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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딕시의 남부생활

아듀 아픈 추억과 2020 Young Gray (madamdixie) 2020-12-28  18:44:00


 

 

크리스마스 장식품을 내리려고 다락에 올라갔다.  여기저기 쌓인 박스들이 많아서 일단 모두 정리하려고 가지고 내려와 하나씩 열어보니 별별 것들이 많다.  예전에 아이들이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과 인형에 책도 많고 부엌 용기나 이런저런 잡동사니들이 차곡차곡 많이 박스에 담겨 있었다.  더러는 기억이 났고 대부분은 기억에서 사라진 물건들이다.

 

많은 물건들 중에 한 박스의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얼룩진 낡은 베개를 봤다.  순간 가슴이 꽉 막히고 모든 감각이 멈췄다.  언젠가 버린 줄 알았는데 이것이 어떻게 다락에 있었는지 순식간에 나는 근 45년 전 힘들었던 이민생활이 생각났다.  영어를 못하고 풍습도 이해하지 못하던 그때는 사전을 들고 다니며 공부해도 도무지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내 것이 되지 않아 무척 고달팠다


낯설고 물선 이국땅에 쉽게 적응 못해서 서러웠다.  영어를 쓰고 읽을 수는 있었지만 인사말 밖에 못해서 작은 노트를 갖고 다니며 단어 몇으로 대화를 하니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당시 외국인에게 영어를 가르쳐주는 ESL프로그램이 활성화되지 않아서 무조건 부딪혀야 했다.  한 친절한 교수의 배려로 그가 가르치던 과목을 청강하다가 활발하게 토론하던 학생들에 기가 죽었고 교수의 가르침을 따르지 못하는 나 자신이 슬퍼서 내 20대 젊은 열정은 강의실 한쪽에서 시름시름 앓았다.  마침 종교과목이라 처음으로 영어로 성경을 읽은 멋진 수확은 있었다

 

낮에는 견디다가 밤이 되면 외로움과 두려움에 떨면서 잠을 못 자고 펑펑 울었다.  모국이 그립고 친구가 보고 싶어 밤하늘을 보던 시절,  그 힘겨웠던 날들 내가 머리를 기대고 쉬었던 배게는 밤마다 눈물로 젖었다.  커버를 바꿀 적마다 세계지도를 닮아가는 얼룩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한번 해보자는 오기가 생겼다.  매일 그날 이해하지 못한 단어 30개를 외우고 잠을 잤다.  그것이 습관이 되었지만 내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세월이 약이라고 실수를 밥 먹듯이 하며 덤벙대니 조금씩 대화가 가능했다.  그리고 그땐 젊었다나의 성향과 전혀 반대인 공군에 입대할 엉뚱한 용기를 냈고 그 덕분에 사회에 적응하는 속도가 붙어서 이민생활에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지나간 일은 잊혀진다.

 

내 젊은 날의 눈물과 아픈 고백을 다 안으로 품고 나의 역경을 묵묵하게 받아준 베개는 내 과거의 한 챕터다.  배게를 새것으로 바꾸었을 적에 얼룩이 심한 헌것은 버리지않고 옷장에 간직했다.  언젠가 어린 딸이 추하고 더럽다고 했을 적에도 버리지 않았고 이사를 다녀도 꼭 챙겼다.  그러다 언제 옷장에서 다락으로 올려보낸 것이 생각나지 않듯이 또 그렇게 내 의식에서 완전히 밀어냈다.  낡은 베개를 한쪽에 두고 며칠 과거로의 여행을 했다.  그때 나에게 힘들고 괴로웠던 일들이 희미한 기억이다.  아무것도 분명하지 않으니 그립거나 아쉬운 일도 없는 모두 부질없는 일이다

 

과거의 배게는 코로나바이러스로 변한 환경인 내 작은 우주가 답답해서 최근에 나들이 했던 미술관에서의 체험과 닮았다.  방문객이 거의 없던 미술관 내부는 휑한 기운이 가라앉아서 전시품들이 썰렁했고 내 발자국 소리도 유난히 요란했다

 

전에는 미술관 작은 방 한쪽에 멈춘 초상화와 숨바꼭질을 했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뚫어보던 사람을 만나고 호흡을 고르던 순간이 있었다.  오랜 세월을 뛰어넘고 나를 사로잡은 사람은 만날 적마다 표정이 달랐다.  나의 기분 탓이거나 날씨 탓이라 여겼지 그림에 감정이 있으리라고는 미쳐 생각하지 못했지만 신기했다.  무심하게 눈길 주지 않을 적도 있고 가끔은 많은 이야기를 하며 그의 사연을 슬쩍 들려줬다.  다시 찾아가서 그 앞에 서도 여전히 그는 묘한 표정으로 나와 마주했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액자 속의 얼굴은 냉정했다.  보고 다시 봐도 교감이 없었다.  동시에 미술관 내부의 시간도 멈춰서 단절감을 줬다.  밖의 변화가 안으로 들어왔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해서 길을 만든 내 인생이다.  살면서 인연을 맺을 때와 끊을 때를 많이 연습했다.  이제 이상했던 한해가 떠나는 길에 베개도 동행시켜 아쉬움없이 과거로 떠나보낸다.  아듀 아픈 추억과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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