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주정부 산하의 한 대학병원에서 일했습니다. 컴퓨터시스템을 총괄했었지요. 지난 해 3월, 재택근무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어요. 그가 맡은 책무가 얼마 만큼의 무게인지를. 옆에서 보니 잠시도 쉬지 못합니다. 법으로 정해진 휴식시간도 식사시간도 없어요. 매일 열 서너시간씩 일 하는 것 같아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한 달에 한 번은 새벽 두 시를 기해(컴퓨터 트래픽이 가장 적은 시간이 새벽 두시랍니다)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합니다. 한 달에 한번은 또 ‘on call’로 24시간 대기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온콜이 아니더라도 늘 스탠바이 상태입니다. 스물 네 시간 쉴 새 없이 돌아가야 하는 병원 특성상, 그리고 사람 생명을 다루는 시스템상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남편의 최종 목표는 20년을 채우는 것이었습니만 2년을 앞당겨 지난 달 8일 은퇴했습니다. 도저히 더 이상은, 죽어도 더 이상은 못하겠답니다. 막중한 책임에 따른 중압감때문에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고 합니다. 20년을 채워야만 제대로 된 액수의 은퇴연금과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는데 그렇게까지 힘들다는데 어떡합니까. 만류할 수가 없더군요. 

은퇴날짜를 정하고 남편이 한 일은 후임자에게 본격적인 트레이닝을 시키는 일이었습니다. 트레이닝 시키는 데만 삼 개월이 걸리더군요. 마지막 날, 후임자에게 작별인사를 하면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해라. 나는 항상 여기서 너희들을 서포트할 것이다하는 말을 전하는 걸 들었습니다. 말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 실제로 실행을 했어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화와 이메일로 오는 도움 요청에 단 한번도 짜증을 내지않고 성실하고 친절하게 응해주더군요. 내가 말렸습니다. 일단 손을 뗀 이상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놔두어 버리지 뭐 그리 애가 타서 난리냐고요. 속으로는 “남편이 그동안 얼마나 책임감을 가지고 빈틈없이, 열심히 일했는지 이제는 알 거다. 남편없이 골탕들을 좀 먹어봐라”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내 말에 남편이 정색을 합니다. 후임자가 고생하는 걸 원치 않는대요. 비록 몸은 떠났다해도 그 곳이 아무 문제없이 성공적으로 굴러가게하는 것도 자기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직장에서 하는 일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가 반송우편물에 관한 것입니다. 주소불명으로, 혹은 우체국이나 집배원의 실수로 반송되어 온 우편물의 회원에게 전화를 걸어 주소를 확인하고 업데이트를 하는 일. 십년 넘게 혼자서 그 일을 다 했는데 어느 날 슈퍼바이저가 앞으로는 동료 몇 명에게 트레이닝을 시켜서 같이 하랍니다. 반송우편물이 점점 더 많아져 혼자 처리하기에는 무리라면서.

컴퓨터로하는 일이 다 그렇습니다. 일단 프로그램 사용법을 익히고나면 아주 쉽지만 그 전에는 누구든지 조금은 헤매기 마련입니다. 또 일머리가 없는 사람도 있어요. 아무리 세세하게 설명을 해주고 시범을 보여도 제대로 따라하지를 못하는 사람말입니다. 그 일머리 없는 몇몇으로 인해 내가 빛나는 것같은 생각에 참 신났더랬습니다. 나 혼자서 그 어렵고 힘든 일을 얼마나 잘 처리했는지 슈퍼바이저에게 알릴 기회였으니까요. 슈퍼바이저도 내 공을 인정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어깨에 힘을 빡 주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둔한 사람만 있는 게 아닙니다. 대학 졸업후 막 입사했다는 한 흑인 여자애는 총명하고 명석해 보이는 눈빛 값을 합니다. 하나를 가르치니 벌써 둘을 알아채는 것입니다. 보통은 서너시간을 붙잡고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서 가르쳐야했는데 이 아이는 딱 한 번 설명을 듣고 보더니 벌써 내 도움이 필요없다고 합니다. 곧 그 아이는 십년 넘게 한 나보다 더 많은 일을 정확히, 그리고 빠르게 처리하더군요. 음, 그래서 그 아이가 기특했냐고요. 아니요. 심술나서 배가 아팠습니다. 못 했어야 내 잘 한게 부각이 될 것 아닙니까. 내가 나쁜 사람일까요. 후임자가 나보다 좀 모자라고 서툴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인간의 본성이 아닐런지요.


후임자들이 고생하는 걸 원치 않으며 비록 몸은 떠났다해도 그 곳이 아무 문제없이 굴러가게하는 것도 자기의 역할이라는 남편의 대답을 들으면서 참 멋진 남자구나, 탄복했습니다. 정말로 남편은 멋진 남자입니다. 내가 존경할 수 있는 남자지요. 아는 사람은 알지만 내 성격은 굉장히 세고 강해요. 웬만한 남자는 발밑으로 봅니다. 이겨 먹고 찜쪄 먹지요. 그렇지만 남편한테는 절대로 못 그럽니다. 순한 양이 됩니다. 단 한번도 나를 실망시키는 짓을, 업신여길만한 짓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심한 짓을, 타박할 짓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매우 정직한 사람입니다. 글에 수차 쓴대로 남편의 취미는 금캐기인데 헛탕치기 일쑤이지만 가끔은 손톱만큼씩 수확해 올 때도 있습니다. 그걸 1년정도 모았다가 팝니다. 적지 않은 돈입니다. 이 돈을 남편은 수입으로 잡아 매년 정확히 세금보고를 합니다. 깊은 산속,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없는 곳에서 혼자 캔 금,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남편은 세금보고를 꼬박꼬박하는 것입니다. 단 한푼도 속이지 않고.

정직할 뿐만 아니라 남을 함부로 비난하거나 멸시하거나 힐난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자초지종을 알아보지도 않고, 겉모습만 보고 섣부르고 쉽게 결정내리고 판단하는 경향이 다분한 나는 남편의 이런 점을 높이 삽니다. 며칠전, 남편과 차에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옆을 흘낏 보니 굴러가는 게 참 용하다 싶은 다떨어진 고물밴에 사람이 한 가득입니다. 앞에는 부부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타고 뒷자석에는 아이들이 자그마치 다섯입니다. 차에 에어컨이 없는지 창문을 다 내렸는데도 아이들 얼굴에 땀이 범벅입니다. 내가 남편을 향해 말했지요. 곤궁한 살림에 뭐하러 아이들은 저렇게 한 광주리 낳아서 고생들을 시킬까. 하여튼 책임지지도 못 할 것들이 덮어놓고 아이들은 많이 낳아요. 남편이 나를 나무랍니다. 저 아이들이 다 부부의 아이들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베이비시터를 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고 옆집 아이들을 어디 데려가는 중일 수도 있고 조카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이웃의 한 잘생긴 남자의 아내가 예상외로 인물이 별로입니다. 내가 남편에게 동감을 구하며 말했습니다. 저 남자는 왜 저런 못생긴 여자랑 결혼했을까. 남편이 대답합니다. 남자한테는 예쁜 여자일 거야. 

내 말이라면 무조건 신임하지만 위에 쓴대로 남을 비방하거나 헐뜯는 말에는 동조 안 하는 남편입니다. 정 대답을 해야만 할 경우에는 ‘노코멘트’ 로 일관하지요. 첨에는 좀 섭섭했었는데 지금은 그의 인격을 존경합니다. 나랑 덩달아 입 맞추었으면 과연 지금같이 남편을 존경할 수 있었을까요.

이 글을 읽는 독자님들 중 혹시 혼기에 찬 딸을 둔 분이 계십니까. 딸이 어떤 배우자를 만나기를 원하나요. 그래서 어떤 조언을 하십니까. 성품이 멋진 남자, 그래서 늘 존경할 수 있는 남자를 만나라고 해 주십시오. 잘생긴 외모는 세월따라 변할 수 있고 명예와 좋은 직업, 높은 직책도 한 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고 돈 역시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지만 사람이 가진 좋은 품성은 평생 가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