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을 아주 사랑하는 한 싱글남자가 있었습니다. 직업은 컴퓨터계통이었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동물 Rescue 단체에서 봉사활동을 했어요. 어느날 이 남자가 작고 어린 치와와계통의 강아지 한 마리를 구조합니다. 길거리를 떠돈지 오래되어 야위고 병든. 원래대로라면 보호소에 보내 새주인을 찾든지 해야 하지만 남자는 자기가 돌보기로 결심을 합니다. 일단 집으로 데려가서 보살펴 기운을 차리게한 후 새주인을 찾아주려는 계획을 세운 거지요.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방 하나짜리 아파트에는 벌써 두 마리의 개가 있었던 거예요. 아파트 규정 상 두 마리 이상은 못키우게 되어있었던 겁니다. 할 수 없이 이 남자는 자기 친구에게 이 가엾은 강아지를 맡깁니다. 기운을 차릴 때까지만이라도 좀 두게 해달라고. 사실 친구는 개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남자가 얼마나 동물들을 사랑하는 사람인지를 잘 알기에 그냥 허용하기로 합니다. 남자는 퇴근 후에 매일 들러 지극정성으로 강아지를 돌봤고 그의 따뜻한 손길에 의해서 점점 살도 찌고 귀여운 모습으로 변신합니다.
몇 달이 흘렀습니다. 자, 이제 강아지를 보호소로 보내야 합니다. 주위에 강아지를 입양할 사람을 찾았지만 여의치 않았던 거예요. 천상 보호소로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 남자는 차마 강아지를 보낼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강아지를 좋아하지도 않는 친구집에 마냥 둘 수 없는 일입니다. 빠른 시일 내에 결정을 내려야했지만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그때, 한 친구부부가 그 집을 방문합니다. 바로 지난 번 글에 쓴 S입니다. 아이를 갖는 건 아직 시기상조라 둘이 큰 이층집에서 지내기는 적적하게 느낀 이들은 강아지입양을 고려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유기견센타에도 몇 번 가봤지만 크고 늙고 사나운 개들만 잔뜩 남아있어 실망을 거듭하고 있던 중이었던 S부부였습니다. 그들은 첫눈에 남자가 보살피던 강아지에 반하고 강아지 역시 금방 S부부를 잘 따릅니다. 남자는 기쁜 마음으로 강아지를 내줍니다. S부부라면 안심하고 강아지를 맡길 수 있었거든요. 잘 지내는지 근황을 알 수도 있고 가끔 볼 수도 있고.
S 부부는 '코나’ 라는 이름을 지어주고(하와이에서 생산되는 코나커피콩처럼 단단하고 야무지게 생겼다고)금지옥엽으로 강아지를 기릅니다. 이 지역으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친구가 없었던 S부부에게 코나는 큰 위안이고 즐거움이었어요. 어느 금요일 저녁, 자택근무를 마친 S는 저녁을 먹은 후 코나를 데리고 집을 나섰습니다. 집과 바로 옆에 위치한 공원에서는 매주 금요일이면 열리는 음악회가 한창이었습니다. 음악 소리가 들려와서 그냥 집에 있을 수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글에 누차 쓴대로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무리 날씨가 궂어도 하루에 두 세번은 반드시 걸어요. 아침 저녁 30분 정도는 강아지들과 함께. 점심시간 1시간은 나 혼자. 그리고 주말아침이면 지인들과 함께. 걷는 코스는 언제나 똑같습니다. 강아지들과는 동네길을, 지인들과는 좀 멀리 떨어진 산책로. 김유신의 말처럼 이 정해진 산책코스를 벗어나 본적이 없습니다. 차로 조금만 나가면 강물이 흐르는, 풍치가 기가 막힌 산책로가 있으니 원정 가자고 주위에서 꼬셨지만 걷기 위해 차를 타고 나가는 일은 아주 성가시고 귀찮았기에.
어느 금요일밤입니다. 그날도 나는 저녁을 먹은 후 룰루와 함께 산책을 나섰습니다. 위에 쓴대로 동네길이지요. 한 골목을 도는데 앞쪽에서 건장한 청소년 세 명이 내 쪽으로 등을 보이고 걸어가는 게 보입니다. 나는 별 생각없이 그 학생들을 따라갔습니다. 그러니까 늘 걷는 코스를 조금 벗어났는데요. 그 청소년들은 큰길로 나가는 것 같더니 신호등을 건넙니다. 참 이상하지요, 나는 그 학생들을 놓칠 새라 얼른 뒤쫒아갔습니다. 생전 안 건너던 찻길입니다. 길을 건너자마자 쿵짝쿵짝 들리는 음악 소리.
나는 그때야 알았습니다. 시에서 주민들을 위해 봄부터 가을까지 매주 금요일 저녁, 공원에서 개최하는 음악회에서 들리는 소리인 것을. 음악회를 안내하는 팜플렛을 받았지만 나는 무시했습니다. 이 동네에 20년을 넘게 살았지만 한 번도 참석해 본 적 없습니다. 그런 류의 음악을 좋아하지 않기에. 남편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그런데 그날 나는 공원에 갔습니다. 뭐에 홀린 듯, 세 청소년을 따라서.
공원에는 사람들로 만원이었습니다. 주인을 따라나온 개들도 여기저기 보였고 핫도그랑 나쵸랑 슬러쉬를 파는 간이 음식점 앞에는 긴 줄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고 사람들은 잔디밭에 삼삼오오 눕거나 앉아서 한여름 밤의 축제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나는 룰루와 함께 서서 잠시 음악을 듣다가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위에도 말했듯이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아니어서요.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낫다 싶었습니다. 돌아 갈 때는 오던 길이 아닌 반대방향으로 갈 생각이었어요. 공원 옆 주택가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해는 지고 어둠이 조금씩 깔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쿵짝거리는 음악을 뒤로하고 공원을 떠났습니다. 반 블럭 정도 걸었을까, 길 모퉁이에 한 여자가 작은 강아지를 데리고 나와 서 있는 게 막 켜진 가로등 불빛 아래 보였습니다. 나보다 룰루가 먼저 그 강아지에게 뛰어갑니다. 그쪽 강아지도 룰루를 향해 뛰어오더니 꼬리를 살랑거립니다. 여자와 나는 말없이 두 강아지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먼저 룰루에게 말했지요. '룰루야. 렛츠 고'라고. 여자가 깜짝 놀라는 목소리로 물었어요. 한국사람이냐고. 그렇다고 했더니 안녕하세요, 하고 한국말로 인사를 합니다.'룰루야'해서 한국사람인 줄 알았다는 겁니다. 자기도 자기 강아지를 '코나야'하고 부른다면서.
인연이라는 것을 생각합니다. 과연 우연히 이루어진 인연이라는 게 있을까요. 아무 기대없이 놀러간 친구집에서 S부부는 평생을 같이할 반려견을 만납니다. 20년을 살면서도 한 번도 가지 않던 야외 음악회에 다녀오다가 나는 S를 만납니다. 만약 세 명의 청소년들이 내 앞으로 바삐 걸어가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습니다. 왜 하필 그 청소년들은 그날 그 시간에 그 장소에 나타나 나를 공원으로 이끌었던 것일까요.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S와 내가 만난 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인 것 같습니다. 가수 노사연의 노래 중 이런 가사가 있지요.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맞아요. 그동안 나는 간절히 바랐습니다. 내 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다시 생기기를요. 인연 소중한 줄 몰랐던 젊은 날의 내 실수를.
-사진은 우리집에 놀러온 강아지 ‘코나’.
23
쪽지
Back
목록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