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격리하는 동안 크게 힘든 건 없었어요. 정부에서 안 시켰더라도 스스로 격리했을 테니까. 무슨 말인고하니 미국에서도 그렇지만 한국가서도 나는 바깥에를 잘 안 나갑니다. 친구도 가급적이면 집으로 불러요. 한국방문 목적인 동생들, 친구들 보는 것 외엔 아무것도 안 합니다. 문 밖 나가는 게 싫어요. 외식도 친구나 동생들의 강권에 의해서 할 수 없이 응합니다. 그냥 집에서 대충먹었으면 좋겠는데. 이런 나였으니 아무도 없는 동생집에서, 햇빛 잘 들어오는 동생집에서 지내는 게 얼마나 행복했겠어요. 미국에서는 청소, 빨래, 요리, 하다 못해 강아지 산책이라도 시켜야했었는데 그런 부담감 없이 맘껏 신선놀음을 했습니다. 느긋하고 홀가분하고 편안하게.

아무도 없는 집안, 할 일이 없습니다. 올케가 교사고 동생이 글 쓰는 사람이라 책은 무궁무진하게 많았지만 책 보는 것도 하루이틀입니다. 작은 활자를 오래 들여다보니 눈도 아프고. 텔레비전을 켰습니다. 예전 한국 살 때도, 미국에서도 텔레비전에 일절 관심없었습니다만 무료하니까 나도 모르게 리모콘을 찾게 되더군요. 오래 떠나 있었던 한국을 텔레비전에 나온 사람들을 통해 관찰할 수 있는 기회다 싶은 생각도 들었고.

아닌게아니라 텔레비전 안에 현 한국인들의 실생활이 그대로 있더군요. 특히 음모와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연속극에서요. 내용이 궁금해서라기보다 출연자들의 차림새나 집안 인테리어를 들여다 보려고 잠깐잠깐씩 체널을 고정했었는데 현재를 배경으로 한 서너개의 연속극에서는 지금 한국에서 유행하는 말투, 옷차림, 화장법, 살림살이, 실내장식,음식 등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총망라해 보여주더군요.

홈쇼핑 방송도 참 재미있었습니다. 싸고 다양하고 신기하고 멋지고 새로운 물건들이 매일 쏟아져나오는데 나같이 귀 얇은 사람은 쇼핑중독에 걸리기 딱 알맞겠더라고요. 매일 매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서 구경했습니다.

내가 한국에 있을 때, 그러니까 80년대에 그야말로 날리던 가수들이나 연예인들의 변한 모습을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었습니다. ‘바람이려오’와 '잊혀진 계절'로 대한민국을 들었다 놓았던 가수 이용이 가요무대에 출연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의 젊은 날이 어느덧 퇴색했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자, 다음은 텔레비전을 보면서 느낀, 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감상입니다. 첫째로 한국은 말의 상하관계가 무너져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부부간은 물론이고 자식과 부모간에도 존댓말을 아예 쓰지 않습니다. 다 반말입니다. 가족들이 군대처럼 철저하게 규율 따지고 격식을 따르는 건 나도 반대합니다만 친구처럼 격의없고 허물없는 것도 정도 문제 아닐까요. ‘아빠, 밥 먹어' '엄마는 자고 있어’ 하던 아이가 사회에 나가서 말투를 고칠 수 있을까요. 말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그 사람의 인생이 된다고 하던데. 또한 이삼십대 여자들의 말투는 왜 하나같이 아기같이 혀 짧은 소리인지. 여성스럽다고, 애교스럽다고 생각해서 그러는지 모르지만 참 듣기 거북스러웠습니다.

둘째, 한국사람들은 남녀노소할 것 없이 외모에 어마어마하게 신경을 씁니다. 연예인이나 일반인이나 멋 부리는데 목숨을 건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거의 다 성형수술들을 한 것 같아요. 제일 많이 한 데가 쌍커풀과 코. 여기서 늘 보는 서양인들처럼 높은 코와 뎅그런 눈들을 하고 있습니다. 본인들은 수술이 잘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전혀 자연스럽지가 않습니다. 짙은 화장을 했는데도 의사의 힘을 빌린 표가 납니다. 머리 염색 또한 안 한 사람도 없어요. 대부분 갈색 계통, 그중 밝은 갈색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붉은색 염색도 꽤 있어요.

타고들 났는지 아니면 물이 좋은지 화장품이 좋은지 피부과에 돈들을 쓰는지 텔레비젼에 나온 한국 여성들, 하나같이 피부가 정말로 좋습니다. 모두들 광이 반짝반짝 납니다. 찹쌀떡같아요. 그들의 피부가 많이 부러웠습니다. 내 얼굴은 뜨거운 캘리포니아 태양으로 인해 온갖 잡티랑 기미 투성이거든요 . 부러웠던 게 또 있습니다. 사시사철 봉두난발인 나와 비교되는, 미용사들의 섬세한 손길을 거친 여성들의 최신식 머리 스타일입니다. 여기서는 어쩌다 결혼식장에서나 볼 수 있을까한 근사하고 멋진 스타일을 너도나도 흔하게 하고 있어요. 예약 잡아야 하고 팁 줘야 하고 머리 한 번 하려면 큰 맘 먹어야하는 미국과는 달리 아무때나 쉽고 저렴하게 머리 손질을 받을 수 있어서겠지요.

여성들의 차림새 또한 화려하고 현란합니다. 여기서라면 파티에도 좀 망설여질 듯한 크고 긴 샹들리에 귀걸이, 목걸이들을 멋들어지게 착용한 여성들이 많고요. 의상의 색도 디자인도 굉장히 과감합니다. 너풀너풀 디테일이 복잡하게 들어간, 그리고 번쩍번쩍 울긋불긋 밝은 총천연색 옷들을 전혀 어색하지 않게 차려 입었어요. 뭐랄까, 파티복을 넘어 광대같은 옷. 하다못해 시골에 사는 어르신들의 옷도 그렇습니다. 방금 밭 매다가 논 매다가 나온 여성들의 옷들에도 레이스랑 리본들이 여기저기 달렸고 열댓가지 색이 화려하게 어우러져 있습니다. 남자도 예외일 수 없네요. 빨강, 파랑, 분홍, 진분홍, 보라, 노랑. 미국에서라면 꿈도 못 꿀 원색의 의상들. 첨엔 남자가 그런 요란스런 색의 옷을 입은 걸 보는 게 어색하더니 나중엔 검은색, 흰색 아니면 회색이 전부인 미국남자들의 의상이 참 단조롭고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국사람들의 화려하고 선명한 색 사랑은 인테리어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희거나 검거나 실버가 전부인 미국. 반면 한국 가전제품의 색들은 얼마나 다양한지요. 텔레비젼속의 한국 부엌은 색깔의 향연입니다. 동생집의 가전제품 색만해도 대여섯가지에 달해요. 밥통은 빨간색, 전자렌지는 하늘색, 정수기는 파란색, 냉장고는 회색, 전기주전자는 노랑색. 식탁위에 놓인 크리넥스박스에까지 알록달록 꽃이 수놓아진 커버를 씌워놓았습니다.

셋째,사람들의 다채로운 차림새와는 달리 프로그램은 굉장히 단조로웠습니다. 거의 비슷해요. 개그맨과 연예인들이 떼거지로 나와서 서로의 일상을 화제로 하하호호 잡담하는 프로그램들이 (모든 프로그램 출연자들의 동작 하나, 말 한마디도 자막으로 나오는 것도 참 생경스러웠던 부분)주류를 이루고 있었고요. 아울러 먹는 방송 뿐입니다. '만남의 광장' '골목집밥' '집밥 백선생' 등 백종원이 등장하는 서너개의 프로그램은 물론 '밥 블레스 유' '프리한19' '맛있는 녀석들' '외식하는 날' '식신로드' '만만한 홈밥' '산지직방' '해장로드' '주유천하' '한국인의 밥상' '백반기행' '맛있을지도' 등 먹는 것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이 셀 수도 없어요. '6시 내고향' 등 각 지방의 경치와 풍습과 각종 특산물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에도, '나는 자연인이다' 등 먹는 게 주가 아닌 코너에도 밥 먹는 장면은 어김없이 등장했습니다. 인간의 삶에 있어 식(食)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좀 심하다 싶었습니다.

심하다 싶은 게 또 있었습니다. 현재 '뜨고 있는' 연예인들의 중복출연이었습니다. '미운 우리 새끼'에 나온 제시는 '환불 원정대'에도 나왔고 '나 혼자 산다'라는 프로그램에서 얼굴을 보인 박나래라는 개그우먼과 신동엽은 '놀라운 토요일'에도 똑같은 웃음과 똑같은 말투와 똑같은 몸짓과 똑같은 진행방식으로 시청자들을 만나고 있었어요. 장도연이라는 개그우먼 역시 채널을 바꿀 때마다 보였습니다. 특히 서장훈, 전현무, 유재석 등 몇몇은 얼굴이 안 보이는 데가 없었습니다. 송가인이라는 가수도 여기저기 자주 얼굴을 보였습니다. 많이 식상했고 지겨웠습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자는 심산인 것 같은데 매일 같은 얼굴을 봐야하는 시청자 생각은 안 하는지.

노래를 주제로 한 프로그램도 어마어마하게 많았습니다. '미스터트롯' '실버스타' '아이돌 맘' '트롯신이 떴다' '히든싱어' 등 거의 비슷비슷한 경연대회. 또한 '비긴어게인3' '버스킹' '성인가요' '가요중심' '신나는 노래자랑' '가요 TV' '노래가 좋아' 등도 노래를 중심으로 한 프로그램입니다.

내가 빼지않고 본 프로그램은 '다문화 고부열전'이었습니다. 한국으로 시집온 외국여성들의 삶을 보여주는. 고군분투하던 나의 초기 이민생활에 감정이입이 되었기에 눈물을 흘리면서 보았습니다. 대부분 착한 시부모와 남편들의 사랑속에서 잘 적응해 살고 있었지만 그 중에는 후진국에서 왔다고 구박당하고 무시당하며 사는 여성도 더러 있었습니다. 참 안타깝고 슬픈 일이지요.

어쨌거나 한국사람들은 매일매일 재밌게 신나게 즐겁게 열정적으로 사는 것 같았습니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놀면서. 그들을 보면서 자연히 미국생활이 떠올랐습니다. 멸치 볶다가 간장이 떨어지면 몇 십분 운전해 나가야 하는 미국, 하루종일 밖에 의자놓고 앉아 있어봐도 사람 그림자 하나 구경 못하는 미국, 자랑할 거라고는 맑은 공기 하나밖에 없는 미국이. 한국사람들과 비교해 우리 동포들은 참 무미건조하고 삭막한 삶을 산다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우울하고 서글펐습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도 잠시, 미국에 돌아오니 얼마나 마음이 편안하던지요. 재미없거나 말았거나 그래도 내 살 곳은 미국, 미국 뿐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 사진은 '미스터트롯의 맛' 텔레비전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