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초 오랜만에 한국에 사는 시인에게 편지를 쓰려고 온라인으로 그의 근황을 알아보다 깜짝 놀랐다.  벌써 2년 전에 그가 하늘의 별이 되었다는 뉴스에 힘이 죽 빠졌다.  태평양 멀리 모국에 사는 지인들이 눈에서 멀어지더니 마음에서도 멀어졌던 탓이다. 

내가 대전여중에서 안양여중으로 전학을 간 14살때쯤 우연한 기회에 그곳에서 직장여인들과 여고생 몇으로 형성된 여성문학회에 극성을 피워서 멤버가 됐다.  어려서부터 책 읽는 것은 좋아했지만 글을 쓸 줄은 몰랐다.  언니들은 나를 막내라고 귀엽게 봐주고 나의 엉성한 습작에 웃지않고 용기를 부어줬다.  창조의 매력에 사로잡혀 뭐든 내가 느끼는 것을 끄적거리곤 했다. 

회원들이 진지하게 인생과 문학을 토론하는 것을 들으면서 내 의식이 조금씩 깨어났다.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이 내 가슴과 머리에 들어앉았고 난 또래들보다 성숙한 관념을 가지게 됐다.  마침 그 지역의 시인 김대규선생이 문학회를 지도해줘서 우리의 활동은 활활 타올랐다.  그때 어린 나에게 문학세계의 문을 열어준 언니들과 선생님의 안내로 그들이 소개한 책을 미친듯이 읽고 의견을 나누면서 열정의 불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체험했다.  암튼 꿈을 많이 꾸었고 현실보다 이상을 추구했던 황홀한 시절이었다.  그렇게 읽고 쓰는데 집중하느라 고등학교 입시 공부는 뒷켠에 밀었다. 

서울로 고등학교를 다니며 문학회 모임에 뜸하게 참여하다가 그만 두었지만 나의 감성에 막강한 영향을 준 언니들과 김대규 시인은 쉽게 잊지 못했다.  대학졸업 후 미국으로 떠나온 후에도 해마다 연말에 선생님께 안부편지를 보냈다.  그의 회신을 받을 적마다 잠시 사춘기 소녀로 돌아가 행복했다.  “인생이라는 것, 시련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언젠가는 만날 시간이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  나도 같은 기대감을 가졌다. 

한번은 IMF로 한국의 사정이 힘들었을 적에 그는  “한 세대, 30년을 훌쩍 넘긴 지난 날들,  그 아련한 추억은 누구에게나 가장 소중한 자산이겠지만,  현실은 추억을 더듬는 여유를 매정하게 앗아가곤 합니다.” 했다.  쉬운 언어로 사랑의 정체를 간결하게 다듬던 시인도 세파의 변화와 세월의 흐름에 흔들렸다.  그러나 오죽 시 쓰는 일만 하고 살던 그가 안양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장남의 결혼과 두 딸이 직장인으로 대학생으로 성장한 것을 자랑하던 행복한 아버지였다. 

평생을 태어난 집에서 살며 고향을 지키던 그는 떠돌아 살던 나의 주소가 자주 바뀌는 것을 재미있어 했다.  솔직히 뿌리를 잃은 나를 안스러워 했다.  그의 시 ‘엽서’는 내가 잠시 살았던 소도시, 김대규시인이 끔찍이 사랑하던 안양의 얼굴이다.  ‘나의 고향은/ 급행열차가 서지 않는 곳/ 친구야/ 놀러 오려거든/ 삼등객차를/ 타고 오렴.’  이 짧은 시는 6-70년대 파격적인 정서였고 나도 자주 인용하며 즐긴 작품이다. 

언젠가 한국 들렀을 적에 술병을 들고 그를 찾아갔다.  중년의 여인인 나를 보고 놀라던 그의 표정이 생각난다.  그의 기억창고에는 단발머리 맹랑한 중학생만 있었다.  그러다 아마 10년 전이었던 것 같다.  나이가 드니 기억이 흐릿해서 나에 대해서 생각나는 것은  “그저 눈이 동그랬다는 것 하나 뿐” 이라고 하셨다.  나는 그에게서 슬그머니 잊혀진 사람이 된 사실에 한동안 슬퍼했다.  

한국 방문하면 서점에 들러서 그의 신간을 구해왔다.  그의 흙의 사상 연작시들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나의 안목이 정리되었고 사랑의 노래를 읽으면서 베르테르의 사랑을 들었다.  흙의 시법,  사랑의 팡세 시리즈와 작은 사랑의 노래,  어머니, 오 나의 어머니,  하느님의 출석부 등 그의 책들을 책장에서 꺼냈다.  그 중에서 그가 평소 가장 좋아하던 스탕달의 묘비명을 따서 30년 문학생활을 정리한 책의 이름으로 발간한 수필집,  ‘살고 쓰고 사랑했다’ 를 다시 읽는다.  이 책이 발간된 지도 벌써 30년이 되었고 그는 이 세상에 없으니 무서운 세월이다.  백세시대라 하는데 76세에 서둘러 세상을 떠난 그는 요즘 하늘의 흙을 사랑하는 건가. 

평생 살고 쓰고 사랑했던 김대규시인은 그의 시 ‘영원한 고향’의 마지막 구절  ‘…그렇지,/ 내 이름 불리우면 갈 곳이 있지./ 거기가/ 내 영원한 고향이지.’ 로 내 마음에 평안을 준다.  이제 내가 사춘기에 존경한 김대규시인과 마치 이별의 의식을 치르듯 나는 그의 시를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