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 뜨겁게 키스한 과일을 따러 농장에 갔다. 하늘의 청명한 푸름이 농장의 푸름과 어울려 산뜻했다. 우뚝 키가 큰 노랗고 보라색 야생의 꽃들이 포도나무와 뒤엉켜서 꽃은 과일이 되고 과일은 꽃이 됐다. 잘 조화된 자연의 화음이 가을의 정취를 한껏 발산한다.

주렁주렁 매달려 반짝이는 머스커딘은 완전 유혹이다. 남부 더운 기온에서 자라는 머스커딘은 알갱이가 크다. 그리고 포도송이로 열리지 않고 몇 알갱이가 가까이 뭉쳐서 빛을 뿜고 탐스럽다. 가까이 다가가 포도 향기를 맡으며 찬란하게 빛나는 구릿빛 알갱이 큰 것을 따서 입에 넣었다. 입안에 달콤함이 환하게 번지며 짜릿한 기쁨을 줬다. 여러 품종 중에 특히 22퍼센트의 당분을 가진 Darlene은 완전 꿀맛이다. 신기한 것은 태양에 노출된 알갱이가 잎에 가려진 알갱이 보다 달콤함이 더 강했다. 한 부모가 출산한 아이들의 성격이 제각각 이듯이 한 나무에 열린 열매들도 당의 농도가 다른 것은 자연의 섭리다.

가게에 가면 살 수 있는데 왜 구태여 덥고 벌레 많은 들판에 나서느냐고 불평하며 따라온 남편이 농장 입구의 벤치에 앉아서 기다리는 바람에 1갤런짜리 플라스틱 바스켓을 둘밖에 채우지 못했다. 농장에서 직접 과일을 수확하는 기쁨을 즐기는 나의 여유를 남편과 함께 나누지 못함이 아쉬웠다. 욕심이 나서 이틀 후 지인과 다시 농장을 찾아갔다. 살짝 다가왔다 사라지는 풀벌레처럼 나도 포도밭 고랑을 따라 가볍게 나무를 옮겨 다니며 달콤한 알갱이를 하나씩 따서 통에 담았다. 탱탱한 포도 알갱이 하나 하나를 딸 적마다 과일을 키운 농장주인에게 감사했고 또 내가 딴 과일을 맛있게 즐길 가족과 지인들 떠올리니 즐거워서 이번에는 플라스틱 바스켓을 넷이나 수북하게 채웠다.

머스커딘을 배달하느라 몇 집 들리다 거동이 불편하다는 노인의 집을 찾아갔다. 집안에 들어서 그녀를 만나자 나의 의식이 화들짝 깨었다. 불쑥 찾아간 나를 반가이 맞아준 여인은 가벼운 화장과 흐트러짐 없이 잘 손질된 머리에 교회에 가는 옷차림이었다. 92세라는 나이는 진정 숫자에 불과했다. 평소 집안에서 그렇게 단정하게 가꾸고 지내는 노인을 보니 기분이 야릇했다. 생전에 어머니는 교회 가실 적에는 정장을 하셨지만 집안에서는 질감이나 디자인이 편안한 옷을 선호하셨다. 그녀도 그러려니 했던 사전에 가졌던 관념이 민망했다.

나이가 옷을 입는다고 그 어머니의 딸인 나도 집에서는 화장기 없이 무조건 편하고 가벼운 옷을 걸치고 산다. 그러나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발산하는 92세 노인을 보니 나이를 떠나서 옷은 날개이고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가꾸어야 마음가짐을 바르게 잡을 것 같다. 집안에서 풀어져 흐느적이는 나의 생활태도를 바꿔서 외출할 적에 타인을 의식하듯이 나 자신을 의식하며 사는 자세를 갖자고 다짐한다. 방마다 다니며 옷들이 빼곡히 걸려있는 벽장문을 하나씩 열었다.

나에게 충동을 준 노인처럼 꾸미고 사는 일이 쉽지 않다. 벽장에 얌전히 걸려 있던 날개였던 화사한 옷들이 신선도를 잃었다. 더불어 내 눈빛을 기다리다 지쳐서 힘이 빠졌는지 사이즈가 줄은 옷들이 많다. 이것 저것 골라서 입어 보다가 나까지 기운이 빠졌다. 매력 없는 옷들은 이제 눈에 들지 않고 편안하게 입었던 옷들조차 더 이상 편안하지 않았다. 꽉 끼여 불편한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는 고역을 중단하고 머스커딘을 한 접시 들고 테이블에 앉았다.

먼 곳에서 친구가 전화해서 “지금 뭐하니?” 물었다. “런던 시가지를 헤매고 있어.” 했더니 언제 영국 갔느냐? 며 놀라는 바람에 키득 웃음이 나왔다. 테이블에 늘어놓은 1,000 피스로 나누어진 퍼즐이 눈앞에서 춤을 췄다. 런던의 시가지가 푸른 템즈 강을 빼고는 온통 초록색인 지도이다. 중심지 궁전에 연결된 도로를 찾고 박물관의 위치를 확인하니 낯익은 거리의 이름에 고풍스런 건축물이 떠오른다. 언제가나 늘 변함없는 런던의 정경이 그립다. 작은 도로의 이름을 찾아 헤매다가 예전에 걷다가 다리가 아파 쉬었던 공원에서 눈을 쉬며 머스커딘을 먹는다.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는데 감칠맛 있는 머스커딘이 에너지를 준다. 자 이제 웨스트민스터 다리를 건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