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절정이다.  한여름의 더위를 피하느라 워싱턴DC 대도시의 고층건물이 마련해준 그늘진 거리를 걸으면서 남부의 들판을 생각했다.  확 터인 푸른 초원에 듬성듬성 자리잡은 오래된 고목나무의 무성한 잎이 주는 그늘이 그리웠다.  그곳에서 살랑이는 바람에 더위를 잊고 싶었는데 빌딩으로 가려진 거리에도 간혹 바람이 지나가서 좋았다.  지그재그 그늘진 거리를 따라 미술관 방향으로 걸었다.  워싱턴 국립미술관의 동관과 서관의 전시품들은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줘서 며칠을 보내도 지루하지 않았다. 

독립기념일 퍼레이드를 손자와 함께 보고 싶다는 남편의 희망에 따라 딸네 가족과 함께 코네티컷 에브뉴로 일찌감치 갔지만 먼저와 자리잡은 많은 사람들로 거리 양쪽으로 빈틈이 없었다.  레드 불루와 화이트.  세가지 색갈이 아름답게 어울린 옷이나 양산이 손에 든 작은 성조기와 함께 푸른 하늘아래 선명하게 빛났다.  고향은 바로 내가 사는 곳이 아닌가.  여기저기 기웃이며 비집고 들어설 자리를 찾다가 마침 일어나 떠나는 사람이 있어서 그 자리에 손자의 스트롤러를 밀어넣고 어른들은 뒤로 둘러섰다. 

퍼레이드가 시작하길 기다리면서 90도가 넘는 뜨거운 기온에 밀고 밀치며 붐비는 사람들에 조금 지쳤다.  다양한 언어들에 귀가 근질하다가 막상 11시45분에 퍼레이드가 시작되자 활기를 찾았다.  미국의 과거가 슬쩍 지나갔고 현재가 머뭇거리다 역시 지나갔다.  아이폰이 가열되어 식힌 후 다시 사용하라는 문자가 뜬 것도 처음 경험했다.  등으로 흐른 땀에 옷이 끈적했지만 워싱턴DC와 근교 지역 그룹들 사이에 전국 여러 지역에서 와서 참여한 팀들의 자랑스런 묘기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밴드의 연주에 심취했다.  미국의 거창한 생일파티에 다민족도 양념처럼 섞여 단연 미국의 미래를 보여줬다.  열심히 박수치며 좋아하던 2살짜리 손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빨갛게 익은 살구처럼 변해서 엄마에게 치근거렸고 푹푹 찌는 더위에 땀을 줄줄 흘리며 관람하던 남편과 사위의 표정도 손자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즐기는 것이 지치는 것이었다. 

프레이드를 보고 딸과 사위는 점심을 먹은 후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고 남편과 나는 워싱턴 모뉴멘트로 향했다.  발걸음이 흐느적였지만 볼 것은 다 보자고 욕심을 부렸다.  모뉴멘트를 중심으로 넓은 들판 주위로 와이어 담이 처졌고 몇 군데 출입구에서 소지품을 검색했다.  특히 올해는 대통령이 멋진 쇼를 제공한다고 장담한 탓인지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2차대전 기념비를 지나 링컨 기념관으로 향하는 길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사람들의 땀냄새가 더욱 후덥지근하게 하고 걷기가 자유롭지 않아 옆으로 빠져나와 풀밭에 앉아 쉬었다.  구경하려고 억척을 피우는 것이 부질없이 느껴져서 남편에게 그만 돌아가자고 했다.  트럼프의 연설을 듣고 비행 묘기를 보고 싶어했던 남편도 거절하지 않았다.  집으로 가는 길에 비가 와서 우리는 카페에 앉아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불꽃놀이를 걱정했다.

그리고 딸의 친구네에서 열린 독립기념일 축하파티에서 젊은이들의 자유분방한 파티 문화를 맛보고 일본대사관저에서 열린 BBQ 가든파티에서는 동양과 서양문화의 자연스런 접목을 즐겼다.  사실 일본대사관의 업무에 음양으로 도운 사람들을 초대했다는 파티에 초청을 받은 것은 딸이었고 우리는 딸의 치맛자락을 잡고 참석했다.  심플하고 우아한 대사관저의 내부에서 깔끔한 일본인들의 취향을 보고 뒷뜰로 나서니 많은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음악이 뜨겁게 맞아줬다.  수 백명의 손님들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넓은 뜰에 흩어져서 자유로운 교제를 했다.  모든 정치적 이견은 담밖에 머물었고 대사관저 안에는 그저 사람과 사람의 훈훈한 사귐만 물씬했다. 

여럿 마련된 거대한 텐트에서 미국식으로 구운 고기 요리와 일본식 맛있는 음식들이 풍성했고 6인조 밴드가 일본 노래와 미국 노래를 섞어 부르며 흥을 돋우었다.  중간에 주미 일본대사가 직접 마이크를 잡고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 를 열창해서 손님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그는 수수하고 편안하게 손님들 속에 섞였다.  먹을 물린 붓으로 남편의 일본 이름을 크게 적어준 여인은 대사관에 근무하는 직원이었다.  붓글씨를 공부한 지 2년쯤 되었다는 상냥한 여인처럼 대사관 직원들이 요리와 봉사에 나선 행사에서 우리는 일본식 정원의 연못에 사는 물고기처럼 동서남북으로 신나게 다니던 손자의 기쁨을 따르며 즐거운 오후를 보냈다. 

워싱턴DC가 미국 수도로서 보여주는 당당함과 북부 버지니아 마을들에서 개척민들이 남긴 아름다운 흔적을 독립기념일 전후로 맘껏 즐겼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극심하게 분열되어 갈등을 겪은 미국 사회를 위해 안정과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하고 싶었는데 주일 미사 시간에 신부님이 프란시스코 성인의 ‘평화의 기도’ 로 적절하게 귀결시켜 주셔서 감탄했다.  분명 사필귀정이 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