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기에 나는 독일을 사랑했다. 까마득한 옛일이지만 10대 중반부터 나는 독일산 모든 것을 맹목적으로 좋아했고 남산에 있는 독일문화원은 좋은 도서관과 강의실로 독일을 향한 나의 사랑을 아낌없이 불태우도록 도왔다. 덕분에 독일어 회화에 유창했고 딸의 이름도 독일 작가의 책에 나온 주인공 이름으로 짓을 정도로 나는 독일문학에 심취했고 독일 문화에 매혹당했다.

이민와서 공군에 입대하고 독일의 남서부 도시 슈투트가르트에 발령받자 무척 흥분했다. 하지만 짝사랑하던 독일을 실제로 만나자 나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갈등했다. 낭만적인 문학과 음악의 나라로 마음을 앗아간 나라는 친절하지 않았다. 세를 낸 아파트는 방마다 천정에 전깃줄만 달랑 있었지 야박하게 전등 하나 없었고 길에서 만난 이웃은 인사에 답없이 꼿꼿이 지나갔다. 독일생활 5개월에 낯선 시골에서 교통사고를 낸 벌로 6개월 운전금지 당하면서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나의 행동이 제한받자 고전을 겪었다. 그리고 틈틈이 좋아했던 작가와 음악인들의 생가를 찾아 그들의 체취를 느끼고 곳곳의 문화 유적지를 돌아봤지만 철부지 사랑은 성숙한 사랑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켈틱노래를 접하고 아일랜드의 스토리에 끌렸다. 모든 켈틱 노래에는 사연이 담겨 있다. 일제치하 아픔을 겪은 모국을 가진 나는 영국의 지배하에 고통받은 아일랜드인들의 한에 쉽게 공감했다. 아일랜드의 가슴 아린 민요에 아일랜드 작가와 시인의 작품이 나를 사로잡으면서 내 사랑도 독일에서 아일랜드로 대상이 바뀌었다. 언젠가는 찾아가리라 벼르다가 2005년 5월,  드디어 떠날 작정을 했다. 혼자 간다하니 그당시 영국에 살던 큰딸이 먼저 나섰고 이어서 남편과 작은딸까지 가겠다며 나선 바람에 네 식구의 가족여행이 됐다.

떠나기 전에 각자에게 임무를 줬다. 남편은 운전사, 큰딸은 여행안내자, 작은딸은 재정담당, 그리고 나는 총감독. 그때 처음으로 딸들이 세부적인 계획을 세웠고 사전예약까지 다 알아서 해결했다. 그 결정은 정말로 근사했다. 바람과 비와 돌의 나라. 아일랜드는 마력을 가진 나라다. 도착한 날 오후에 14세기 성을 찾았다가 성안의 뜰에서 네잎 클로버를 찾았다. 아일랜드 방문 첫날에, 그것도 수 백년이 된 성안의 뜰에서 얻은 행운을 조심히 여권속에 끼워 넣으며 나는 무척 행복했다.

그때 Fodor’s여행 가이드북이 지침서였다. 우리는 선사 시대나 켈트 유적지를 중심으로 가고 싶거나 보고 싶은 아일랜드의 남쪽과 서부 지역을 고루 찾아 다녔다. 기네스 맥주로 행복했던 남편이 일찍 잠이 들면 여자들은 매일 저녁 쿰바야하며 다음날의 일정을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조절했다. 안개 자욱한 푸른 들판의 양떼와 소들, 거친 산야, 눈 시리게 푸른 계곡과 대서양변의 돌집과 이끼낀 낮은 돌담들이 착착 감겨들었다. 춥고 비가 오거나 좁은 도로도 신비로움을 돋구었다. 마법사와 마녀가 사는 나라의 외진 길을 헤치고 다니며 우리는 ‘아이리쉬 축복’의 재치를 음미했다. 제임스 조이스, 사무엘 베케트와 윌리엄 예이츠의 나라, 그 나라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수 천년 천연의 원시적 야성이 우리를 매혹시켰다. 정지된 시간을 넘나들며 행복하다가 내 마음의 한쪽을 남겨두고 다시 오리라 다짐하고 떠나왔다.

올 봄에 지인의 장례미사에 참석하고 성당을 나서다가 타지의 성당으로 전근가신 옛 신부님을 만났다. 반가이 근황을 나누다가 불쑥 신부님이 “아일랜드 가겠느냐?” 물었을 적에 나는 두말없이 두손을 들었다. 그리고 얼른 옆에 선 남편의 손도 잡아올렸다. 신부님의 제안은 몇 년 째 아일랜드 가자고 졸라도 꿈쩍하지 않는 남편으로 주춤이는 나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신부님 앞에서 거절못하고 어영부영 끌려든 남편은 가본곳을 다시 가기 싫다며 떠나는 날까지 툴툴거렸다. 하지만 나는 천하태평으로 남편과 나의 여행가방를 챙기며 “내 사랑 아일랜드”를 읊었다.

애틀란타 공항 게이트에서 신부님과 재회했다. 그리고 막상 더블린에 도착해서야 나머지 멤버들을 만났다. 총 12명, 신부님이 칭한 ‘dirty dozen’ 일행중에 8명은 처음 만나는 사람들로 앨라배마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가족여행만 하다가 순례와 관광을 겸한 그룹여행을 하면서 색다른 체험을 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