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할배를 만났는데 얼굴이 편치가 않습니다. 아내랑 대판했답니다. 대수롭지 않게 내가 말했습니다. 여든이 내일 모레인데 아직도 싸움할 기력이 남았나 보네요. 이번에는 무슨 일로싸웠나요, 그래?

할배가 말합니다. 냉장고때문이라고. 지금 다섯 대의 냉장고가 좁아터진 집안을 채우고 있는데 또 한 대를 더 사겠다고해서 싸웠다고. 나는 경악했습니다. 할배와 부인, 단 두 식구에 다섯 대의 냉장고가 있었다는 것도 놀랍고 거기다가 한 대가 또 더 필요하다는 것도 놀랍고.



“냉장고가 다섯 대나 있어도 냉동실엔 아이스크림 한 통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정체 불명의 식료품들이 손톱 하나 들어갈 틈없이 꽉꽉 자리를 채우고 있어서. 냉동고 문 한 번 잘 못 열었다간 발등 깨기 쉽상이야. 돌덩이같이 꽝꽝 언 봉지들이 앞 다투어 굴러 떨어지니까. 냉장고에는 5, 6년 전에 담근 깻잎, 고춧잎, 장아찌병들이 수십 개나 되고. 아마 10년 이상된 것도 있을 거야. 안 먹는 건 제발 좀 버리라고해도 말을 안 듣네. 그래놓고는 뭐 넣을 데 없다고 냉장고가 하나 더 필요하다니 사람 환장할 노릇이지…”



내가 말했습니다. 천재지변 나면 식료품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고. 할배가 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어요. 2, 3년은 까닥없을 거야. 아니, 냉장고 한 대당 1 년 먹을 정도의 음식과 식료품이 꽉 차 있으니 5, 6년도 버틸수 있을 걸?!


우리집은 냉장고가 한 대밖에 없습니다. 그마저도 늘 휑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나는 뭐가 쌓여 있는 게 싫은 사람이라서요. 코스코나 한국마켓에 다녀와서 냉장고가 가득 차면 그때부터 스트레스가 생기기 시작해요. 그 스트레스는 식료품을 다 먹어 없앨 때까지 갈 정도입니다. 



작년 초, 코로나 바이러스가 미국을 막 덮쳤을 때, 너도나도 앞 다투어 식료품들을 사재기할 때 나는 두 손 놓고 멀뚱하게 있었더랬어요. 위에 쓴대로 나는 뭐든지 쌓여있는 걸 못 견뎌하는 사람이라서. 코스코에서 화장지와 쌀을 판매제한 하기 시작했단 뉴스를 들으면서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어요. 저러다가 말겠지. 그러나 시간이 가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뉴스에 나온 텅 빈 식료품 진열대를 보면서, 내 주위사람들도 전쟁난 듯 생난리를 치니까 위기의식이 느껴지면서 조금 조급해졌습니다. 집안의 식량을 확인해보니 열흘도 버틸 수가 없겠더라고요. 냉장고 안에는 빵 한 줄, 계란 몇 개, 약간의 채소들밖에 없었고 냉장고에 붙은 냉동고에는 만두 반 봉지, 고춧가루, 닭고기 한 팩, 그리고 아이스크림 한 통이 전부였으니 말입니다. 오, 또 있어요. 라면 반 박스. 스파케티 소스와 국수 조금. 



남편을 재촉해 가전제품 업소에 갔습니다. 아무래도 냉동고가 한 대 있어야될 것 같아서요. 고기와 냉동야채를 사다가 좀 쟁여놔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런데 웬걸. 몇 군데나 들렀는데 냉동고도 냉장고도 동이 났습니다. 마지막으로 들린 가전제품 업소에서 담당자가 말했습니다. 플로어에 놓인 샘플 냉동고마저도 누가 사가겠다고 애걸복걸하기에 팔아버렸다고. 빈손으로 털레털레 돌아오는데 헛웃음이 났어요. 정말로 어이 없고 허탈했지요. 지금은 그때 냉동고를 못 샀던 것을 큰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필요하지도 않은 살림살이를 늘리는 건 정말로 싫거든요.



‘에어 프라이기’가 출시되었을 때 주위 아줌마들이 내게 구입을 권유했습니다. 주방의 혁명품이다. 한 번 쓰기 시작하면 중독 된다. 나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둘 데가 마땅찮아서 없는대로 그냥 살겠다고. 아줌마들이 어이없어 했습니다. 둘 데가 마땅찮다니, 부엌 캐비넷이랑 카운터탑이 다른 집보다 두 배나 넓은데 둘 데가 마땅찮다니, 하고요. 사실 자리야 많지요. 우리집 카운터탑 위는 썰렁하리마치 아무것도 없습니다. 처음 우리집에 와 본 사람은 의아해 합니다. 어떻게 밥통이 없냐고요. 수많은 집을 가봤지만 부엌에 밥통없는 집은 처음 봤다고. 밥통은 캐비닛 안에 있어요. 뿐만 아니라 커피포트는 커피를 내릴 때만 사용하고 그 외에는 캐비닛 안에 놓아둡니다. 토스터도 마찬가지고. 넣었다 꺼냈다하는게 성가시지 않냐고요. 물론 성가시지요. 그렇지만 카운터탑위에 어지럽게 놓여져있는 물건들을 보며 스트레스를 받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사람들이 말합니다. 이계숙 씨 집은 모델 하우스같다고. 예에. 모델 하우스같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사람이 안 사는 집같다는 말도 많이 듣고 절간같다는 말도 많이 들어요. 그만큼 늘어놓은 물건들 없이 말끔하고 시원하게 정리정돈이 잘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누구는 입을 삐죽거립니다. 집이 넓으니까 가능하지. 아니요. 미국오기 전, 비자를 기다리며 낡은 한옥의 작은 문간방에서 살았는데 그 집 주인아주머니가 말하더군요. 자기가 수많은 여자들에게 세를 주었지만 나같이 정리정돈 칼같이 깨끗하게 해놓고 사는 사람은 처음이라고.

면적이 크고 작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운동장같이 넓은 집도 제대로 정리정돈을 안 하면 고물상이 되는 건 한순간입니다. 청소를 해도해도 표가 안 나고 늘 지저분하고 어질러진 집의 문제는 쓸데없는 물건들이 너무 많은데 있습니다. 일년 열 두달가도 쓸 일없는 물건들, 아깝다고 모아놓은 비품들, 자질구레한 장식품들이요. 특히 한국사람들집은 정도가 심한 것 같아요. 무슨 쓰잘데기 없는 살림살이들이 그렇게도 많은지.

부동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쓴 글을 보고 배꼽을 잡은 적있습니다. 제목이 한국집의 특징인가 그랬는데요. 내가 그동안 한국사람들 집에 가 보고 느낀 거랑 너무너무 일치한 겁니다. 공짜로 얻어온 달력이 방마다, 벽마다 걸려 있다. 부엌에 걸린 달력 위에는 어김없이 파리채도 걸려 있다. 열 집에 여덟집은 나무로 된 십자가가 걸려 있다. 부엌에는 밥통이 버티고 있다. 겨울에는 거실 한 복판에 밍크담요가 덮여진 전기장판이 깔려있다. 또한 부엌 카운터탑 위에는 온갖 잡동사니들과 함께 약병들이 주루룩 놓여 있다. 어떤 집은 뜯은 쌀자루, 혹은 뜯지 않은 쌀 자루가 부엌바닥에 통째로 놓여져 있다.

내가 본 미국집의 특징을 말해 볼까요.몇 달째 뜯지 않은 우편물이 그대로 식탁 위에 수북하게 쌓여져 있다. 벽에는 틈이 거의 안 보이게 사진액자들이 걸려 있다. 차 두 세대가 들어갈 수 있는 차고는 물건들로 가득 차 정작 차는 드라이브웨이에 댄다. 오래된 인형들, 조화들을 비롯해 지금은 성인이 된 자녀들이 어릴 때 가지고 놀던 때묻은 봉제 인형들이 구석에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다. 냉장고 위에는 시리얼 박스가 예닐곱 개 올려져 있다.

위의 묘사한 집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또 있어요. 필요한 물건들을 제때 못 찾는다. 어디 있는지 모르니까. 그래서 찾다가찾다가 포기하고 또 새것을 삽니다. 집안에 물건이 또 늘어납니다. 악순환이 반복되는 겁니다. 

집안을 깨끗하게 하려면 일단 물건들을 줄여야 합니다. 간소하게 살아야 해요. 생필품 외에는 싸다고, 남들이 다 사니까, 편리해 보인다고 무작정 사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나는 쉰이 넘고 부터는 일절 뭘 사들이지를 않습니다만  쇼핑을 안 하니까 일상의 소소한 재미가 없어요. 그래서 지금은 진짜로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삽니다. 대신 기존의 물건들을 없애요.

얼마전 ‘마샬’에 갔다가 케이크 나이프세트를 발견했습니다. 손잡이에 보석이 주르륵 박혀있는. 가격도 쌉니다. 14불 99전.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서 얼른 샀습니다. 그동안 쓰고 있던 케이크 나이프세트(내 결혼식때 썼던)는 ‘넥스도어’라는 웹사이트에 무료로 올렸어요. 올린지 5분도 안 되어 임자가 나타나더군요.

‘넥스도어'는 한국의 ‘당근 마켓’ 같은 건데 필요치 않은 것을 팔기도 하고 사기도 하는 사이트입니다. 물론 무료로 내 놓을 수도 있어요. 무료라면 모두 앞다투어 와서 가져갑니다. 참 재밌는 것이 단돈 몇 불이라도 붙여 내놓으면 며칠이 가도 안 팔리는데 ‘무료’라고 올리는 순간, 원한다는 쪽지가 쇄도해요. 그 사이트를 통해서 버리자니 아깝고 누굴 주기도 마땅찮은 물건들을 많이 처분했습니다. 선물받은 향초랑 한 번 신은 운동화, 짝 안 맞는 접시, 싫증난 핸드백 등을 없앴습니다. 예전에는 박스나 봉지에 담아서 차고 한 쪽에다 두었다가 도네이션 센터에 갖다 주었는데 지금은 넥스도어를 통해 금방금방 처분할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새해입니다. 산뜻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하려면 몸도 마음도 집안도 청소를 해야겠지요? 지금 얼른 큰 쓰레기. 봉투를 준비하세요. 안 쓰는 것, 고장난 것, 싫증난 것, 필요없는 것들을 과감하게 처넣으세요.


- 사진은 일 주일동안 유렵여행 떠난 주인을 대신해 내가 돌봐 준 강아지 ‘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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