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다 바닷가를 오가며 여러번 지나간 작은 도시다. 소문난 스테이크 식당은 즐겨 찾았지만 도시의 분위기는 어느 남부 작은 도시와 비슷하리라 여겼다. 하늘 높고 청명한 가을날, 어수선한 마음에 가을 바람을 탔다. 땅콩 수확철이라 땅콩 생산지를 찾아 한적하고 평화로운 시골길을 매끈한 바람처럼 지나갔다.

몽고메리에서 남동쪽으로 100 마일 거리에 있는 작은 도시 도탄은 자칭 ‘세상의 땅콩 수도’다. 도탄을 중심으로 반경 100마일 지역에서 생산하는 땅콩은 미국 땅콩 생산량의 거의 절반인 1.5백만 톤이다. 그 수확물의 반은 미국인들이 즐겨 먹는 땅콩버터가 된다. 특히 남부사람들은 ‘삶은 땅콩’을 좋아한다. 소금을 잔뜩 넣고 껍질채 푹 삶은 땅콩은 간간하고 부드럽다. 구운 땅콩의 고소한 맛과 다른 가을철의 담백한 별미다. 흐믈하게 익은 껍질을 벗기고 속살을 걷어내면 저절로 군침이 돈다. 나도 삶은 땅콩을 좋아해서 해마다 가을이면 햇땅콩을 삶는다. 올해는 생산지에서 햇땅콩을 구하려고 나선 나들이에서 예상하지 않은 즐거움을 맛봤다.

도탄에 처음 도착한 개척민들은 목재를 주 산업으로 생산하다가 기후환경에 적합한 목화를 재배했다. 목재와 목화를 실어나르려고 철도가 개설되면서 상업의 중심지로 빠르게 발전했다. 그러나 남북전쟁의 후유증이 가시기 전인 19세기 후반, 멕시코에서 텍사스로 넘어온 곤충 목화 바구미가 서서히 남부 전역으로 번지면서 남부의 목화농사를 망쳐서 농부들에게 큰 타격을 줬다. 농업에 의지하던 지역 경제가 휘청이자 지역인들은 대책을 강구했다. 목화 대신에 땅콩을 재배하기로 하고 모두가 노력한 결과 성공했다. 훗날 땅콩 생산량은 늘고 면직물 산업이 사양길로 들어서자 목화농사에서 땅콩농사로 바꾼 결정은 전화위복이 됐다.

도탄 다운타운 재개발의 기금모금으로 시작한 땅콩 조각비가 좋은 호흥을 받자 이 프로젝트는 날개를 달고 불처럼 번졌다. 도시 곳곳에 세워진 제각기 모습의 땅콩 조각비는 나름의 스토리를 전한다. 방문자 센터 앞에 세워진 금빛 땅콩 조각비를 시작으로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도로를 천천히 돌면서 여기저기 상가앞에 세워진 땅콩 조각비를 찾아봤다. 의인화가 되고 또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이름에 어울리는 모습의 제각기 땅콩 조각비를 구경하는 일은 마치 보물찾기하듯 재밌었다. 코믹하고 재치있는 모습의 통통한 땅콩 조각비는 풍성하게 생산되는 땅콩 농사를 증언하는 동시에 지역 생활상의 면모를 보여줬다.

다운타운 시빅센터 앞에 있는 ‘Kiss Goodbye to Cancer’ 핑크색 땅콩 조각비를 보러갔다가 대형 벽화를 봤다. 다운타운 4-5 블럭의 건물 곳곳에 그려진 재미난 벽화들은 공공 아트 프로젝트다. 지역 역사를 시각적으로 소개하는 멋진 구상이다. 16세기에 스페인 탐험가 데소토 일행이 크릭 인디언 원주민이 살던 이 지역을 방문한 벽화를 시작으로 개척사를 보여주는 동시에 지역 문화를 알렸다. 도탄에서 일어난 획기적인 사건이나 인물들과 산업, 예술분야의 변천을 보여주는 컬러풀한 그림이 시각을 즐겨주며 스토리를 풀었다. 그 중에서 지역 여성들의 변함없는 자질과 특성을 보여주는 그림 앞에서는 슬그머니 미소가 나왔다. 여성의 인권은 흑인의 인권과 함께 힘든 여정을 지나왔다. 가을 연례행사인 땅콩 페스티벌 준비로 부산한 도시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정했다. 여린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의 멋진 배경과 풍성한 농산품에 둘러싸인 행복한 촌부들의 수수함이 한껏 돋보였다.

땅콩과 벽화. 썩 잘 어울렸다. 땅콩과 벽화로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으며 또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남부의 작은 도시는 정겨웠다. 돌아오는 길,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정경이 전혀 쓸쓸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가을날에 가졌던 멋진 시골 나들이는 계절의 의미로 우울하던 나의 마음에 평안을 줬고 동시에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평범함이 현명한 삶의 자세임을 보여줬다. 나도 자연의 순환에 자연스럽게 적응하면 된다.

사갖고 온 땅콩을 큰 냄비에 담고 물을 충분히 부은 후 소금과 발사믹 식초를 조금 가미한 후 오랫동안 푹 삶았다. 굵고 통실한 햇땅콩의 신선함이 가을맛을 담았다. 올 가을, 삶은 땅콩으로 가을 의식을 치르면서 늙는 것도 서러워하지 않고 또한  남부인이 된 나의 정체성도 묻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