소 개들이 당분간 배를 곯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흐뭇한 미소가 저절로 나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