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간 고향에서 콩 튀듯 팥 튀듯 바쁜 일정을 보내고 서울로 올라가면서 한 고향 남자 친구에게 요청했습니다. 기차역 플랫폼까지 마중 좀 나와 달라고. 지난 번 글에도 언급했지만 책, 홍삼, 젓갈 등이 든 가방이 보통 무거워야지요. 탈 땐 동생이 실어 주어서 문제가 없었는데 도착해서 이동할 일이 무척 난감했거든요. 더구나 지인한테 빌렸던 가방의 바퀴가 고장나서 혼자 힘으로는 어림도 없었어요.

친구는 흔쾌히 서울역에 나와 주었습니다. 친구의 도움으로 가방을 역사 밖까지 잘 들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택시도 잘 잡을 수 있었고.

호텔로 향하는데 길이 엄청 막힙니다. 출퇴근 시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처음엔 별 신경쓰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렸지요. 뒷 좌석에 앉은 친구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그런데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차가 조금도 움직일 생각을 안 합니다. 앞 뒤로 옆으로 차들로 둘러쌓여 꼼짝을 못 하는 겁니다. 요금 미터기는 쉴 새없이 올라가는데.

슬슬 조급해집니다. 차 창문을 열었다가 닫아 보고 고개 빼서 이리저리 살펴보지만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가 않습니다. 배는 고프고(아침은 거르고 점심은 친지들과 나가 먹었는데 내가 제일 싫어하는 추어탕을 일괄 주문하는 바람에 두어숟갈 뜨는둥 마는둥 해서)몸이 천근같이 피곤했거든요. 얼른 호텔로 가서 짐가방을 던져놓았으면 좋겠는데. 뭘 좀 먹었으면 좋겠는데. 뜨거운 물에 목욕하고 쉬었으면 좋겠는데.

아, 짜증나라. 왜 이렇게 차가 밀리노. 이래가지고 오늘 중으로 호텔에 도착할 수 있겠나, 하고 중얼거려 봤습니다만 기사아저씨나 뒷 좌석의 친구는 이런 일은 예사라는 듯 들은 척도 안 합니다.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혼자 붉으락푸르락하다가 기사아저씨한테 물었습니다. 차가 좀 덜 밀리는 길은 없습니까. 내 말에 기사아저씨가 그럼 다른 길로 한번 가 볼까요하고 얼른 핸들을 틀었는데 아뿔싸, 그 길도 밀리기는 마찬가지.

안절부절 조바심을 내던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일단 내려서 어디가 밥을 좀 먹자. 한 시간 정도 지나면 길이 많이 뚫릴 것 같은데. 친구가 대답했습니다. 이 크고 무거운 가방을 끌고 어딜 간단 말이고. 조금만 참아라...

거의 한 시간에 걸쳐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체크인을 마친 후 여느때처럼 인천공항행 버스 시간표를 한 장 부탁했더니 직원이 대답했습니다. 코로나때문에 공항 버스가 운행을 안 합니다. 운행을 안 하다니, 그러면 나같은 사람은 어쩌라고?! 큰일 났습니다. 다음날 인천공항까지 가야할 일이 태산같은 걱정으로 나를 짓누릅니다. 내가 망연자실해 어쩔 줄 몰라하자 친구가 옆에서 말합니다. 택시든 지하철이든 인천공항까지 가는 교통편은 많으니까 제발 진정 좀 해라...

무당친구 남편의 도움으로 공항에 잘 도착했습니다. 출국수속을 하려는데 가방에 든 마스크는 반출할 수가(지난 번 글에 썼지요)없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알려 줍니다. 나는 또 하늘이 무너진 듯 낙담했습니다. 손톱 한끝 들어갈 틈 없이 꽉꽉 채워진 짐이 두 개나 됩니다. 무당친구가 짐을 싸주는바람에 어느 짐에 마스크가 들어있는지도 모릅니다. 두 개 다 풀어 수색해야만 했습니다. 어느 세월에 그 짐을 다 풉니까. 너무 절망스러워 그 자리에 주저 앉고 싶었어요. 내가 이동봉사할 강아지를 데려온 두 여성이 이런 상황을 목도했습니다. 그녀들이 나를 달랩니다. 걱정 마세요. 저희가 짐 푸는 걸 도와드릴 테니까요.

미국에 도착한 며칠 후, 위에 쓴 고향 남자 친구가 전화했습니다. 일단 내가 무사히 집에 입성한 걸 확인한 후 그가 말합니다.
“너는 매사에 좀 침착해질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나는 하하 웃었습니다. 무안해서 말이지요.

작은동생의 차로 큰동생의 사업체가 있는 울산을 가던 중에 산과 논과 밭이 여기저기 흉하게 파헤쳐져 있는 걸 보게 됐습니다. 밀양에서 울산까지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중이랍니다. 그래서 산을 뚫어 굴을 만들고 논밭을 파헤쳐서 교량을 설치하고 있답니다. 고속도로가 완공되면 70킬로미터에서 45킬로미터로 거리가 줄면서 현재 차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시간이 27분 정도 빨라진대요.

발전과 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하루가 다르게 지형이 마구 바뀌는 고향땅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던 나는 분기탱천해서 외쳤습니다. 그까짓 삼십분 때문에 저렇게 자연을 마구 훼손해? 세 시간도 아닌 겨우 삼십분 단축이 뭐가 그리 중해서?하늘 보고 산 보고 나무도 좀 감상하면서 천천히 가면 되지!

작은동생이 말했습니다. 바쁘게 사업하는 사람한테는 시간이 돈인데 삼십분이 엄청난 플러스가 되지. 나는 지지않고 대꾸했지요. 바쁘게 사는 사람일수록 가끔은 느긋한 시간이 필요한 거야.

남한테는 그렇게 되지도 않은 잣대를 들이대면서 정작 나는 그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나야말로 좀 느긋했어야 했는데. 길 막힌다고 차에 같이 탄 사람들 불안하게 난리를 칠 게 아니었습니다. 언제 도착해도 도착할 건데 차창 밖으로 보이는 서울 풍경이나 감상하면 좋았을 걸. 배 고픈 건 조금만 참으면 되고 택시비가 나오면 얼마나 더 나오겠어요. 공항버스가 안 다니면 친구말대로 택시나 지하철을 이용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출국시간도 넉넉하게 남았는데 가방 열고 마스크를 꺼내면 될 일이었습니다. 지나놓고 보니 아주 대수롭지 않은 일들이었는데 왜 그렇게 크게 과민반응을 보였을까요.

한 지인의 말에서 해답을 찾았어요. 남들이 모르는 포인트를 잘 잡아내는 그녀가 말했습니다. “계숙 씨가 플래너(planner)쟎아. 하나부터 열까지 계획을 세워놓고 차근차근 움직여야 하는...”

맞았습니다, 그녀의 말이. 그녀 말대로 나는 매사에 계획을 세워놓고 철저하게 지키며 사는 사람입니다. 기상시간도, 비타민 복용시간도, 강아지 산책시간도, 운동시간도 정해놓은 시간을 반드시 수칙합니다. 하다못해 화장실 청소도, 침대시트 가는 일도 정해진 날짜에서 하루도 틀리면 안 됩니다. 지난 십 몇년 동안 매월 1일과 15일에 하루도 늦지 않게 여기 글을 업로드하는 것만 봐도 내가 얼마나 정확하고 빈틈없는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산책나가는 걸 보고 시각을 가늠했다는 독일의 철학자 칸트처럼. 그러나 세상일이 어디 그런가요. 가끔 변수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위에 쓴 일련의 예처럼 계획대로 진행이 안 되거나 변경 되는 상황이 닥칩니다. 그러면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수선을 피웁니다. 일이 해결될 때까지 안달복달을 합니다.

삼십년의 긴 세월을 함께 하고 있기에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아는 한 할배가 말합니다. “나다니는 것 싫어하고 혼자 조용히 책 보는 것 좋아하고 노래도 차분하고 낮은 음률을 선호하는 것 보면 아주 정적(靜的)인 성격인 것 같은데. 그 정적인 성격이 어떤 상황에서도 계속 유지가 되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새해에는 좀 고쳐볼까요. 나의 가장 큰 이 단점을. 할배 말대로 어떤 예기치 못한 일에서도 느긋하고 천천히, 그리고 침착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