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분위기는 사회분위기의 축소판이다. 좌우로 갈라진 정치성향으로 남편과 서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고 받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 사이의 골이 점점 깊게 파여서 이제는 집안에서 함께 테이블에 앉는 것도 피한다. 긴 침묵과 따로 놀이가 일상화 되도록 어쩌다 이렇게 서로의 견해가 달라졌는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일본에서 목격한 한 집에서 따로 사는 지인 부부가 우리의 사연이 될까 겁난다.

거의 반세기 전에 결혼한 그들은 벌써 20여년 제각기 산다. 그렇다고 개방 결혼은 아니다. 외부인들과 자식들에게는 화목한 부부로 나서지만 각자 생활은 철저히 혼자다. 미국이라면 벌써 이혼했을 터지만 일본의 보수적인 사회에서 그들 나름의 인품을 지키려는 노력이다. 예전에 일본을 방문해서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허심탄회하게 서로의 입장을 나눴다. 아무튼 혼자서 사개월간 세계일주 크루즈 여행을 다녀온 남편의 대단한 뱃심을 무덤덤하게 볼 수 있도록 아내도 야무지게 자신의 삶을 산다.

공화당 대통령이 일을 잘하니 그를 돕도록 화요일 선거에서 공화당 상원 후보를 지지해야 한다며 나를 들볶았던 남편은 막상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자 곱지않은 눈길로 나를 봤다. 냉랭한 남편의 표정을 보다가 불쑥 도쿄에서 태풍으로 폭우가 내리던 날, 호텔방에 발이 묶였던 아침에 본 영화가 생각났다.

인터넷 넷플릭스 사이트에서 ‘My Love, Don’t Cross That River’ 제목에 혹해서 봤다.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로 시골 마을에 소박하게 사는 노부부의 사랑과 삶 이야기다. 인생 그림의 주인공은 14세에 결혼한 남편과 76년을 해후한 89세의 할머니와 이제 98세인 할아버지다. 살며 사랑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삶의 의미가 된 두 사람은 철따라 알콩달콩 구수한 맛과 멋을 풍기며 살았다. 그들은 힘겹게 살아온 세월이 깊게 패인 주름살이 되었어도 천진난만한 아이의 순수함을 지켰다. 꽃동산에서 꽃을 따거나 개울에서 물장구치고 마당에 흩어진 낙엽이나 눈으로 싸우며 서로를 향한 따스한 눈길에는 희로애락 온갖 감정이 녹아 있었다. 푸근한 그들의 표정을 보며 내 가슴에 잔잔한 시냇물이 흘렀다. 잊어버린 내 고향의 추억이 물길 따라 흘러왔고 세상을 떠난 조상들의 따스한 미소가 내 얼굴에 옮겨왔다.

할아버지의 노래에 덩실덩실 춤추던 할머니는 멋졌고 고운 커플 한복을 입고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 역시 세상 어느 미술관에 걸린 그림보다 감동을 줬다. 12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그 반인 6 아이를 전쟁과 홍역 등으로 일찍 잃은 아픔에 가게에 들러 그 아이들을 위한 예쁜 내복을 고르는 할머니의 아픈 눈길을 피했다. 예전에 못 사 입힌 것이 한이 되어서 누군가 먼저 이 세상을 떠나 아이들을 만나면 입혀주려는 애틋함에 콧등이 시큰했다.

슬그머니 찾아온 노환과 변화에 적응하는 노부부의 모습이 따끔한 인식을 줬다. 이별과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임이 억울했다. 할머니의 아픈 무릎을 주물러주는 할아버지와 숨이 가쁜 할아버지를 정성껏 돌보는 할머니. 옆에 잠든 할머니의 얼굴을 만지고 안심하는 할아버지. 손을 잡고 잠자는 노부부의 모습. 흐르는 물에 떠나간 세월을 회상하고 우산 쓰고 혼자 강변에 선 할머니의 외로운 모습에 이어서 하얀 눈 덮인 할아버지의 산소 앞에서 먼저 죽은 아이들의 내복을 태우는 할머니. 산소를 떠나기가 힘들어 계속 뒤돌아 보다가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는 할머니의 모습에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의 구절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믿고 내 눈물을 닦았다.

언젠가 이곳에 교육받으러 온 한국 공군장교의 부인이 그녀의 남편을 “이 인간”이라 불러 나를 경악시켰는데 존댓말을 사용하던 노부부의 아름다운 인생스토리는 서로 사랑하며 존중하겠다는 결혼선서를 지킨 것이라 신선했다. 노부부가 참 잘 살았다는 확신이 있고 남편과 함께 눈을 맞추지 못하는 순간마다 그 노부부의 정겨운 모습이 부럽다. 나의 운명은 아름다운 동행이 아니라 끝없는 갈등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