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대대적인 앞뜰 뒷뜰 공사를 했습니다. 잔디를 걷어내고 나무를 베어낸 공사. 그리고 그 자리에 키작은 화초들을 심고는 전체에 자갈을 까는 공사. 이곳 캘리포니아가 가면 갈수록 가물어지는 것 같아서(올해도 비다운 비가 거의 안 왔어요)물을 좀 아껴보려고요. 매일 두 번씩 잔디에 주는 물을 볼 때마다 마음이 쓰려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또한 집 입구를 계단으로 만들었는데 시멘트와 자갈만으로 온통 칠갑을 해놓으니 너무 삭막하고 메말라보이는 것같아 한쪽에 작은 분수를 설치했어요. 분수에 물이 좀 들긴하지만 매일 아침저녁으로 틀어대는 스프링클러만 하겠습니까.

내가 일하는 방 창문으로 앞뜰 전체가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근무 중 틈틈이 내다봅니다. 지난날, 푸른 잔디와 나무가 눈을 시원하게 했었지만 공사를 마친 후에는 분수에서 솟구치는 물줄기와 깨끗한 자갈과 작은 꽃들이 기분을 참 좋게 합니다. 일년 넘게 방에 갇혀 일하면서 건조해지고 황폐해진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남편입니다. 남편이 강아지들을 (작년 12월 한국에서 유기견 한 마리를 더 입양해서 도합 세 마리)앞뜰로 데리고 나가 배변을 시킬 때. 동네사람들이 지나가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공사 끝난 앞뜰을 언급하며 칭찬할 때요. 미국사람들이 다 그렇듯 그들의 칭찬이라는 게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게 대부분입니다. 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인 바람처럼 가벼운 그런 거지요. 몇 마디 한 후 바이바이 손 흔들고 가버리면 끝인 거예요. 그런데 남편은요. 이 사람들을 안 놔줍니다. 물고 늘어집니다. 한번 대화의 물꼬가 터졌다하면 온갖 시시콜콜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디테일한 얘기까지 한도 끝도 없이 늘어 놔요. 그래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아요.

바로 며칠전에도 그랬습니다. 내 브레이크타임에 남편과 함께 강아지들을 데리고 앞뜰로 나갔습니다. 마침 동네길을 산책하던 세 여성이 우리집 앞뜰을 구경하려고 발걸음을 멈추고 있었어요. 그녀들은 집에서 뛰어나간 강아지들을 보더니 탄성을 올립니다. 이렇게 귀여운 강아지들을 어디서 데려왔냐면서. 누가 들어도 그냥 인사치레로 한 번 해보는 소리일 겁니다. 그러나 남편은 기회는 이때다 싶었는지 입양결심을 하게 된 계기부터 운을 떼더니 입양절차는 어땠으며 미국까지 어떤 방법으로 데려왔으며 배변교육은 또 어떻게 했는지 숨도 안 쉬고 좔좔좔 읊어댑니다. 그 모습을 보는 나는 조바심이 나기 시작합니다. 요즘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말처럼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 됩니다.

나 혼자 얼른 집으로 들어 왔지요. 몇십분 있다가 창밖을 내다보니 맙소사! 아직도 남편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세 여성을 앞에 세워두고 팔다리까지 요란하게 흔들어가며 열변을 토하고 있어요. 아니, 그 세 여성들은 무슨 죄랍니까. 얼마나 곤욕스러울까요. 별로 친하지도 않은 남자의, 별로 흥미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를 장시간 듣고 있어야 하는 여성들은 말이예요.

하도 기가 차서 남편의 그런 모습을 사진 찍어서 몇몇 지인들에게 보냈습니다. 한 지인이 답합니다. 은퇴한 자유로움을 (이달 초 남편이 은퇴했습니다. 일만 하다가 인생 끝날 것 같다면서 예정보다 2년 앞당겨서)만끽하는 것 같아 보기 좋은데 뭐. 다른 지인이 시니컬하게 한 마디 합니다. 늙어서 그래. 아니, 늙은 거랑 말 많아지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뜨악해하는데 지인이 다시 한 마디 보탭니다. 남자들이 늙으면 말도 많아지고 주책스러워져. 여성 호르몬의 영향이라나봐...

그러고보니 이 남자가 많이 변한 것 같네요. 사복형사같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날카롭고 차가운 생김새처럼 감정기복이 거의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어떤 일에도 당황하는 법 없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던 냉철한 남자였습니다. 그에게서 가장 큰 매력을 느꼈던 부분이 바로 그 진중함과 과묵함이었어요.

그랬던 남편인데 웬걸, 언제부터인지 수다가 말도 못하게 늘었습니다. 말 못하다가 죽은 귀신이 붙은 것 같습니다. 며칠전 이웃의 저녁초대를 받았을 때도 그랬습니다. 자녀없이 강아지들을 키운다는 이유로 최근에 친해진 이웃입니다. 맛있는 음식과 질좋은 와인이 어우러진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나는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상대방이 말할 기회도 없이 혼자 떠들어대는 남편때문이었습니다. 대화란 서로 주고받는 것이라는 지극히 기본적인 상식을 무시하고 거의 두 시간 가까이를 혼자 떠들어대는 남편. 만면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고개를 끄덕이며 남편의 말을 경청하는 부부였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욕 했을까요. 보다못한 내가 중간중간에 끼어들어 그 부부에게 말할 기회를 주었지만 금방 대화의 주도권은 남편이 빼앗아갑니다. 

수다만 는 게 아닙니다. 별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혼을 뺄 정도로 수선을 피웁니다. 그저께 아침, 남편이 오랜만에 스스로 커피를 내리다가 유리팟을 깼습니다. 세상이 끝난 듯 ‘오 마이 갓’을 찾으며 한참동안 법석을 떠는 남편. 예전에 내가 알던 사람이 맞나 싶어서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더랬습니다. 뭐가 눈에 안 보이면 찬찬히 찾아볼 생각은 안 하고 나한테 큰일났다고 보고부터 합니다. 차 키를 잃어버렸다고. 안경을 잃어버렸다고.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잊어버렸다던 물건들이 엉뚱한 장소에 얌전히 있는 걸 몇번 목격할 때마다 내가 당부했습니다. 일단 먼저 찾아보고 설레발을 쳐도 늦지 않다. 제발 좀 먼저 찾아 보고.

아는 사람은 알지만 나야말로 말 많고 호들갑스럽고 수선스럽고 목소리가 엄청 큰 사람이었더랬습니다. 나와 직접적인 연관있는 사람들은 물론, 온세상사람들의 일을 참견하고 분석하고 결론 짓느라 늘 입이 바빴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바뀌더군요. 지난 번 글에도 썼지만 모든면에 관심과 흥미가 현저하게 줄어들었습니다. 반면 남의 사정을 이해하고 관조하는 여유와 너그러움도 생겼고요. 그들만의 사는 방법이겠지. 무슨 이유가 있었을 거야. 오죽하면 그랬을까... 그렇게 되니 예전처럼 침 튀기며 설전할 일도 바득바득 우길 일도 기를 쓰며 설명할 일도 점점 없어져요. 말 수가 줄어듭니다. 꼭 말 해야 할 일이 생겨도 그냥 넘어가게 됩니다. 성가시고 귀찮아서요. 기력이 딸려서요. 그런데 왜 남편은 오히려 반대가 될까요.

꼿꼿하던 허리와 등도 구부정해지고 아마존 밀림같은 머리카락도 성글어지고 한때는 영화배우 ‘리처드 기어’같이 잘 생겼던 얼굴은 주름으로 뒤덮이며 볼품없어지는데 입만은 더 왕성해지는 것 같은 남편. 이 일을 어찌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