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을 맞을 준비로 집안 청소를 한다.  한 집에 오랫동안 살았던 탓에 집안 구석구석에 물건들이 꽉 차있다.  더러는 사용하지만 대부분 물건들은 그저 외면당하고 잊혀진 것들이다.  우습지만 나에게 물욕이 많았나보다.  하나씩 들추니 전혀 사용하지 않은 새것들이 많고 어떤 것들은 아직 가격표가 그대로 붙어있다.  언젠가 딸들에게 주려고 사용하지 않은 물건이라 상표를 떼지 않았던 것들이 이제는 헌것이 되어서 자선단체에 기부하게 됐다.

그런 물건들을 들어내니 캐비넷 바닥에 얌전히 접힌 국방색 군용 더플백이 보였다.  순간 40년 전의 추억이 나를 사로잡았다.  일손을 멈추고 주저앉아 빳빳한 더플백의 거친 표면을 더듬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텍사스에 있는 공군훈련소에서 신병교육을 받으며 보급받은 이 백은 내 삶의 한 시절을 대표한다.  군복을 포함한 온갖 필수품을 다 집어넣은 긴 원통형 더플백을 어깨에 매고 여러 곳을 이동해 다녔다.  간혹 내 몸무게에 버금가게 무거워서 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기도 했다.  표면에 내 이름과 사회 보장 번호가 하얀 페인트로 영구적으로 새겨져 있는 것을 보니 신원 도용을 상상하지 못했던 시절의 산물이다.  그 당시에는 수표책에 온갖 개인정보를 다 프린트해서 사용했고 타인을 믿었던 안정된 사회였다.  그로부터 참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언젠가부터 슬쩍 쓸모가 없어져 뒷켠으로 밀렸던 더플백이 오랜 세월 캐비넷 바닥에 숨어있다가 이렇게 불쑥 튀어나와 신참 군인으로 힘들었던 과거 기억을 회상시켜줘서 책장에서 기본훈련을 마치고 받은 앨범을 찾아서 편안한 의자에 앉았다.  전국에서 자원해서 입대한 알록달록 무지개 색깔의 자유분방하던 40명의 젊은 여자들이 훈련부대에 도착한 후 한 그룹으로 45일 동안 집단 생활하며 일사불란한 군인으로 변한 과정이 사진으로 남아있다. 

우리는 줄을 서서 부대안 여기 저기 사무실을 다니며 신분증을 만들고 군복을 배급 받았고 신체검사와 예방주사를 맞았고 강당같은 넓은 공간에 1인용 침대들이 쭉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된 숙소의 청소와 공공시설 관리법을 배웠다.  엄격한 훈련관들이 가르친 군법과 공군의 의무와 책임을 스폰지로 흡수하고 개인이 아니라 단체로 같은 생각과 같은 행동을 하도록 철저한 정신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제멋대로 걷던 보폭을 다른 신병들과 보조를 맞춰서 질서정연하게 행진하도록 참으로 끈질긴 신체 훈련도 받았다. 

진땀을 흘리게 하던 많은 검열과 훈련을 거쳐서 청바지 대신 군복에 몸이 익숙해졌고 각자의 톡톡 튀던 모난 개성이 다듬어져서 서로 의존하며 임무를 수행할 군인으로 변신했다.  훈련을 견디지 못해서 탈락한 동료들도 있었지만 모든 힘든 일정을 함께 견뎌낸 동료들이 환하게 웃는 사진에 그리움이 왈칵 솟아올랐다.  심신이 힘겨웠던 훈련조차 이제는 아름다운 추억이다.

훈련소 졸업 후 각자 선택한 업종 교육을 받기 위해 전국 각처의 부대로 헤어졌다.  그리고 내가 22년 반을 군인으로 부대를 옮겨 다니며 그때 신병교육을 함께 받은 동료를 찾았지만 한번도 만난 적이 없도록 우리는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서 근무했다.  더불어 각 근무지에서 사귄 동료들과도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했지만 다시 만난 동료들이 별로 없다. 

퇴직한 후 여행 다니며 부대가 있는 지역을 지나가면 꼭 들러 본다.  육해공군 어느 부대이든지 일단 들어서면 왠지 마음이 푸근하다.  내가 아니라 우리를 느낀다.  특히 내가 근무했던 부대를 방문하면 마치 고향을 찾은듯 향수에 젖는다.  낯익은 건물과 거리에서 친근한 옛 동료들이 불쑥 나타날 것같은 착각에 빠진다.  올 봄에 독일에 가서 였다.  위풍당당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미 유럽사령부 건물 앞에 섰다.  오래전 내가 근무할 적과 별로 달라지지 않은 환경에 현재의 나를 세운 것이 조금 우스꽝스러웠다.  잿빛 건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익숙하게 드나들었던 문을 열고 들어 서자마자 정지 당했다.  보초를 서고 있던 군인이 출입을 금지시켰다.  35년의 세월이 멈춘 기쁨은 불과 35초도 걸리지 않았다. 

훈련소 졸업앨범은 책장에 꽂고 사회 보장 번호를 공공연히 광고한 군용 더플백은 잡고 잠시 머뭇거렸다.  자선단체에 기부할 수 없고 그렇다고 가위로 잘라서 버리기 싫어서 다시 캐비넷 바닥에 잠을 재운다.  훗날 내 젊은 날의 엉뚱하다 싶지만 용감했던 결정과 그로 인해서 세상 구경을 많이 하면서 만든 아름다운 추억을 다시 회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