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적으로 하는 자궁암 검사를 위한 병원 예약이 있어  아침 일찍 집을 나서려는데 남편이 같이 가 주겠다면서 따라 나옵니다.  웬만한 데는 다 남편이 데려다 주지만 병원이 집에서  3분 거리라 혼자 가려고  했는데 이게 웬 떡이냐입니다. 극도로 외출을 싫어하지만 내가 손수 운전해  나가는 일은 더더욱 싫어하거든요. 오랜만에  집 밖을 나왔으니 그동안 미루어놨던 볼일을 좀 처리해야할 것 같았습니다. 세탁소에  맡겨놨던 옷을 찾고 은행에 들리고 강아지 간식을 사고. 세탁소랑 은행이랑 펫 스토어가 한 쇼핑몰에  위치해 있기에 한꺼번에 해결이 가능합니다. 진짜 이게 웬 떡이냐입니다.
 
검진을 하는 동안 남편은 차에서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보통 보면  평일 이른 아침에는 병원이 많이 한가하더군요. 아닌 게 아니라  15분만에  끝났어요.  가뿐하고 산뜻한 마음에 콧노래까지 부르며 남편 차에 올랐습니다. 어, 그런데  차가 가는 방향이 다릅니다. 세탁소랑 은행이랑 펫 스토어가 위치한 쇼핑몰의 반대 방향입니다. 나는 빽 소리를 질렀습니다. 세탁소랑 은행이랑 펫 스토어에 들러야 한다고 했는데  그새 잊어버렸냐고. 남편이 말했습니다. 잊어버릴 리가 있나. 대로로 가려고 그러지. 남편 말에 열통이 확 터집니다.  주택가를 가로지르는  작은 길을 택하면  금방일 텐데 대로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 형으로 나있는  길은  10분밖에 안 걸리는데  남편은  ㄷ 형으로 가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삥 돌아서요.  이유는 딱 하나, 주택가 길은 스탑 사인이 여러개 있어서 매번 정차하는 게 싫답니다. 또한  제한 속도  35마일을  지키는 것도 싫대요. 아니, 대로엔 스탑 사인이 없는 대신 신호등이 있잖아요. 그것도 일곱개나 됩니다. 그리고  쇼핑몰로 들어가려면  대로에서 왼쪽으로 턴을 해야 하는데  거기가 아주 악명높습니다. 뱀 꼬리처럼 차는 항상 길게 밀리는데 신호가 잘 안 바뀌기로. 파란불이다  싶으면 몇 초도 안 되어 다시 빨간불이 되는 걸로.  어떤 땐 신호가 세 번 바뀌는 데도 턴을 못할 때도 있어요.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닙니다.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바보 멍청이가 아닌 이상 시간도 더 걸리고 더 복잡하고 더 먼 길을 택하지 않겠지요. 남편은 바보 멍청이가 맞습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오랜만에, 정말이지 오랜만에 나온 외출인데  답답하고 멍청한 화상으로 인해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부아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어요. 당장이라도 차를 돌리라고 소리를 질렀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습니다. 볼일이고 나발이고 그냥 집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어째요.  세탁소는 몰라도 은행과 펫 스토어는 필히 들러야 하는 걸. 미루고 미루었던 일이었거든요. 만약 집으로 돌아가면 언제 또 나올지 기약이 없습니다. 그 정도로 나는 외출을 싫어합니다. 선택권이 없는 나는  조수석에 앉아서 성질난 김에 그동안 쌓아놓았던 울화와 분통을 마구 터트렸습니다. 남편은 지 잘못을 아는지 잠자코 내 푸념을 듣고만 있습니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북북거리고 식식거리면서도 은행에 들러서 볼일을 보고 세탁소에 가서  옷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펫 스토어에 가서 강아지들의 간식을 몇 봉지 샀습니다. 이제 집에 가면 되겠다 했는데 남편이 말없이 차를  또 다른 쪽으로 돌립니다. 펫  스토어 바로  옆에 있는  자동 세차장.  한시라도 빨리 그냥 집으로 갔으면 싶었지만 그것까지 뭐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아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는데 사단이 났습니다. 한창 세차 기계가 돌아가고 있는 중인데 앞의 회색 세단이 갑자기 멈추는가 싶더니 슬슬 백업을 하는 겁니다. 남편이 놀라서 경적을 빵빵 눌렀는데도 앞차는 스르르 미끄러지듯 다가 옵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타고 있는 차의 앞 범퍼를 쾅하고 박았습니다. 나참, 재수가 없으려니 별일이 다 생깁니다. 어떻게  자동 세차장에서 백업할 생각을 할까요.
 
자동 세차 기계는 멈추고 직원이 놀라서 달려 왔지요. 앞차는 뒷쪽이 꽤 움푹 찌그러들었어요. 대형트럭인 우리차는 아무 이상없이 멀쩡하고. 앞차 여자는 중년의 백인이었는데 우리 잘못이라고 입에 거품을 뭅니다. 우리가  세차게 다가가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자기 차 뒷꽁무니를 들이받았다는 겁니다. 직원과 남편이 ‘세차장 기계는 앞차 간격을 일정하게 띄우고  움직이기에 절대로 앞 차를 들이받을 수가 없다’고 누누이 설명해도 듣지 않습니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나서 아무말 않고 그들 셋의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지켜만 보던 내가 마침내 나섰습니다.
 “ 그래? 누가 말이 맞는지 블랙박스를 돌려 보면 되겠네. 마침 우리 차에 블랙박스가 설치되어 있거든. 지금 세차장 사무실에 들어가서 같이 돌려 볼래?”

남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고 직원은 이제 시시비비가 명확하게 가려졌구나 하는 표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여자는 내 말에 움찔했고요. 그러더니 태도가 금방 돌변합니다. 서슬퍼렇던 얼굴에 비굴한 웃음을 띄우면서 말합니다. 아침에 복용한 약으로 인해 머리가 몽롱해서 자기가 잠깐 착각한 것 같다고요. 자기는 괜찮으니 우리는 그냥 가도 된다고.  진즉 그럴 것이지. 괜히 시간만 허비했습니다. 남편과 나는 바람같이 현장을 떠나왔습니다. 남편이 말합니다. 블랙박스 얘기를 꺼내 줘서 고맙다고. 남편은 자기 손으로 블랙박스를 설치해 놓고도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심하게도.
 
집에 돌아오자마자 블랙박스를 컴퓨터에 연결했더니 오늘 아침 우리가 운전해 갔던 길이 화면에 그대로 나와요. 블랙박스를 설치한 것은 알았지만 실제로 틀어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생각보다 화질도 너무너무 선명하고 깨끗합니다. 정말로 신기했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얼른 컴퓨터 앞을 떠났습니다. 차 엔진 소리와 낮게 틀어진 라디오 소리와 함께 녹음 된 내 목소리, 기차화통을 삶아먹은 것 같은 내 목소리때문이었습니다. 정말로 들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민망해서 말입니다. 가까운 동네길을 놔 두고 굳이 삥 돌아서 먼 대로로 가느냐며  남편을 나무라는 내 목소리, 짜증과 울화가 가득찬 내 목소리는 사약을 받아든 장희빈처럼 앙칼지고 표독스러웠습니다. 욕만 안 했다 뿐이지 원수를 대하는 것같은 목소리였습니다.  고백하건대 나는 태어나서 그 누구에게도  그렇게 심하고 독하게 힐난과 비난을 퍼부어 본 적 없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도 같은 일이 있었지요.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 집의 전화기가 고장 났을 때. 전화기를 사러가는 남편에게 내가 신신당부를 했었지요. 걸리고 받고 자동응답기만  작동 잘 되는 것이면 된다. 비행기 조종간처럼 복잡하고 특별하고 어려운 최신식은 비싸기만 하고 잘 쓰지도 않을 뿐더러 고장 또한 잘난다고 하니 부디 심플하고 사용하기 쉬운 걸로 사 와라.
IT전문가에 ‘얼리 어답터’인 남편이 내 말을 들을리 없지요. 내 실력으로는 도저히 익힐 재간이 없어 보이는  온갖 고급 성능의 전화기를 사왔습니다. 메뉴얼을 들여다보면서 이것저것 버튼을 눌러보고 있는 남편의 등 뒤로 온갖 짜증과 신경질을 부린 건 더 할 나위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남편이 버튼 하나를 눌렀는데 자동응답기 재생버튼이었나봅니다. 수위가 올라갈 대로 올라간 내 목소리가 그대로 녹음된 것입니다. 그때 내가 얼마나 자신한테 부끄러웠게요. 남편한테 미안했게요. 그 이후로 굉장히 조심한다고 하는데 그게 마음대로 됩니까. 하는 짓을 보면 그냥 울화통이 터지는데.
 
따지고 보면 가장 가까운 사람은 남편입니다. ‘가깝다’가 ‘편하다’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함부로 대하고 막 대하는 게 사실입니다. 예전에 한 할배는 말했어요. 마누라가 집에서는 항상  목 늘어진 티셔츠에 무릎나온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퍼질러 앉아 큰 양푼에 밥 비벼서 우걱우걱 먹는 모습만 보이다가 외출할 때는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신한다고. 가장 잘 보여야 할 사람도 남편이고 중요하게 생각해야할 사람도 남편인데 도대체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외출할 때만 꽃단장을 하냐고. 나 역시 그렇습니다. 남들한테는 천하의 호인을 자처하면서 정작 가장 잘 해야 할 남편은 무시합니다.

2주마다 한 번씩 5갤런짜리 물이 배달됩니다. 물을 집안으로 들여오는 일은 남편의 몫입니다. 대문에서 집안까지 거리는 얼마 안 되지만 물통이 꽤 무겁다면서 남편이 늘 말했습니다. 코스코에 작은 ‘달리(dolly)’ 있으니 물 운반용으로 사야겠다고. 내가 반대했지요. 자꾸 물건 좀 사들이지 말라고. 죽을 날이 가까운데 대충 아쉬운대로 살자고.

어느날, 남편이 허리를 삐끗했습니다. 할 수없이 달리를 샤야했습니다.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신바람이 나서 코스코로 향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니 눈시울이 뜨끈해지더군요. 만약지인 중 누가 달리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했으면 얼른 내가 먼저 사주었을 겁니다. 그것도 최고급으로.

 
사실, 나는 남편에게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왜냐면 남편이 내게 함부로 안 하기 때문이지요. 여지껏 아무리 내가 잘못하는 일이 있어도 한 번도 나를 비난하거나 지적해 본 일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나를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나는  남편이 없다면 벌써 굶어죽었어야 할 형편입니다.  나는 지금 수입 한푼 없이 전적으로 남편에게 의지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있어서 SSA는  받지 못하고 있고 20년동안 다닌 직장은 거지같은 데라 은퇴연금이 없습니다. 원고료랍시고 받는 돈은 밥 한 번 사면 없어질 정도.  그런데도 나는 큰 소리 땅땅치면서  남편을 잡습니다.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죽는 건 순서가 없다지만 내 먼저 죽으면 남편은 보다 순하고 착하고 고운 여자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난다면 나는 어찌 될까요. 마구 마구 통곡하겠지요. 남편에게 잘못한 데 대한 후회와 회한과 통탄으로 머리를 쥐어 뜯으면서. 땅바닥을  뒹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