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참, 독자님들로부터 관심받으려고 일부러 투정부린 것 같네요. 옆구리 찔러 절 받는 격이 되어 버렸구먼요. 되게 민망하고 무안하고 쑥스럽습니다. 어쨌거나 결심을 철회했습니다. 발목을 잡힌김에 주저 앉았습니다. 5백회까지 가겠습니다.

처음에는 후회를 했지요. 400회가 되었을 때 이제 땡땡했습니다는 통보의 글을 올리고 발걸음도 가볍게 룰루랄라 떠나갈 걸, 괜히 미리 언급을 했구나하는 후회. 그러나 독자님들의 댓글을 계속 읽으면서 내가 너무 성급하고 경솔했다는 자책을 하게 되었습니다. 유미 김 씨의 표현대로 ‘이별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한데 마감 지켜야하는 내 중압감만 생각하고 독자님들의 심중을 헤아리지 못한 것 같아서요. 죄송하게 되었습니다그려.

이번에야 알았어요. 내 글이 독자님들 미국생활의 한 부분을 중요하게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특히 타령조의 긴긴 댓글을 세 번이나 써주신 청 천 씨.(Chung Chun)씨. 남편과 미 전역을 여행다니면서 재밌고 편안한 은퇴생활을 만끽함에 남 부러울 게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내 칼럼이 그녀의 삶에 아주 큰 비중이더군요. 몰랐습니다. 그 비슷한 내용의 댓글을 여러차례 올렸었지만 그냥 나 듣기좋으라고 해보는 통상적인 인사로 여겼습니다.

여러분들의 댓글을 읽으면서 눈물 많이 흘렸지요. 고맙고 미안하고 황송하고 벅차고. 이렇게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되나, 몸둘 바를 모르겠습디다. 댓글 다 읽어보신 분은 알겠지만 처음에는 계속 제 결심을 굽히지 않았더랬습니다. 앞으로 여덟 번 채우고 그만 두겠다고 초지일관으로 나갔어요. 그런데 이별을 만류하는 댓글이 점점 더 달리면서 강철같이 단단하던 마음이 흔들리더군요. 더 이상 뻗대고 고집을 부리는 게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내 친구 할배들도(여기 회원은 될 수는 없어도 내 글은 로긴없이도 읽기가 가능하니까)댓글 읽으면서 코끝이 찡했다는 말을 합디다. 한 할배가 그래요. 이계숙이가 독자들에게 그렇게 소중한 존재가 되고 있는지 몰랐다고. 또 한 할배가 말했습니다. 댓글 하나하나마다 이계숙이란 사람을 진짜로 사랑하고 아끼고 고마워하고 떠나보내기 싫어하는 진심들이 다 담겼더라고. 한 댓글은 너무나 가슴에 깊게 와 닿더랍니다. 점잖은 체면에 울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랍니다. 나 역시 그랬습니다. 눈물이 저절로 흘렀어요. 할배와 나를 울게 한 그 댓글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안녕하셔요. 늘 챙겨보는 작가님의 찐팬으로 마지막이란 말씀에 정말 깜짝 놀랜 마음에 처음으로 만나뵙네요. 오래전 중앙일보칼럼 때부터 늘 마음에 두고 좋아하던 분이셔요. 오래전 그 칼럼에서 제목이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였는데. 그 글 끝에 죽고 살 일 아니면 다 괜찮다고 하셨는데 그 신문 스크랩을 일기장 앞에 붙이고 얼마나 내 삶에 위로가 되었는지요.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래요. 어쩌면 그 글 한 마디가 얼마나 힘이 되던지요…-

그 글. 희미하게 기억이 납니다. 오래전에, 그러니까 20년 가까이 전에 중앙일보에 쓴 글,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라는 제목의 글을. 그 글은 남편과 결혼한 후 한국 고향집을 첫 방문했을 때로 시작합니다. 고향마을에는 닷새마다 장이 섰습니다. 지금은 최신설비를 갖춘 마트가 들어서면서 5일장의 가치와 명성이 많이 퇴색되었지만 그때만해도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꽤 풍성했어요. 남편에게 장구경을 시켜주려고 나갔는데요. 많은 사람들 틈에서 어리버리하다가 여행경비와 영주권이 든 지갑을 통째로 잃어버렸습니다. 소매치기를 당한 거지요.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예전에는 소매치기, 들치기가 득실득실했어요. 사람 많고 복잡한 곳에서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했어요. 조금만 방심하면 지갑이나 몸에 걸친 금 장신구가 거짓말같이 없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니까.

지갑이 없어졌다는 걸 인지한 순간 눈 앞이 캄캄했습니다. 정말 기절할 일이었습니다. 보름간의 여행경비는 그렇다치고 영주권을 잃어버렸으니 어떻게 미국으로 돌아갑니까. 와아악, 하는 통곡이 저절로 나오더군요.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도 아랑곳없이 장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습니다. 울어봤자 아무 소용없는 일이긴 하지만요. 철철 흐르는 눈물 너머로 어쩔 줄 몰라하는 남편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말도 안 통하는 한국의 한 시골 시장바닥에서 아내라는 사람이 몸부림을 치면서 우는데 남편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었겠습니까. 할 수 없이 집으로 갔지요. 집까지 가는 동안도 악을 쓰며 울었습니다. 지갑을 잘 간수 못한 내 불찰이 너무나 후회스럽고 원망스러워서. 집 대문을 들어서는 데도 울음이 안 그쳤는데 마침 집에 아무도 없습니다. 마루를 뒹굴면서 바닥을 치면서 울었습니다. 남편은 여전히 어쩔 줄 몰라하고.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 그때처럼 당황스럽고 자책스럽고 억울하고 원통하고 울화가 터지는 일은 또 없었을 정도로 큰 사건이었으니. 얼마나 충격적이었으면 지금도 그 상황이 가끔 꿈에 나올까요.


외출했던 엄마가 들어오다가 내 울음소리를 듣고는 불에 덴 듯 놀랐나봐요. 나중에 엄마가 그러더군요. 대문을 들어서는데 통곡소리가 나길래 내 남편한테 돌이킬 수 없는 큰 사고가 난 줄 알았다고. 나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엄마가 말했습니다.
“난 또 무슨 엄청난 일이나 생긴 줄 알았네. 뭘 그런 걸 가지고 남사스럽게 통곡을 해쌌냐. 죽고사는 문제만 아니면 괜찮다. 울지 마라.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엄마는 괜찮다는 말을 수십번 반복했습니다. 한국말이라고는 단 한 마디도 못하던 남편이었지만 수십번 반복된 엄마의 괜찮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챈 것 같았습니다. 남편이 무릎걸음으로 내게 오더니 내 등을 두드리며 한국말로 말했습니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그 뒤로도 남편은 괜찮다는 말을 내게 잘 씁니다. 하늘처럼 믿었던 한 지인으로부터 뒷통수를 세게 맞고 괴로와하고 있을 때도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금방 뽑은 새차를 신나게 타고 나갔다가 우그러트리고 들어와도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내 실수로 블루가 죽었을 때도 남편은 말합니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물론 안 괜찮습니다. 괜찮을 리가 없습니다. 괜찮다는 말로 쉽게 해결될 문제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남편이 괜찮다해도 내가 안 괜찮으니까 더 미칠 지경이 됩니다. 특히 내 실책으로 인해 사건이나 사고가 벌어졌을 경우에는. 그런데요. 참 신기합니다. 속이 상해 죽을 지경이다가도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는 말을 반복적으로 들으면 어느정도 진정이 됩니다. 진짜 모든 상황이 괜찮아질 것 같은 낙관적 마음이 드는 겁니다.

10여년 전 남편이 큰 돈을 사기당한 적 있어요(고모가 손금으로 알아맞췄다는). 돈이 없으면 말지, 집의 에큐리를 빼서 투자를 한 겁니다. 물론 나는 반대했지만 몇 달만에 두 배의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사기꾼의 말에 현혹된 남편에게는 내 만류가 씨도 안 막히더군요.

아니나 다를까. 돈을 송금하자마자 사기꾼은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남편은 망연자실. 코가 석자나 빠져있는 남편을 보니 측은한 마음도 들긴 했지만 정말 죽이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죽일 수는 없는 일, 여지껏 내가 잘못할 때마다 남편이 했던 것처럼 등을 두드려 주었습니다.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해주었습니다.

온갖 비난과 원망과 공격을 각오하고 있었던 남편이었던가 봅니다. 내 입에서 나온 괜찮다는 소리를 듣던 남편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고마움과 놀라움과 감격으로 가득 차던 남편의 얼굴을.


그래요. 모든 게 괜찮습니다. 지금까지 안 괜찮았다면 앞으로 괜찮아질 겁니다. 태산같이 높고 험한 고난이 앞에 가로막혀 있습니까. 소리 높여 중얼거려 보세요.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사람이 죽고사는 문제만 아니라면 다 괜찮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