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몇년전, 막내동생이 방문했더랬습니다. 물론 내 친구들을 다 만났지요. 몇몇 친구들은 문 밖 나서는 걸 싫어하는 나를 대신해 동생 관광을 시켰주었고요. 다함께 몇 번 밥도 먹었습니다. 보름간의 일정을 마치고 출국하던 날 동생이 말했습니다.

“친구들이 다 친절하고 선한 사람들이네요. 가족같이 잘 어울려 지내는 걸 보니 내 마음이 참 좋긴한데 한가지 걱정이 있어요. 누나 주위를 포진한 사람들이 다 할배,할매들 뿐이라는 것. 누나 또래나 나이 어린 사람을 좀 사귀어 보소. 같이 늙어갈 수 있는 나이의 사람들을…”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귓등으로 흘려들었습니다. 당시, 나는 내 인간관계에 매우 만족하고 있었거든요. 동생 말대로 내 주위사람들이 모두 할매, 할배들 뿐이긴했지만 참 편했어요.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세상의 이치를 파악한 나이들의 사람들이라서 이해심이 많습니다. 내가 뭘 잘못해도 웬만해서는 물 흐르듯 넘어가 줍니다. 그러했기에 스무살 가까이 어린 내가 활개치고 '여왕벌' 노릇을 했는지도 모르지만.

세월이 흐르니 동생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내 친구들이 세월의 순리에 따라 허리굽고 귀 멀고 눈머는 노인들이 되어가는 겁니다. 나무처럼 푸르던, 하늘만큼 기개높던 사람들이. 내가 밥 산다, 술 산다하면 만사를 제치고 뛰어나오던 사람들이 자리보전하는 신세들이 되어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다가 하나 둘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나는 점점 외돌톨이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제서야 동생의 말이 뼈저리게 와 닿았습니다. 어린 친구들을 사귀어 놓을 걸, 내 또래 친구들을 사귀어 놓을 걸. 밖으로 눈을 돌려봅니다. 혹시 새 친구를 찾을 수 있을까하는 기대를 가지고. 그러나 이민사회 특성상 참 쉽지 않습니다. 교회를 나가지 않는 이상. 특별한 사회활동을 하지 않는 이상요.

사실은 내 주위에 나이든 사람들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나보다 스물 몇살이나 어린 친구가 하나 있긴 있었어요. J였습니다. 그렇게 어린 아이가 왜 나랑 친구가 되었냐고요? 조건이 전혀 맞지않는 한 남자와 사랑에 빠져 부모의 극심한 반대를 피해 이 지역으로 도피해왔다가 나를 만난 것이었어요.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하나 낯설고 물선 곳에서 무척 외로웠던 J는 나를 참 잘 따랐습니다. 내 딸 역할을 톡톡히 했었지요. 당시 나는 같잖은 고집으로 셀폰이 없을 때였는데 나에 대한 모든 연락이 J에게 갈 정도였어요. 운전도 잘했기에 어디든 나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J는 생각이나 행동이 무척 성숙했기에 한 번도 세대차이를 느껴보지 못했어요. 또한 유머감각도 뛰어나고 눈치도 빠르고 언변도 뛰어났었기에 같이하는 시간은 늘 즐거웠고 유쾌했습니다. J는 변죽좋게 내 할매할배 친구들하고도 잘 어울렸습니다. 우리 모임의 잔심부름을 도맡아 했어요. 나 또한 있는 정성 없는 정성 다 기울여 J를 챙겼지요. 어느날 J가 그러더군요. 세상에 태어나 가장 잘한 일 몇 가지 중 나를 만난 일을 하나로 꼽는다고. 그런데 그 관계가 끝까지 가지 못했습니다. 중간에서 누가 훼방을 놓은 겁니다. 내가 글에 가끔 언급하던 한 여자, 늘 나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한 여자가 J와 나 사이를 끼어든 겁니다. 그러니까 중간에서 이간질을 한 겁니다.

아무리 나이보다 성숙했다고 하나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였습니다. J는 그 못된 여자의 이간질에 넘어가서 혼자 섭섭하고 혼자 삐친 겁니다. 몇년동안 가까이서 지켜봤으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을 텐데. 그렇게 마음 상할 일이었다면 내게 직접 확인해봤으면 좋았을 텐데.

나도 잘 한 건 없습니다. J와의 사이가 데면데면할 때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어야 했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나는 나대로 J가 괘씸했거든요. 나보다 남을 더 믿고 나를 오해했다는 사실이. 그러다가 J가 다른 직장으로 이직하면서 이사를 갔습니다. 그 후 연락이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어요. 그때만해도 나는 몰랐습니다.  J가 내 인생에 얼마나 특별한 사람이었는지를. 내 주위에 항상 사람들이 넘쳐나서 어떤 땐 귀찮을 정도라 사람 귀한 줄을 몰랐던 겁니다. J같은 아이를 두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던 겁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내 주위사람들이 하나둘 스러지는 걸 눈으로 보면서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책하고 후회하게 되었습니다.

5년 전, 고모가 내 손금을 봐 주면서 말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네 팔자에 자식은 없구나. 자식이 없는대신 네 옆에 사람들이 엄청 많네. 평생 외롭지는 않겠다. 근데 참 이상타. 자식이 없는데 자식선에 뭐가 하나 희미하게 보이네. 이게 도대체 무슨 선인지 모르겠네…”

내가 후회로 가슴을 치면서 말했습니다. 자식 노릇을 하던 한 아이가 몇 년 옆에 있었었다고. 그런데 사소한 일로 인연이 끝났다고. 내 말에 고모가 다시 내 손바닥을 자세하게 들여다 보더니 말했습니다.

“걱정마라. 몇 년 안에 그런 아이가 또 하나 나온다."

처음, 나는 고모의 말을 반신반의했습니다. 교회도 안 나가고 특별한 사회활동도 안 하고 취미생활도 안 하고 여럿이 함께 하는 골프같은 운동도 안 하고 늘 집에만 틀어박혀 사는 내가 무슨 수로 나이 어린 친구를 만나겠어요. 설사 그런 나이어린 친구를 만난다해도 제 또래랑 놀기 바쁘지 중늙은이인 나랑 친구를 먹으려 하겠습니까. J는 아무도 아는 이 없는 이 동네로 도피해 왔다는 특별한 상황에 놓인 아이였기에 가능했었지만 또 다시 그런 사연을 가진 아이가 나타나겠습니까?!

그렇지만 내심 반갑긴했습니다. 자식같은 아이가 또 생긴다는 고모의 예견이. 우리가 큰 돈 잃은 것도 단번에 맞추어낼 정도로 고모의 손금보는 능력은 탁월했습니다. 그래서 고모를 믿어보고저하는 마음이 컸습니다.

세월이 몇 년 흘렀습니다. 그동안 나이어린 친구들을 몇몇 만나기는 했어요. 내 독자님들이요. 내 글을 읽고 나를 만나고 싶다고 찾아온. 그 중에는 가까운 곳게 살기에 자주 만나는 독자도 두어명 있습니다. 나는 그 친구들을 유심히 관찰했지요. 혹시 고모가 말했던 사람인가 싶어서.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우선 나이가 안 맞았고 생활환경도 안 맞았습니다. 나는 포기했습니다. 그럼 그렇지. 이 나이에 내가 무슨 복으로 다시 어린 친구를 사귈 수 있겠노. 가당치도 않지.

작년에 고모를 다시 만났을 때 나는 지나가는 말처럼 그 얘기를 꺼냈습니다. 고모가 예견해 준 게 벌써 몇 년전인데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다고. 고모가 뭘 잘 못 본 것 같다고. 내 말에 고모가 전등불을 켜더니 내 손을 자기쪽으로 끌어 당기더군요. 그리고 전등불빛 밑에서 내 손바닥을 잠깐 들여다 보더니 하는 말.

“기다려 봐라. 꼭 하나가 나온다. 지난번에 네가 잃어버렸다는 그 아이와 비슷한 조건을 갖춘 딸내미가 하나 오고 있다…”

오고 있다고 했습니다, 고모는. 내 딸 노릇을 할 아이가 오고 있다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고모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그럼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 볼까요…

세상에, 만상에! 고모의 예견이 맞아 떨어졌습니다. 두 달전, 고모가 언급한 그런 친구가 나타난 겁니다. S라는 아이입니다. 바로 우리 동네에 살고 있었어요. 이사 온지 1년 가까이 되었다는데 내가 워낙 밖을 잘 안다니고 집에만 있으니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겁니다. S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어요. 누가 일부러 맞추어 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나랑 조건이 딱 들어맞는 겁니다. J와 나이가 같아요. 그리고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삽니다. J처럼 남편과 아이 없이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고 있어요. 또한 내가 친구를 사귈 때 첫째 조건으로 꼽는 '대화가 통하는’ 아이입니다. 말도 잘하고 잘 알아듣습니다. J처럼 유머감각도 뛰어납니다. 놀랄 일이 또 있어요. 한국에 사는 S의 엄마가 나랑 동갑이라는 사실!

고모의 손금보는 신통력에 감탄을 거듭합니다. 아무래도 우리 고모는 길을 잘 못 든 것 같아요. 교회를 가지말고 손금전문가로 나가면 대성할 것 같은데. 그런데 지금은 나이가 너무 많아서.


- 다음 회에는 ‘운명’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S와의 만남에 대해서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