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친구야, 

올해 단풍이 작년보다 밝고 선명해도 아직 여름의 끝자락을 잡고 주춤거리는 나에게 너는 깊은 가을을 안겨줬어.  네가 보낸 한 편의 시가 그러잖아도 어수선한 내 마음에 확연히 인생의 변화를 일깨워 주는구나.  아직도 시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릴 수 있음에 감사해.  오늘은 너가 더욱 보고싶다.

가을은 어떤 얼굴을 가졌을까?  풍성하고 서러운 계절 가을과 마주하고 싶었던 젊은 시절이 생각나.  설악산,  오대산,  지리산,  내장산 등 단풍이 멋진 전국 곳곳의 명소를 찾아서 화사한 계절의 절정에 취하고 감탄했던 기억은 오래전에 마른 잎이 되어 내 안에서 부서졌어. 

그리고 설악산 입구에 있던 팻말에  ‘남기는 것은 발자국, 가져가는 것은 추억’  문구의 여운도 내 속에서 자리를 잃었어.  그 말은 세상 어느 곳에서나 멋진 대자연을 보면 늘 고향과 함께 떠올랐는데 언제부턴가 그 말의 의미가 별 감흥을 주지 않았어.  아마 내가 다니며 남긴 것이 발자국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 후부터 였을거야.  

더불어 덕수궁 담벽을 따라 화사하게 세상을 밝히던 단풍에 반했다가 가까이 있던 소극장에서 본 연극조차 사람을 제압하는 자연의 위력이었다고 감동했던 대학시절,  사랑과 인생을 논하며 방황하던 시절,  우리는 무엇을 그렇게 찾아다녔을까?  얻은 것이 분명하지 않았으니 잃은 것도 분명하지 않았던 젊은 날의 가을은 크게 서럽지 않았잖아.  그때 우린 젊었고 우매했고 용감했어.  릴케를 읽고 구르몽을 읽으면서 다분히 감상적이 되어서 화사하게 물든 계절을 찬양했거든. 

그동안 살면서 여러 나라 여러 지역의 가을을 맛보면서,  떨어져 뒹굴던 낙엽을 밟으면서 내가 얻은 것은 삶에 대한 끈질긴 애착이었고 다가오는 겨울에 대한 두려움이었어.  더불어 바르르 떨다가 바람에 밀려 떨어지던 낙엽에 가진 애틋함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연민이었고. 

사는 것이 늘 희망을 주는 봄일 수는 없잖아.  여름의 위대함을 겪고서야 비로소 수확의 계절에 내려놓는 연습을 하는거지.  암튼 내려놓는 연습을 하면 내 마음은 곧 떠나야함을 알기에 변덕스럽게 희비가 오락가락 뒤척거려.  그러나 젊어서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삶에 대한 목마른 갈증을 지나가는 세월이 축축히 적셔주어 좋더라.  많이 현명해진거야.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통속하지 않았고 절대로 가볍지 않았어.  때로는 치열했고 때로는 평안했던,  열심히 산 그 모든 순간들이 진지한 기도였어.  덕분에 이제는 나이에 걸맞는 삶의 변화에 순종하며 잘 적응하고 노을 한 자락을 잡는 여유를 부리잖아. 

박목월 시인의  ‘이별의 노래’ 가 이번에 우리의 노래가 됐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가슴을 꽉 채우는 상실의 아픔이 곧 우리에게 찾아오겠지?  현재의 우리에게 잘 어울리는 시야.  앞으로 가는 길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을 안다는 것이니까.  

참 노스캐롤라이나 애슈빌의 공동묘지에서 오 헨리의 비석앞에 섰던 적이 생각나.  그가 남긴 작품을 따라가 그를 만났지만 정작 그의 안식처는 조촐하고 별로 눈에 뜨이지 않는 평범한 묘소였어.  내 사춘기에 그의  ‘크리스마스 선물’ 에서 진실로 숭고한 사랑을 하는 법을 배웠거든.  그리고 그의  ‘마지막 잎새’ 는 내가 힘겨웠을 적에 필요했던 잎새였어.  그러니 그는 내가 만나고 싶은 작가 중의 한사람 이었어.  어쩌면 나는 지금 내 마음에서 두려움을 내려놓고 있는가봐.

사랑하는 친구야,  우리 처연하고 쓸쓸함을 쏟아내는 가을을 슬퍼하지 말고 가을바람을 맞자.  그리고 지금처럼 당당하게 살면서 다가오는 겨울을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