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공감학원’이 성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스피치학원과 연기학원에서 대화 기술이나 감정 조절법 등을 가르친대요. 이른바 MBTI(마이어스 브릭스)성격유형 검사 결과 ‘T’(Thinking·사고형)유형 사람들에게 공감 능력이 발달한 ‘F’(Feeling·감정형)처럼 보이도록요. ‘T’의 특징은 이렇답니다.
강사: 날씨가 너무 덥죠? 학생: 네. 강사: 이럴 땐 ‘더워서 아이스크림 먹고 싶네요’라거나 ‘여름휴가를 빨리 가고 싶어요’처럼 파생 대화를 해야 해요. 학생: 고1이라 여름방학 때 공부만 해야 하는데요? 강사: 그럼 여름이 가장 좋았던 추억을 물어보세요. 상대가 관심 있는 주제로 얘기를 이어가야 해요. 그게 공감의 시작이에요. 학생: 여름은 덥기만 하고 좋았던 추억이 없는데요.
이렇게 상대방을 김빠지게 하는 T 형은 사회생활, 직장생활에도 많은 문제를 겪는다고 합니다. 왕따를 당하거나 승진에서도 제외되고. 공감학원에서 그런 단점을 개선시켜 준다고 합니다. 글쎄요. 공감능력도 타고나는 것 같은데 그게 학습하고 노력한다고 길러질까요. 공감능력도 지능의 한 부분이라고 합니다. 지능이 낮은 사람은 공감능력도 현저하게 낮대요. 그런데 재미있게도 명석하고 똑똑한데도 공감능력이 없는 사람이 내 주위에 있어요. 사람들이 그녀를 보고 잘난척쟁이라고 재수없어 하는데 내가 보기엔 그건 아닌 것 같고. 하여튼 내 얘기 좀 들어보세요.
몇년 전, 냉증이 재발했을 때. 이 증상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얼마나 큰 고통인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큰 얼음덩어리를 등짝에 올려놓고 있는 느낌, 아랫도리 전체를 얼음물에 담그고 있는 느낌, 한겨울에 맨몸으로 바깥에 노출되어 있는 느낌입니다. 무릎, 등짝 등 특정 부위가 차다 못해 시리다 못해 아프고 아립니다. 얼음장같은 몸이 전기장판으로도 해결이 안 되니까 잠도 못잡니다. 온몸을 휩싸는 냉기를 막고자 두꺼운 가운을 입고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컴컴한 거실을 거닐기를 며칠 밤. 어느날 밤도 잠을 못 이루고 집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다이닝룸 벽 한 쪽, 창문으로 비치는 희미한 달빛 아래 걸려 있는 족자가 눈에 들어왔어요. 서예를 했던 엄마의 작품, 지금은 유품이 되어버린. 엄마 글씨를 보는 순간 왜 그리 눈물이 나던지요. 나는 그 앞에서 숨 죽이며 울었습니다. 그리고 엄마에게 간절히 빌었습니다. 제발 이 고통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게 해달라고.
다음날. 위에서 말한 그녀, S가 놀러왔습니다. 냉증은 좀 개선되었냐고 묻는 그녀에게 내가 대답했지요.
“아직은. 어젯밤은 하도 힘들어서 엄마가 쓴 글씨 앞에서 막 울었네. 엄마한테 제발 낫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으니 곧 괜찮아지겠지…”
내 말에 그녀가 피식 웃습니다. 그러면서 매몰차게 말합니다. 엄마한테 빈다고 그게 해결돼? 하나님한테 빌면 모를까, 죽은 사람이 무슨 힘이 있다고? 자긴 어떤 때 보면 참 이해 안되는 구석이 있어.
물론이죠. 죽은 엄마가 나를 낫게 해줄리가 없지요. 그렇게 따지자면 하나님은 뭐 죽은 사람 아닙니까? 이럴 때, 공감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아이고, 오죽했으면 죽은 엄마한테까지 빌었을까. 그 정도로 힘들어? 그래서 어떡하냐? 내가 뭘 해줄까? 몸 뜨거워진다는 생강차라도 마셔보지 그랬어?
일 주일에 한두 번 자전거를 자전거를 탑니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길이 있어요. 얕은 언덕과 들판을 가로질러 수십 마일 나있는 한적한 길입니다. 길 옆을 따라 수로도 있고요. 가끔 물에서 놀다가 육지로 올라온 오리 떼를 만나기로 하는데요. 그날도 자전거를 타러 나갔는데 얼마 가지 않아서 오리 가족을 만났습니다. 몸집이 작은 올망졸망한 열몇 마리의 오리 떼가 덩치가 큰 어미 뒤를 쫓아서 아장아장 걷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자전거 길의 폭이 아주 좁다는데 있었습니다. 그 오리 떼 가족이 길 전체를 막고 천천히 걷고 있었기에 나도 속도를 멈추고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다가 오리떼가 속력을 내면 나도 같이 속력을 내고. 그러기를 몇 분. 마침내 어미가 나라는 존재를 눈치챘나 봅니다. 놀랐는지 전속력으로 앞으로 내빼는 겁니다. 그러다가 휘잉 날아서 언덕으로 올라갔는데 새끼들도 모두 어미 뒤를 따릅니다.
아주아주 작은 몸집의 새끼 한 마리만 길에 남았어요. 가만 보니 잘 날지를 못해서입니다. 형제들 중 가장 시원찮은 놈인가 봅니다. 언덕으로 날아오르려고 몇 번 푸드덕거리며 시도는 하는데 그냥 땅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얼른 빠르게 지나쳐서 내 갈길을 가려고 시도했으나 이놈이 길을 안 비켜줍니다. 뒤뚱거리며 걷다가 날아보려고 날갯짓을 하다가 계속 앞에서 알짱거리고 있어요. 내가 속력을 내면 이놈이 저를 쫓는 줄 아는지 같이 속력을 내고요. 내가 저속하면 저도 저속하고. 그러다가 답답해진 내가 에라 모르겠다, 슈웅하고 속력을 내니까 이놈도 죽을힘을 다해 뜁니다. 퍼드덕퍼드덕 날갯짓을 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오오! 마침내 이 오리가 허공을 날았습니다. 날아서는 엄마랑 형제들이 기다리고 있는 언덕에 안착을 했습니다.
시커먼 잠바에 시커먼 자전거에 헬멧으로 무장을 한 내가 그 오리 눈에는 얼마나 무섭게 비추어졌을까요. 저를 해칠 것같아 보이는 악당이 뒤를 빠르게 쫒으니까 저도 죽을힘을 다해서 날갯짓을 했나봅니다. 그 가속력을 이용해서 하늘을 휘잉~ 날게 된 것입니다. 나는 깨달았습니다. 우리 삶에서 마주하는 역경과 고난이 어쩌면 우리를 더 강하고 성숙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저 새끼 오리같이. 만약 내가 아니었으면 저 오리는 지가 날 수 있는 날개를 가졌다는 것을 몰랐을지도. 알았다 해도 한참 나중이었겠지…
며칠 후 놀러 온 S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콧방귀를 뀌면서 말해요. 나원참. 별 오만군데에 되도 않는 의미를 갖다 부치네. 오리가 날 때가 되었으니까 날은 거겠지. 설마 자기가 쫓아갔다고 날게 되었을까.
항상 이런 식으로 대화가 엇나가요. 나이도 같고 직업도 비슷했고 책 좋아하는 것도 같고 처한 환경도 비슷했던 그녀. 나는 일상생활에서 부딪치면서 느끼는 모든 감정들을 그녀와 나누고 싶었습니다. 기분 좋아서, 나빠서, 속상해서, 울분에 차서, 감사해서 등등의 온갖 희로애락을 그녀와 함께 하고자 했습니다. 나는 감동도 잘하고 감격도 잘합니다. 좋으면 너무 좋아서 죽고, 싫으면 너무 싫어서 죽어요. 감정이 파도처럼 요동을 치지요. 눈물도 흔하고. 이런 나에 반해 S는 항상 덤덤해요. 별것도 아닌 일에 웬 호들갑이며 수선이냐는 듯한 메마른 눈길로 나를 한심하게 바라봅니다. 그리고는 핀잔을 줍니다. 힐난을 합니다. 비아냥거립니다.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던 내 감정은 그녀로 인해 김이 팍 새게 됩니다. 번번이. 그냥 좀 잠자코 들어주고 동감 해주면 될 것을 꼭 분석하고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덤벼듭니다.
언젠가 한 번은 S가 있는 자리에서 H가 딸 얘기를 했습니다. 딸이 무슨 일을 크게 벌여놓고 혼자 그걸 수습하느라 동분서주하더니 어느 날 힘들어 죽겠다며 엉엉 울더랍니다. 그래서 H가 딸을 나무랐대요. 그럴 줄 모르고 일을 벌였냐고. 일단 벌였으면 죽든 살든 처리를 해야지 울긴 왜 우냐고. 내가 말했습니다. 설마 당신 보고 일 처리 해주길 바라며 울었을까. 그럴 땐 무조건 포근하게 안아주며 많이 지쳤구나. 곧 괜찮아질 거야 하고 토닥거려 주는 게 엄마의 역할 아니야?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게 아니지라고 고개를 흔들면서 S 가 말합니다. 그게 아니지. 그렇게 응석을 받아줘 버릇하면 안돼. 앞으로도 계속 남한테 책임을 전가하면서 투정부리게 하지 않으려면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하게끔 내버려야 둬야 돼. 그래야 독립심이 생기지. 다음날 H 딸이 그러더랍니다. 자기는 그냥 엄마의 따뜻한 위로가 필요했을 뿐이라고.
그렇습니다. 우리가 속상하고 짜증나는 일을 누구에게 털어놓을 때는 판단해 주길 원해서가 아닙니다. 해결을 바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지요. 그저 묵묵히 내 말 들어주고 내 편이 되어주기를 바랄 뿐. 바로 그것 뿐.
요즘 한국에서는 ‘빡침코드’라는 말이 유행한다고 하네요. 어떤 일로 ‘빡쳐’있을 때 이유불문하고 같이 비분강개하고 빡쳐하면서 무조건적으로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을 ‘빡침코드’가 맞는 사람이라고 한대요. 독자 여러분은 빡침코드가 맞는 사람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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