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난 달 중순, 남편 조카의 결혼식에 참석하고난 후 작은 아버지 집에서 하룻밤 자야 했습니다. 왕복 여덟시간의 긴 거리에 비까지 오고 있어 당일치기 여행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호텔도 천지인데 왜 불편하게 남의 집 신세를 지냐고 난색을 표했지만 이제 살 날이 얼마남지 않은 작은아버지, 좀 더 시간을 같이하고 싶다는 남편 뜻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집에 발을 디디는 순간 남편을 설득해 호텔로 가지않은 걸 크게 후회했습니다. 천정에 닿을 정도로 물건들 많고 지저분하고 정리정돈이라고는 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걸 예전부터 알고는 있었습니다만 집안은 전보다 더 발디딜 틈 없이 난장판이었기 때문입니다. 신발끝으로 바닥에 널부러진 물건들을 밀고 차고 치우면서 우리가 잘 이층으로 올라갔는데 어머나, 거기는 더 가관입니다. 집 뒷편으로 펼쳐진 들판에 사는 길고양이들을 거둔다더니 시커먼 고양이가 네 마리나 여기저기 누워 있는 겁니다. 비가 오고 있어서 그런지 고양이들로부터 쿰쿰한 냄새까지 나고요. 벼룩 떼가 스물스물 발밑으로부터 다리를 타고 올라오고 있는 것 같아요.

어지럽게 널려 있는 물건들을 대충 치우고 씻기 위해 화장실을 갔습니다. 좁아터진 화장실 바닥은 고양이들을 위해 놓아둔 물 그릇 서너개에다 사료가 담아진 그릇들 서너개로 꽉 차 있습니다. 까딱 발을 잘 못 디뎠다간 그것들을 뒤엎어 바닥을 엉망으로 만들 판입니다. 더구나 전기 스윗치가 화장실 저 안 쪽에(단층인 집을 작은 아버지가 직접 이층으로 증축했는데 동선과 편리에 대한 생각을 미처 못 한듯)있네요. 참 난감했습니다. 한숨이 푹 나오더군요.

내게 화장실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밤에 화장실을 자주 가는 습관이 있어요. 많을 때는 대여섯번, 적을 때는 서너번. 젊을 때도 그랬지만 나이가 드니까 야뇨증 증세가 더 심해집니다. 저녁에 맥주라도 한 잔 마신 날에는 화장실 드나들다가 날밤을 새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모양새의 화장실이라니. 지금이라도 호텔로 가버렸으면 딱 좋겠다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 할 수 없지요, 뭐. 화장실 불을 밤새 켜놓기로 했습니다.

자리로 와서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습니다. 정갈하지 않은 곳에서는 잠을 잘 수 없는 예민한 성격때문이기도 합니다만 느낌이 서늘하고 으시시 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밤에 깨서 화장실 갈 일이 태산같습니다. 요강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까지 했어요. 어질러진 실내가 문제가 아니었거든요. 인형들 때문이었습니다. 숙모가 여자인형을 모으는 취미가 있어요. 방안 곳곳, 가구 위에, 창틀에 까지 올려져있는 인형들. 컬렉션을 하려면 좀 제대로하지, 오랫동안 먼지를 닦지 않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않은 빛 바랜 인형들이 한 쪽에 켜진 화장실 불빛을 받은 채 우리를 쳐다보고 내려다 보고 있어요. 잠 깨서 화장실 가다가 보게되면 기함을 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는 밤에 기괴한 모습의 인형들로 둘러쌓인 방이라니. 눈 질끈 감고 그냥 호텔로 갈 걸, 다시 한번 후회를 했습니다. 

어느새 잠이 들었던가 봅니다. 비가 엄청 많이 오네, 하는 남편의 말 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이층 방 지붕 위로 비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그러게. 엄청 오네,하면서 몸을 일으키려던 나는 벽에 걸린 시계가 일곱시를 가리킨 걸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밤새도록 단 한 번도 화장실을 가지 않았던 걸 깨달았던 것입니다. 잠자리에 든 게 11시 쯤이니 거의 여덟시간 동안을 말입니다! 더구나 결혼식 피로연에서 맥주까지 두 병 마셨는데요! 정말로정말로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다른 때같았으면 적어도 다섯 번은 일어나야 했을 겁니다.

집에 돌아온 날 밤,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오늘밤은 어떨까, 하는 조바심. 거의 네 시간 가까운 거리를 차를 탄 데다가 남편 쪽 일가친척들이 모이는 자리라 좀 긴장해서, 그러니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피곤해서 그랬을 거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여덟시간 동안 소변때문에 잠을 깨지 않았다는 것은 아주아주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불면에 시달리다 못해 수면제를 복용한 후 비몽사몽 중에도 요의를 느껴 깰 정도로 내 방광은 예민했더랬으니까. 평생을 통틀어 소변때문에 잠을 깨지 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런데요. 그날 밤도 딱 한 번만 깼습니다. 늘 그랬듯 요의에 의해서였지만 화장실갔다가 도로 잠자리에 들어 눈을 뜨니 다음 날 아침. 한 번밖에 요의를 느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일일까요. 어떤 기적에 의해 그동안 퇴행되었던 신체기능이 다시 살아난 것일까요.

기적은 아니었습니다. 은행(ginkgo)의 효과였던 것 같아요. 친하게 지내는 할배가 은행을 지퍼 백으로 하나 가득 주길래 먹기 시작했거든요. 은행에서는 지독한 냄새가 난대요. 할배는 그 냄새를 참으면서 깨끗히 씻어 말렸대요. 사실은 내가 넛 종류를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남을 주거나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할배의 정성을 생각하면요. 그래서 먹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대여섯개 씩 하루에 두 번.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그냥.

하도 신기해서 인터넷에 들어가 은행의 효능을 검색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은행이 야뇨증에 효과가 직방이라고 나와 있더군요.

내 글을 다 읽은 독자님들은 알 겁니다. 내가 심한 불면증이 있다는 걸. 지금 생각하니 야뇨증이 불면을 야기한 것 같습니다. 곤히 잠들었다가도 요의때문에 잠을 깨잖아요. 그러면 두번 다시 잠들기가 어려운 일이 비일비재했거든요. 막내동생도 평생을 불면증에 시달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작년에 한국갔을 때 동생이 말했습니다. 불면증을 고쳤다고. 불면의 밤이 지속되니 갈수록 삶의 질이 떨어져서 고통받던 중, 마침 친구가 한의원을 개원했기에 가봤다고 합니다. 친구가 동생의 증상을 들어보더니 불면증의 대부분은 야뇨증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면서 야뇨증을 고치면 불면증은 자연스럽게 없어질 거라고 하더랍니다. 그러니까 빈번한 소변때문에 잠을 깨니까 다시 잠 들기 어렵게 된다면서 이는 방광이 약해서 생기는 증상이라고 진단하더래요. 그리고는 방광 기능을 개선하는 약을 지어주더랍니다. 그 약을 먹고난 후에는 예전처럼 자주 화장실을 안 가게 되었고 잠도 좀 잘 수 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나는 동생 말을 흘려들었습니다. 동생이나 나나 글을 쓰는 사람, 명색이 작가라는 사람이 불면으로 밤을 새면서 고뇌도 하고 명상도 해야지 돼지처럼 쿨쿨 잔다는 건 누가 봐도 혐오스러울 것 같지 않냐는 같잖은 이유를 대면서. 동생이 말린 질경이를 한 봉지 주면서 말했습니다.
"누나는 그래도 아직 살만 한가 보네. 난 잠을 못 자면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대인관계에도 지장이 생기던데. 어쨌든 이 질경이가 방광을 튼튼하게 한다니까 가지고 가서 우선 달여 드세요"

미국에 돌아와서 동생이 준 질경이를 남한테 주어버렸습니다. 불면증은 나랑 평생 같이 가야할 친구라고 생각한 것도 있지만 골치 아픈 인간관계를 다 정리하고, 조그만 일에도 안달복달하는 성격을 고치려고 노력하니 예전보다는 잠을 좀 자는 편이어서요. 그렇지만 한밤중, 따뜻하고 포근한 잠자리에서 빠져나와 차디찬 변기에 앉는 일은 참 괴롭고 성가신 일이었어요. 그런데 은행 며칠 먹었다고 그 증상이 개선되다니요. 나는 얼른 할배한테 연락했습니다. 은행을 좀 더 달라고요.

은행을 먹은 지 한 달이 넘은 지금, 야뇨증은 거의 개선된 것 같습니다. 은행이 이렇게 야뇨증에 효과가 뛰어난 열매인지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할배 덕분에 고질병 하나를 고쳤습니다.


- 룰루와 함께 결혼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