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한국 방문 때, 호텔로 놀러 왔던 무당친구가 내 가방을 싸주었습니다. 허술하고 빈틈많은 성격의 친구인데 짐 싸는 건 다르더군요. 감탄스러울 정도였어요.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친구의 야무진 손길이 빛을 발했습니다. 검색대에서 내 가방을 재수색하겠답니다. 동식물을 반입하느냐는 문항에 '예스'를 한 때문이지요. 딱딱하고 근엄한 얼굴로 가방을 열어보던 검색원의 표정이 금방 바뀌었습니다. 미소까지 지었습니다. 차곡차곡 일렬로 반듯하고 가즈런히 자리 잡은 물건들. 자기 물건을 그 정도로 정리정돈 잘하는 사람이면 범죄에 연루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했던가 봐요. 더 살펴볼 것도 없다는 듯이 얼른 가라고 손짓합니다.

이번에도 호텔로 친구가 왔습니다. 친구 덕분에 쉽게 검색대를 통과한 경험이 있던 나는 짐 싸는 걸 친구에게 모두 일임했습니다.

친구가 짐을 쌀 동안 나는 호텔 창밖을 내려다보며 상념에 잠겼더랬습니다. 14일 격리하고 5일 동안 콩 튀듯 팥 튀듯, 소 갈 데 말 갈 데 다 다니면서 만날 사람 다 만나고 할 일 다하긴 했지만 여전히 가슴은 휑하게 비어 있어요. 친구들 만나고 동생들 만나면 충만해질 줄 알았는데, 빈 자리없이 가득 채워질 줄 알았는데.

저녁 여덟 시 비행기지만 미국으로 입양가는 강아지를 이동봉사해야 했기에  공항에 좀 일찍 나가야 했습니다. 공항버스 운행이 중단되어 택시를 이용해야 한다는 나를 위해 무당친구 남편이 공항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냥 택시를 이용하겠다고 극구 만류했지만 대접이 그게 아니랍니다. 도봉구 끝에서 와서 공항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강아지를 임시보호하던 봉사자랑 수속일체를 맡아하던 봉사자를 만나 함께 출국수속을 하려는데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꽁꽁 싼 짐을 다 풀어헤쳐야할 일이 생긴 겁니다. 마스크때문이었습니다. 마스크가 예닐곱장 짐에 들어 있었거든요. 30장 이하를 기내로 가지고 탈 수 있어도 화물로 넣어서는 단 한 장도 반출할 수 없다는 겁니다. 한 장이라도 들어있으면 짐이 통과가 안 되니 다 꺼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 큰일 났습니다. 눈 앞이 아득해집니다. 가방이 두 개였는데 어느 짐에  마스크가 들어있는지 알 턱이 없습니다. 다른 때는 그냥 가방 한 개였는데 이번에는 14일 격리할 때의 옷가지랑 미영이가 호텔로 가져다 준 쑥떡이랑 미국 지인들로부터 부탁받은 책이랑 물건들이 많아서 두 개가 된 겁니다. 물건이 넘쳐나서 지퍼도 겨우 닫았던 가방을 두 개다 열어서 확인을 해야하는 난감한 상황. 상념이고 뭐고 짐 싸는 걸 좀 지켜볼 걸.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니 강아지봉사자들이 나를 진정시킵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일단 가방을 열어봅시다. 그녀들의 도움을 받아 가방 두 개를 바닥에다 놓고 활짝 열어젖혔습니다. 뭐가 많기도 합니다. 오가는 사람들이 쳐다 봅니다. 한참동안 위에서부터 하나하나 다 헤집으니 제일 밑에 마스크들이 얌전히 놓여 있네요. 그녀들의 도움을 받아 맥주잔 거품처럼 부풀어 넘친 짐들을 억지로 다 집어놓고 가방지퍼를 채웠습니다.

다시 수속하러 카운터로 갑니다.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용량 초과랍니다 23키로가 맥시멈인데 내 짐은 35키로. 호텔에 저울이 있길래 여기까지와서 몸무게를 재는 사람이 있나 의아하게 생각했더니 짐 무게를 측정하라는 배려였네요. 벌금을 내야한답니다. 40만원. 참 젠장입니다. 돈 쓰려고 나간 한국이지만 벌금은 참 아깝습니다. 사정,읍소,협박하여 10만원으로 낙찰을 봤어요.

우여곡절끝에 짐을 부치고 강아지 '로지'를 봉사자들로부터 넘겨받았습니다(아주 작은 강아지라 기내이동해야 되어서). 큰 영광 볼 일도 없는 강아지 해외입양을 자기 돈, 시간, 에너지 써가며 봉사하는 그녀들입니다. 차 기름값이라도 하라며 돈을 조금 쥐어주자 펄쩍 뛰면서 사양합니다. 억지로 주려하자 그녀들이 말합니다.
“그럼 주신 후원금은 로지를 구해 낸 호더집의 다른 구조견들에게 사용하겠습니다. 후원금 사용 내역은 저희가 두 달에 한 번씩 올리는 인스타의 회계장부를 꼭 보세요.“
늘 느끼는 거지만 유기견 해외 입양봉사하는 분들은 천사예요, 날개없는 천사.

내가 타는 비행기는 왜 늘 공항 끝에 자리잡고 있는지. 전날 잠 못자고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먹어 춥고 배고프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게이트를 찾아 터덜터덜 걸어갑니다. 로지도 쫄래쫄래 내 뒤를 잘 따라옵니다. 두어 블락 걸었을까, 얌전히 따라오던 로지가 걸음을 멈추는 것 같더니 바닥에다 오줌을 한강같이 쌉니다. 이어 똥도 산 만큼.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면서 마구 웃습니다. 봉사자들이 가방 안에 찔러준 패드로 그것들을 닦아내면서 로지에게 말했습니다. 잘했다, 잘 했어. 기내에서는 이제 안심이구나.

비행기 안은 한국행보다 더 텅텅 비어있습니다. 승객이 나를 포함해 열 명이나 될까. 정말로 항공사가 걱정됩니다. 이 난관을 잘 견디어 나가야 할 텐데.

승무원들이 강아지를 보고 모여 듭니다. 참 예쁘고 귀여운 강아지네요. 이제 태어난 지 넉달밖에 되지 않은 아기인 로지. 정말로 예쁘고 귀엽고 착하고 순합니다. 열 시간 남짓의 비행 내내 단 한 번도 울지않고 가방 안에 얌전히 엎드려 잡니다. 이렇게 착한 로지를 입양한 사람은 복도 많지. 로지같은 강아지는 해외가 아니라면 입양이 어렵답니다. 곧 안락사랍니다. 순종이 아니기 때문에. 

갈 때와 마찬가치로 이륙도 하기 전에 수면제를 털어놓고 잠을 청했습니다. 간간이 눈을 떠 로지를 살펴보았다가 다시 잠에 떨어졌지요. 눈을 뜨니 창밖으로 캘리포니아의 밝고 찬란한 햇빛이 눈을 부시게 합니다.

이제 입국수속을 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약간 긴장이 됩니다. 다른 건 겁날 게 없었지만  로지때문입니다. 작년에도 강아지를 두 마리나 동행해 입국했는데 이번에도 데리고 들어오는 사실을 알면 '너는 무슨 일로 개를 매번 동행하느냐'고 따져 물을 것 같아서. 그러나 아무 문제 없어요. 1분도 안 걸렸어요. 시민권자는 세관신고서도 필요없습니다. 그냥 여권만 보이면 됩니다. 로지에 관한 서류도 대충 쓰윽 보고 그만입니다.

다음은 검색대. 워낙 입국자가 적으니까 검색원들이 할 일이 없어서 그런지 예전에는 웬만하면 그냥 다 보내더니 이번에는 일일이 짐 검사를 합니다. 일단 묻습니다. 가방 안에 뭐가 들었는지. 육류가 있으면 이실직고하랍니다. 육류가 있을리 없는 나는 씩씩하게 대답했지요. 친구가 해다 준 '라이스 케익'이랑 책이랑 김이랑 옷가지랑 신발이랑 김치(젓갈)이다! 그러나 검색원은 내 가방 두개를 검색대에 올려서 스캔을 하더니 두 개 다 열어봐야겠다고 통보합니다. 그리고는 내 대답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는 듯이 가방을 열어 하나하나 들추어봅니다. 내가 말한대로 책이랑 떡이랑 동생이 싸준 젓갈이 나왔습니다. 검색원은 두 번째 가방을 열더니 다시 수색을 시작합니다. 그 가방안에는 옷이랑 신발, 그리고 동생이 해 준 콩가루가 들었지요. 가방  밑에까지 손을 넣어 더듬어대던 검색원이 박스 하나를 쑥 잡아뺍니다. 그리고는 의기양양하게 소리칩니다. 바로 이거야! 

날이 갈수록 기력이 딸리는 것 같아 몸 보신 좀 하려고 샀던 홍삼엑기스입니다. 아니, 홍삼엑기스가 왜? 검색원이 말합니다. 홍삼엑기스 안에 미국에서 금하는 동물물질이 들어있을 수도 있다고. 녹용이 첨가된 걸 말합니다. 그는 전화기를 꺼내 홍삼에 적힌 주성분을 사진 찍더니 영어로 번역해서 꼼꼼히 읽어보더군요. 나는 바짝 얼었지요. 없는 살림에 큰 돈 주고 산 것입니다. 나도 몰랐던 녹용 성분이 들어서 몽땅 다 뺏길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덜덜 떨려요. 다행히도, 다행히도, 녹용성분이 없었던가 봐요. 검색원이 내게 'Free to Go'라고 말합니다. 미국사람들이 잘 쓰는 말인 프리 투 고 라는 말이 그렇게 반가울 줄이야!

로지 만나기를 목 빼고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을 생각해 바람처럼 빠르게 밖으로 나갔지요. 아닌게아니라 엄마, 아빠, 언니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를 보자 반색을 하며 뛰어 오네요.

로지를 건네 주는데 눈물이 왈칵 나왔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손을 거쳐 거의 하루를 걸려 미국에 도착한 로지, 그 힘들고 긴 과정을 조용히 참아낸 로지가 기특하고 대견하고 미안해서. 그리고 마침내 평생을 함께 할 주인 품에 안긴 로지를 위한 기쁨의 눈물이었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로지 입양주가 준 종이가방을 열었습니다. 내 독자이기도 한 그들이 가방을 건네주면서 말했습니다. 작가님집에 아무것도 드실 게 없을 것 같아서 준비했어요. 육개장과 겉절이와 도라지 나물과 인스턴트밥. 그리고 감사의 말을 손으로 쓴 카드와 커피 기프트 카드.

그들의 말대로 3주나 비운 집 냉장고에는 계란밖에 없습니다. 육개장과 밥을 데워서 식탁에 앉았습니다. 밥을 한 술 뜨는데 휴, 하고 한숨이 나옵니다. 길고 긴 여정 끝에 ‘홈 스위트 홈’에 잘 입성했다는 안도의 한숨이었습니다. 

- 사진은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친구들에게 작별인사 전화를 하는 동안 내 발치에서 얌전하게 누워 있는 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