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오월에 있는 ‘어머니날’의 축하를 나는 4월 중순부터 고무줄 늘리듯이 길게 늘려서 맘껏 즐겼다.

세금신고를 끝내자 일주일 입을 옷을 가방에 챙겼다. 텍사스의 블루보넷 들판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남편의 등을 밀어서 자동차 여행을 나섰다. 가는 길에 미시시피에 들러서 동생들과 좋은 해후를 하고 하룻밤을 보냈다. 서부로 떠날 마음으로 들떴다가 아침에 일어난 남편이 먼 거리를 들먹이며 자신만 아니라 내가 운전하는 것도 불안해서 싫다며 기운을 뺐다. 작년 여름에6천마일 자동차 여행을 했던 일은 까마득한 과거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남편의 기분을 맞춰서 서부행은 포기하고 남편이 좋아하는 플로리다 바닷가로 방향을 돌렸다. ‘꿩보다 닭’이지만 나도 바다를 좋아하니 마음을 편하게 가졌다. 

잔잔하게 출렁이는 파도가 부드럽게 의식을 풀어 주는 한적한 해변을 찾으니 가슴이 환하게 열렸다. 순간을 건너뛴 영원한 흐름이 있었다. 이해인수녀님의 시, ‘파도의 말’을 낭송했다. ‘울고 싶어도/ 못 우는 너를 위해/내가 대신 울어줄게/ 마음놓고 울어줄게/ 오랜 나날/ 네가 그토록/ 사랑하고 사랑받은/ 모든 기억들/ 행복했던 순간들/ 푸르게 푸르게/내가 대신 노래해줄게/ 일상이 메마르고/ 무디어질 땐/ 새로움의 포말로/ 무작정 달려올게’ 그러자 바다는 마술사가 되어서 내가 보고 싶었던 블루보넷 들판을 물결에 태워서 데려왔다. 

지난 주말은 나만의 여행을 했다. “어머니날을 기념해서 나에게 주는 선물” 하니 남편도 반대하지 못했다. 조지아와 주 경계에 있는 1,200 에이커의 성지는 마음의 고향이다. 가끔 들러서 향수를 달래고 영육을 살찌우는 곳이다.성지를 관리하는 몇 수녀님은 그림자도 거두시고 나에게 온전한 자유를 주셨다. 지난달 100주년을 맞은 성지의 정원은 봉사자들이 깨끗하게 다듬어 산뜻했다. 고요한 성지에서 새소리와 동반해서 숲길을 다닐 적에 혼자라도 두렵거나 외롭지 않았다. 신록으로 가득한 오솔길과 들판의 야생꽃에 온갖 수다를 다 퍼낸 자리는 심신에 스며든 자연의 향기가 채웠다. 성지가 준 축복에 가슴 벅찼다. 

창문의 커튼을 열어놓고 칠흑같은 어둠을 오롯이 지켜보며 내 삶의 여정을 더듬었다. 대구에서 태어난 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체험한 아름다운 추억들이 하늘로 올라가서 별처럼 반짝였다. 수 많은 별들과 수 많은 추억들을 내 가슴에 담다가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내가 묵은 방을 향한 쪽문을 누군가가 닫아 줬다. 어느 수녀님이 덮어 주신 이불 같아서 마음이 푸근했다.다시 물병을 들고 숲을 찾았다. 어스름하던 새벽 안개가 빠르게 걷히며 세상이 밝아졌다.한낮의 햇살과 다른 아침 햇살의 부드러움에 나를 온전히 맡겼다. 

새벽에 함께 이웃을 걷는 워킹 파트너가 있다. 지난 1년 반, 신선한 공기로 다가와 나에게 활력을 주는 젊은 여자다. 우리는 한국계 이민자라 자연히 한국과 미국의 정세나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나눈다. 특히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나를 만나는 그녀 덕분에 나도 경건하게 하루를 시작한다. 평소에 밝고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가진 그녀를 좋아하는데 그녀가 한국의 어버이날을 기념해서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정성드려 만든 한국 반찬들이 가득 차려진 테이블에 마주앉은 남편과 키득 웃음을 흘렸다. 그야말로 진수성찬을 받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주는 행복 바이러스를 가진 그녀의 따스한 정을 느꼈다. 먼 곳에 사는 딸들 보다 이런 이웃사촌이 좋았다.

며칠 전에 남편에게 어머니날 카드이니 사용하라며 큰 봉투를 줬다. 기금모금의 기회를 어찌 놓치나. “당신은 내 엄마가 아니야” 하며 눈을 흘기던 남편에게 나의 교육재단을 선전했다. 성인이라도 여전히 여린 감성을 가진 딸들의 마음과 선물을 받고 행복했다.직접 꽃다발 그림을 그려서 보낸 딸과 손자의 사진을 520조각 퍼즐로 만들어 보낸 딸에 못지않게 남편도 큰돈을 봉투에 넣어줬다. 모두에게 감사하며 즉시 퍼즐 박스를 열고 맞추며 가장 기쁜 시간을 보냈다.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찾아온 아이는 내 삶의 보너스이며 나를 행복한 어머니에서 행복한 할머니로 승진시켜줬다. 하지만 정작 어머니날은 남편이 준 카네이션을 보며 하루 종일 세상을 떠난 내 어머니를 그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