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초 아래 이빨이 둘 난 손주 보러 워싱턴DC를 찾아와서 집안에 갇혔다. 한자리 숫자로 내려간 강추위가 겁을 줘서 생각만해도 전신이 떨렸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딸네 지역에 정전사태가 발생했다. 그것도 가장 춥다는 금요일에 일어나서 히터가 작동하지 않아 비상사태가 됐다. 은근히 집안으로 스며든 추위가 빠르게 실내를 냉기로 채웠다. 내복에 두터운 겉옷까지 잔뜩 껴입고 목도리까지 둘러도 추웠다. 그나마 이집이 가스렌지를 가져서 음식을 해먹을 수 있는 상황에 감사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이틀째 강추위와 정전사태가 계속되니 불편한 점이 많다. 그러나 바로 집 근처에서 새벽부터 밤 늦도록 추위를 무릅쓰고 공사하는 전기회사 사람들을 보면서 불평을 못한다. 이번에 일 년치 차를 다 마신다며 투덜대는 남편은 뜨거운 찻잔을 잡고 정전사태로 인터넷도 안되어 짜증스럽다며 “예전에 어떻게 살았지?” 한다. 전기와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남부에 오래 산 우리 부부는 추위를 잘 타서 겨울에는 절대로 북부여행을 하지 않았다. 딸이 대학을 다니던 보스턴도 봄과 가을에만 찾아갔다. 그런데 딸이 미네소타 남자와 결혼한 바람에 겨울에 북부를 찾는 기회가 더러 생겼다. 더구나 손자가 태어난 후부터 우리는 계절에 상관없이 마음 내키면 워싱턴DC를 찾아 왔는데 이번에는 엄청난 추위와 정전사태 복병의 공격을 받는다.

이 기록적인 한파를 견디려고 수시로 뜨거운 수프와 차로 몸을 데운다. 찬 기운이 넘실거리는 창가를 피해 안쪽의 의자에 앉고 밖과 안 사이에 벽이 있음에 감사한다. 추위에 떨다 보니 생활이 정상이 아니다. 대화가 끊어지도록 생각이 짧아진다. 반바지 차림에 반팔 티셔츠를 입고 멀쩡한 사위가 마치 남의 나라 사람같이 낯설다. 환경에 적응된 습관이 무섭지만 아이에게 가벼운 옷을 입히는 딸과 사위의 뜻을 따르지않고 겉옷을 입혀주며 감기 걸릴까 걱정한다.    

싸늘한 하루가 길게 늘어진 상황에 적응하고 견디려고 노력하지만 방안이 별로 없다. 겨울 정경의 아름다움을 떠올리거나 가까운 박물관 미술관의 정보를 뒤적여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오늘은 그래도 전기 상황이 반쯤 회복되어서 어제보다 견딜만하다. 하지만 도저히 못 참겠다던 남편은 가까이 있는 피트니스 센터에 사우나 한다고 떠났고 외출은 엄두도 내지못한 나는 집안에 꽁꽁 숨어 차를 너무 많이 마셔서 기분이 붕붕 떠올랐다.

한국에서 성장할 적에 겪은 겨울 추위의 기억이 가물거린다. 어릴 적 들판에서 스케이트를 탄 상쾌함을 떠올리려 애쓰니 극심한 추위로 손등이 갈라져 터졌던 기억이 따라온다. 하지만 통증은 생각나지 않는다. 첫눈이 오던 날, 친구와 꽁꽁 언 손을 잡고 깔깔거리며 서울 시가지를 활보했던 추억은 행복이다. 단순한 일상에 웃고 울었던 젊은 시절에는 추위로 정신상태에 혼돈을 받거나 행동의 제한도 받지 않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마련해준 겨울이 무조건 좋았다. 무엇이 나를 변하게 했나.

이럴 수가 있을까. 전신이 오그라드는 추위로 머리도 윙윙거리고 가슴도 조인다. 몸이 이러니 속까지 시렵다. 담요로 무릎을 덮고 화창한 햇살이 숨긴 그늘을 피하며 남부의 날씨를 그리워한다. 전기공사 하는 사람들이 얼른 일을 마쳐서 정전사태가 해결되고 히터가 작동해서 집안에 온기가 돌기를 기다린다. 집에 벽난로가 없으니 대신 피운 깊은 숲 속 묵은 나뭇내를 주는 향에 심호흡을 해도 굳은 손가락은 부드러워지지 않는다. 늘 푸근하던 실내온도가 이렇게 그리울 줄이야.

피트니스 센터로 간 남편이 3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질 않고 전화도 받지 않는다. 걱정되어 그곳에 전화하니 벌써 한시간 전에 체크아웃 했단다. 어두워지는 거리를 보며 걱정하니 사위가 안심시킨다. 피트니스 센터에서 집으로 오는 거리에 있는 식당과 바를 열거하며 분명 그 중의 한집에 들렀을 것이란다. 그리고 사위는 차례대로 전화해서 인상착의를 알리고 물었다. 한 식당의 바에 혼자 앉아 닭날개 구이를 먹는다는 남자는 분명 남편이다. 집에서 걱정하는 가족들은 아랑곳없고 추운 집에 돌아오기 머뭇거리는 남편의 반전이 우습다. 정전사태가 남편의 정신상태에도 이상을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