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일입니다. 냉증이 처음 발병했을 때. 얼음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한 지인이 홍삼 엑기스를 사다 주었어요. 코스코에 갔더니 마침 있더라면서. 홍삼이 몸을 따뜻하게 한다니 얼른 먹고 나으라면서. 넉넉한 형편도 아닌 그녀입니다. 얼마나 고맙던지요. 한 할배로부터 전화가 왔길래 자랑을 했습니다. 참 마음이 따뜻한 여자라고. 가난한 살림에도 나를 생각해 이렇게 홍삼을 사왔다고. 그녀 정성을 봐서라도 빼놓지 말고 꼬박꼬박 먹어야겠다고. 잠자코 듣고있던 할배 왈, 그 홍삼 별로 안 비싸. 어저께 나도 코스코에서 샀는데 40불밖에 안 하던데.

얼마전 미씨 연예방에서도 똑같은 사람을 봤습니다. 왕년의 씨름선수 이만기 씨가 신혼초기, 처가에 아파트 한 채를 선물했다는 기사에 모두들 대단하다, 통도 크다, 얼마나 아내를 사랑했으면, 부럽다는 댓글이 주를 이루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찬물을 끼얹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파트 가격이 엄청 쌌어요’라고. 내 친구 할배도 그렇고 댓글 단 이도 그렇고 가격에만 관심이 있나봅니다. 본질은 그게 아닌데. 본질에서 벗어난 엉뚱한 말을 하는 사람이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지금 예를 들려고 하는 부류에 대면 약과입니다. 나를 아주아주 짜증나게 하는 부류들. 한번 들어보실래요?

지인의 친구가 한국에서 왔습니다. 내가 밥을 사겠다고 했습니다. 우리집에 예닐곱이 모여서 같이 식당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생전 치장을 안 하는 한 지인이 귓볼에 달랑달랑하는 귀걸이를 달았길래 예쁘다고 칭찬을 했더니 옆에서 누가 말합니다. 이계숙 씨는 사람한테 참 관심이 많아. 남들은 그냥 무심히 지나가는 조그만 변화도 금방 알아채는 것같아. 조금 무안해진 내가 대답했어요. 나는 사람뿐만 아니라 온갖 사물에 관심이 많고 궁금한 게 많다고. 나는 작년 가을, 한국에 나갔을 때 있었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호텔을 잡았는데 이름이 ‘92‘입니다. 호텔로 놀러 온 친구들, 사촌들도 왜 호텔 이름이 숫자로 되어있는지 궁금해 하지 않습니다. 나는 너무너무 궁금했는데. 여기까지 말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온 지인의 친구가 냉큼 나서서 내 말을 가로챕니다.
“그게 호텔 주소예요. 요즘 한국에서 업소명을 주소로 짓는 게 유행이거든요. 카페 2356. 호텔 9874 등등으로…”

숫자로 업소 이름 짓는 게 한국의 트렌드라고 칩시다. (참다못한 내가 카운터에 가서 물어봤더니 92는 주소가 아닌 호텔 건립 년도)그래도 남의 말을 끊으면서 뛰어들 일은 아닙니다. 아는 척 하고 싶어도 상대가 말을 다 마칠 때까지 기다려야지요. 더구나 처음 만나는 사이에서.

또 하나. 지인들 모인 자리입니다. 식탁에 올려둔 쵸콜렛을 강아지 한 놈이 훔쳐먹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데 그중 두엇이 앞 다투어 나서더니 개한테 초콜렛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일장 연설을 합니다. 알아요, 알아. 나도 알아요. 그래서 놀라서 미친듯이 병원으로 뛰어가려다가 일단 소독약을 퍼 먹였더니 왈칵 다 토해내고 괜찮아졌습니다. 자책과 함께 그 에피소드를 신나게 떠들고 싶었는데 내가 말을 진행할 틈을 주지 않는 사람들.

위에 예를 든 것처럼 이쪽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뛰어들어서 자기 말을 시작하는 무례한 사람들이 참 많아요. 주제를 꺼내기가 무섭게 확 가로채서는 끝장을 보고야 마는.

한참 얘기 중에 주제와는 동떨어진 말로 갑자기 분위기를 냉각시키는 여자도 있습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입니다. 언젠가는 우리집에 놀러온 한 지인 앞에서 울분에 차서 어떤 ‘광녀’ 에 대한 하소연을 한 적 있어요. 늘 그랬듯이 지인은 내 열변에 전혀 관심을 안 기울입니다. 멀뚱한 표정입니다. 원래 그런 성격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일단 얘기를 꺼냈으니 중간에 그만 둘 수는 없습니다. 빨리 짧게 끝내야지 하면서 얘기를 계속하는데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것 같던 그녀가 무심한 얼굴로 갑자기 �� 묻습니다. “그 우유, 올가닉이야?” 내가 데운 우유잔을 들고 있었거든요. 아니. 내가 하는 이야기와 우유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아무 상관없는 말로 이야기 맥을 끊어놓는 여자. 다시 생각해도 열 받네요.

상대방 말을 듣는지 마는지 일체 반응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단골 미용실에 머리를 하러 갔습니다. 마침 지인도 와 있었어요. 지인은 중화제 바를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미용실 한쪽 켠에 있는 텔레비젼에는 한국 국악방송을 틀어놨는지 쉬임없이 ‘창’이 흘러나옵니다. 어쩌다 틀게 되었는데 귀찮아서 채널을 안 바꾸고 계속 보고 듣고 있다는 미용실 주인. 이에 내가 경험담을 들려주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 출근을 하려고 보니 차 시동이 안 걸려요. 그래서 한 할배한테 라이드를 부탁했어요. 할배 차를 탔는데 댕댕댕, 둥둥둥하는 징소리 북소리와 함께 이상한 음악이 차 안을 가득 채우는 겁니다. ‘회심곡’이랍니다. 처음 들어보는 음악입니다. 얼마나 괴기스럽고 무서웠던지요.

내 이야기를 들었는지 말았는지 두 여자는 잠자코 있습니다. 아무 반응이 없어요. 나름 흥미있고 재밌는 이야기인데도. 나 같았으면 “어머, 그랬어? 이른 아침에 좀 황당했겠다. 회심곡은 내포한 뜻은 참 좋은데 음률이 좀 음산한 것 같아”라고 맞장구를 쳐주었을 겁니다. 두 여자의 무반응에 속상하면서도 내가 또 입을 엽니다. 혼자 다 떠들고나면 기운이 방전되긴 합니다만 침묵이 어색한 나는 무슨 말이든지 떠들어야 합니다.

‘침 맞고 한약을 많이 먹었더니 한겨울 냉골같던 몸에 조금씩 온기가 도는 것 같다’고 내가 말했습니다. 역시 두 사람은 묵묵부답. 한 사람은 묵묵히 내 머리를 말고 한 사람은 그냥 멍하니 있더니 전화기를 꺼내 들여다 보기 시작합니다. 그저 무반응. 나는 허공에 대고 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 참 다행이네. 몇 년 고생하더니 이제 나으려나 봐.”라는 말이 나와야 옳겠지요? 금방 만난 사람도 아닌, 적어도 오랜 세월을 같이 했던 나에 대한 예의로라도. 최소한의 그런 반응도 안 하는 두 사람입니다.

위에 쓴 두 사람만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쪽에서 하는 말에는 일체 반응도 안 하고 관심도 표하지 않으면서(아무리 흥미있는 주제라도 말이지요.)자기 얘기는 침을 튀겨가며 장시간 한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나중에 상대의 입이 좀 쉬는 틈을 타서 내 얘기를 시작하잖아요. 금방 따분하다는 듯 딴청을 핍니다. 전화기를 확인한다든지 먼 산을 본다든지 멍한 얼굴로 앉아 있다든지. 흥미를 끌만한 소재로 요점만 추려서 간단히 하는데도 일단 남의 말은 들어주기 싫다 이겁니다. 자기의 장황한 얘기는 몇 시간이고 귀 기울여 주었는데. 김이 팍 새서 내가 말을 끊으면 기회는 이때다하고 다시 자기 말을 시작하는 사람들.

아는 사람은 알지만 나는 남의 말을 잘 듣습니다. 반응도 잘 하고요. 그래, 그랬어? 속상했겠구나. 아이고, 참 잘했네 맞장구쳐 주면서 몇 시간이고, 몇 십분이고 경청합니다. 오랜시간 수백명을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길들여진 좋은 습관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위에 쓴 부류한테는 나같은 사람은 완전히 자기 밥입니다.

공통의 주제가 아닌,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애기만 주구장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화의 중심이(대화라고 할 것까지도 없는)대부분 자기 일상입니다. 또한 자기 가족들 이야기. 아침에 일어나서 밥먹고 학교갔다는 초등학생의 일기장처럼 아무 재미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이야기. 정말 별시덥잖은 이야기.

오, 최악인 경우가 있지요. 상대방의 말에 항상 ‘그게 아니고’로 부정부터 하는 사람. 옳든 그르든 무조건 그게 아니고입니다. 궁금한 점을 물어와서 성실하게 답변을 했는데도 그게 아니고고요. 육하원칙에 입각해 조목조목 상황설명을 했건만 수긍하지 않고 그게 아니고를 찾으면서 처음의 자기 생각을 끝까지 굽히지 않는. 정말로 힘 빠지지요. 내 말을 믿지않고 일관적으로 자기 고집을 피울 것 같으면 묻기는 미쳤다고 묻는지. 시간 아깝고 에너지 아깝게스리.

예전에는 이런 사람도 좋고 저런 사람도 좋았습니다. ‘여왕벌’이란 별명에 걸맞게 주위에 사람 많은 사실에 우쭐하기도 했고 자랑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위에 예를 든, 대화가 안 되는 사람들과도 ‘숙제’하는 기분으로, 어떤 책임감으로 다 수용했습니다. 다 받아줬습니다. 이제 나이가 드니까 참을성도 없어지네요. 무엇보다 지쳤습니다. 대화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와 소양을 갖추지 않은 사람들과는 말을 섞기 싫어요. 절교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