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를 하려고 옷을 벗다가 양말이 하루종일 발에 잘 꿰어져있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의아해서 살펴보니 내 것이 아니었어요. 시어머니의 양말이었습니다. 역시 비싼 게 좋긴 좋네요. 발목 밴드 부분이 아주 탄탄합니다. 그동안 내가 신었던 양말은 늘 발에서 빙빙 돌아 갔었고 걸핏하면 잘 벗겨졌더랬어요. 99센트 스토어에서 산 싸구려라서. 저녁에 강아지랑 산책하면서 둘렀던 시어머니의 캐시미어목도리도 얼마나 가볍고 따뜻하던지요. 내 합성섬유 목도리와는 질이 달랐습니다.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난달 하순에, 병원에서. 지난 번에 쓴대로 장례식을 한다해도 아무도 참석할 사람이 없어 그냥 화장해서 납골당에 모셨습니다. 참 간단합디다. 돈만 주니까 다 알아서 해주었어요. 우리가 관여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문제는 시어머니가 평생 살았던(거의 60년을)집안의 물건들이었습니다. 행여나 깨질까, 닳을까 애지중지하던 물건들이 주인을 잃으니까 한낱 쓰레기로 전락해버렸어요. 주말마다 남편이랑 강아지 두 마리를 이끌고 내려가서 치우고 없애고 정리를 해야했습니다.

평생 자기만을 위하면서 산 사람답게, 물건들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사람답게, 사람보다 물건들을 더 귀히 여기던 사람답게 그녀가 남긴 것들은 어마어마했습니다. 산더미였습니다. 걸음을 못 걸어 집안에만 갇혀있는 신세면서도, 입지도 신지도 못하면서도 옷들과 신발들을 잔뜩 온라인으로 샀었네요. 상표도 안 뗀 물건들, 박스에서 꺼내지도 않은 물건들, 찬장을, 옷장을, 박스를 열 때마다 쏟아지는 물건들, 물건들, 물건들. 정말로 기가 질리게 많았습니다.

수집하던 레코드판, 책, 인형들. 그리고 세 방 옷장에 가득가득 들어 차있는 옷, 구두, 핸드백. 귀걸이 목걸이 팔찌 등 세 개의 보석함에 넘칠 정도로 많은  장신구(진짜도 있고 모조품도 있고)들. 장사할 것도 아니면서 웬 침대시트들과 타올들은 그렇게 많이 사 재었는지. 사진이 꽉꽉 들어찬 열 개가 넘는 앨범, 남편 유치원때부터의 가정통신문, 그리고 평생 버리지않고 모은 것같은 카드와 편지들. 각종 댄스대회의 포스터, 배지, 트로피들. 별로 작지않은 부엌 찬장에도 모자라 옷장 구석구석에 박스로 쌓여있는 그릇들(그릇에 대한 안목이 별로 없는 나지만 얼핏 보기에도 꽤 값나가 보였습니다)과 두 박스나 되는 은제 포크 세트, 크리스탈 꽃병들과 장식품들.

참 이상하지요. 시어머니의 물건들에 욕심이 전혀 나지 않는 겁니다. 간결하고 직선으로 이루어진 현대적인 쪽을 선호하는 나와 구불구불, 치렁치렁, 곡선의 클래식한 스타일을 좋아하는 시어머니의 취향이 상반되기는 했지만 하나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없어요. 저렴한 것 위주인 나와는 달리 시어머니의 물품들은 모두 최고급인데. 시어머니랑 나는 체구가 같아서 딴 건 몰라도 스웨터나 청바지등은 얼마든지 가져다 입을 수 있는데. 그럼에도 내가 고른 건 냄비 몇 개, 그리고 위에 말한 목도리 한 개와 양말들이었습니다.

가면갈수록 물욕이 없어집니다. 지금 있는 것만으로도 죽을 때까지 쓰고 남을 텐데 여기서 뭘 더해, 싶은 겁니다.이번에 한국 갔다 오면서도 나를 위해 산 건 홍삼 한 박스랑 책 몇 권밖에 없습니다.

시어머니의 옷들과 핸드백, 신발 등은 시어머니를 돌봐주었던 간병인들에게 다 나누어주었습니다. 웬만해서는 만져도 못 볼 비싼 것들이라 모두 반색을 하며 달려들어 가져가더군요. 그릇들도 그녀들에게 좀 가져가게 하고 나머지는 야드 세일로 팔았어요. 지금은 시중에서 구할 수도 없는 값진 그릇들이라 인터넷으로 팔면 제 값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남편이나 나나 성의도, 부지런함도 없었지요. 그저 하루빨리 처분하고 싶었어요. 사람이 살지 않는 모델하우스냐, 수녀님 방이냐, 하는 말을 들을 정도로 깨끗하고 단순하게 사는 삶을 지향하는 나는 가득가득 쌓여있는 물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나고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얼른 물건들의 정글에서 헤어나오고 싶었습니다. 

거의 한 달에 걸쳐 시어머니의 살림살이들을 정리하면서 생각이 참 많았습니다. 위에 말한대로 시어머니의 물건들에 대한 애착은 남달랐습니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비싸고 좋은 것이니 함부로 다룰 수는 없었겠지만. 설거지를 하다가 그릇 하나에 흠집이라도 만들면 난리난리난리가 났습니다. 누가 죽기라도 한 것처럼 원통해하고 아쉬워하고 아까와하면서 흠집 낸 사람을 비난해 마지않았습니다. 오죽하면 남편이 자기는 ‘thing’ 보다 인간의 감정을 우선 헤아리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을 했을까요. 남편의 그 결심은 지금까지 잘 지켜지고 있어요. 어제 산 새 차를 우그러뜨리고 들어와도 남편은 절대 나를 나무라지 않습니다. 물건보다는 사람의 감정이 더 중요하다면서. 시어머니는 완전히 반대였고요.

어느 크리스마스이브였다고 기억합니다. 은제 접시랑 포크, 크리스탈 와인 잔, 촛불, 새하얀 식탁보등으로 영화 장면처럼 완벽하게 세팅된 저녁식탁에 시아버지가 붉은 포도주를 쏟았습니다. 뭘 가지러 일어서다가 입고 있던 와이셔츠 단추에 걸려 포도주 잔이 넘어진 것이지요. 눈처럼 하얀 식탁에 번져나가는 붉은 포도주. 시아버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습니다. 시어머니의 가시돋친 원성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하는 얼굴. 아니나 다를까. 시어머니 입에서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속사포같은 잔소리가 터져나왔습니다. 칠칠히 못한 당신때문에 여지껏 제대로 된 로맨틱한 식사를 한 적이 없다. 필요한 게 있으면 부탁을 할 일이지 왜 일어서다가 이 사단을 만드냐. 빨간 포도주라 빨아도 잘 지워지지도 않을 텐데 이 비싼 식탁보를 어떻게해야 하느냐. 고개를 떨구고 듣고만 있는 시아버지를 편들고 나선 것은 남편이었습니다. 그 멸시의 말로 인해 상대가 입을 가슴의 상처보다 그까짓 식탁보가 더 중요하단 말이요?! 그렇게 귀한 식탁보였다면 깔지말고 그냥 맨식탁에다 저녁을 차리지 그랬어요?!

또 있습니다. 남편과 처음으로 한국방문을 할 계획을 세웠는데 키우고 있던 강아지가 걸렸습니다. 남편이 시어머니께 부탁을 해보겠답니다. 시어머니의 성향을 잘 알고 있던 나는 부탁하나마나라고 만류했지만 남편은 일단 물어나보겠다고 하더군요. 결과는 뻔했습니다. 남의 강아지가 자기집 카페트를 밟는 게 싫답니다. 똥오줌을 완전히 가릴 줄 안다고 했어도 소용없었어요.

내 아버지가 준 돈으로 계획에도 없는 집을 샀을 때일입니다. 지갑 밑에 깔린 페니까지 탈탈 털어 다운페이먼트에 보탠 후라 냉장고를 살 돈이 없습니다. 때는 여름, 냉장고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캘리포니아입니다. 남편이 시어머니께 물었습니다. 집 산 기념으로 냉장고를 한 대 선물해 줄 수 있느냐. 시어머니의 대답은 '노'였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웬만한 사람같았으면 뭐 필요한 것 없냐고 미리 물어봤을 겁니다. 우리쪽에서 먼저 부탁을 했는데도 냉정하게 거절하더군요.

그렇게 남을 위해서는(자식이라도)단 한 푼의 적선이나 관용을 베풀지않고 평생을 살았던 시어머니였습니다. 친정아버지로부터 받은 몇 백만불의 유산을 은행 CD(Certificate of Deposit)묶어놓고 그 이자와 시아버지가 버는 돈으로 직장일 한 번 안 하고 호의호식하며 잘 살았습니다. 이자율이 점점 떨어져서 그 돈만으로는 쪼들리게 되자 아예 CD를 하나하나 헐어 쓰더군요. 세상을 떠날 때쯤에는 거의 남은 게 없을 정도였어요.

주위에서는 말합니다. 세상 떠날 때까지 국가와 자식에게 폐 끼치지 않고 도움 요청 없었던 것만 해도 어디냐고. 맞습니다. 노후대책 제대로 해놓지않고 늙어서 나라에, 자식에, 이웃에 기대는 사람들도 많은데 시어머니는 자기 노후 잘 책임지고 갔으니 양호한 축에 들지요. 그러나 더불어 사는 삶입니다. 이웃을 위해 한 푼 나누는 법 없이 나 혼자만 잘 먹고 잘 살면서 한낱 쓰레기에 지나지않는 물건들에만 온 에너지를 쏟아붓고 산 시어머니. 그 삶을 과연 의미있다고 말 할 수 있을까요. 그녀가 남기고 간 빈 의자를 보면서 삶의 의미에 대한 여러가지 상념으로 참 마음이 복잡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