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라배마 남쪽 바닷가는 반열대성 온화한 기후를 가진 아름다운 휴양지다. 바다를 보러 갔다가 심한 폭풍우를 만나 이틀을 호텔에서 나서질 못했다. 비에 젖는 것은 괜찮지만 모래바람이 따가워 해변을 걷는 것은 무리였다. 더구나 미친듯이 흔들리던 창밖의 야자수 나무잎들과 무섭게 포요하던 바다의 함성은 나를 위축시켰다. 그저 방안에 꽁꽁 숨어서 창을 통해서 바다를 보다가 잠깐 비바람이 멈추자 얼른 밖으로 나섰다. 몇 사람과 갈매기들 어슬렁이는 넓은 모래사장은 축축했고 하늘과 바다는 온통 잿빛으로 흔들렸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물에서 강력한 에너지가 쏟아져 나오고 요란하게 철썩이는 거친 파도의 숨소리는 나의 상념을 앗아갔다. 폭풍우를 따라와 해안을 치고 떠난 파도가 꽤 많은 모래를 퍼갔다. 완만한 경사의 해안 곳곳에 2피트 정도 높이의 모래 언덕이 생겼다. 젖은 모래를 두 손으로 가득 집어서 물가로 갔다. 천천히 모래 알갱이를 흩어주며 진정하라고 주술외듯 바다를 달랬지만 바다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심사가 사나운 바다에 발을 담그고 천천히 해변을 걷다가 파도에 실려온 조가비들이 모래사장에 우루루 어지럽게 쌓인 것을 봤다. 먼 길을 시달리며 온 지친 조가비들 중에 예전에 보지 못한 낯선 조가비들이 있다. 새롭게 본 조가비들을 주워 바람막이 자켓 주머니에 채워 넣었다.

그러다가 내 손바닥 보다 큰 오렌지 빛 광채를 뿜는 조가비를 봤다. 엄청난 몸집이다. 얼른 집어서 모래를 털었다. 멕시코만 해변을 많이 들락였어도 이렇게 큰 조가비를 본 적이 없다. 주홍빛 겹겹의 주름은 세월의 나이테로 묵직하다. 매끈한 안쪽 속살 피부를 손가락으로 살살 더듬었다. 부드럽고 탄력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안 화가인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 그림에 있는 조가비를 닮았다. 사랑의 여신이며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꼽히는 비너스는 조개껍데기를 타고 세상에 등장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보여준 여자와 조가비의 인연이 재밌게도 오늘 나와 조가비를 이어준다. 조개껍데기를 준 바다의 신과 그것을 탄 비너스를 해변으로 데려다준 바람의 신이 이 오렌지 조개껍데기에 누굴 태워서 이곳에 보내줬는지 상상하니 우스웠다.  

해변을 걸을적마다 어김없이 조가비를 줍고 그리고 남부에 오래 살았던 세월만큼 꽤 많은 조가비들이 우리집에 왔다. 이번에 새롭게 데려온 조가비들은 바람과 비가 섞인 바다의 정기를 느끼게 해준다. 생각난 김에 박스에 담겨서 집안 여기저기에 잊혀져 있던 조가비들을 모두 찾아와서 큰 식탁위에 쭉 펼쳤다.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조가비들이 기지개를 펴며 자태를 보인다. 자세히 살피니 재미있는 패턴이 있다.

오래전 아이들이 어렸을적에 우리집에 온 조가비들은 완벽한 모습을 가졌다. 조각난 것이 별로 없이 여전히 선명한 광택을 가진 예쁜 모습들이다. 세월이 좀 지난 후 데려온 비슷비슷한 크기와 모습의 조가비들은 구멍이 뚫려있다. 치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었던 기억이 나서 슬그머니 미소가 나왔다. 조가비 목걸이를 걸고 행복해 하던 딸들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그리고 무지개빛 찬란한 조각들을 모으면서 자개장을 떠올렸던 일은 아직도 가슴에 따스한 기운을 준다.

아이들이 성인이되어 집을 떠난 후부터 데려온 조가비는 완연히 다르다. 분명 나의 취향이 바뀌었다. 온전한 모습이 별로 없다. 끈적하게 남아있는 생의 흔적으로 나를 유혹한 조가비들은 크고 작고 모나고, 모양과 피부색이 제각각이지만 하나 하나가 나의 시선을 끌었다. 하나씩 집어서 보니 허리를 굽혀 주우며 가졌던 작은 만족이 아직도 손끝에 느껴진다. 더욱 신기한 것은 식탁을 덮은 많은 조가비들이 하나도 같은 모습이 없다. 비슷한 것들을 모아놓고 자세히 살펴봐도 무엇인가 조금씩 다르다. 마치 천태만상인 사람의 모습과 닮았다. 사람들이 제각기 특성을 가졌듯이 조가비도 제각기 분위기가 다르다.  

투명한 캔들 홀더를 잔뜩 찾아서 식탁에 가져왔다. 비슷한 크기와 종류의 조가비를 모아 그릇마다 담았다. 모양과 색깔을 분류해서 담으니 조가비들의 아름다움이 한층 돋보인다. 또한 숫자가 많으니 그만큼 파워가 커진다. 갑자기 유리 그릇에 자리잡은 조가비들이 웅성거린다. 그동안 박스의 두껑을 밀치고 나오지 못하던 조가비들이 자유를 찾고 목소리를 찾아 소란스럽다. 그들이 토해내는 바다 내음을 맡으며 조가비들의 침묵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아이의 옹알거림에 어른들의 한숨과 푸념, 그리고 기쁨과 환호 등 온갖 소리가 뒤섞여 불협화음을 낸다. 세상 구경을 시켜준 파도가 그리운지 아니면 바다를 떠나 꼼짝없이 갇힌 신세가 서러운지 모르겠다. 그중 나를 원망하는 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나는 여유롭게 앉아서 조가비들이 들려줄 진짜 스토리를 기다렸다. 바다 건너 먼 곳이나 혹은 바다 밑 깊은 곳의 경이로운 사연이나 흥미로운 가십을 기대하다가 결국 포기했다. 철새처럼 겨울나러 내려온 북부인들이 들려준 유유자적한 사연들과 달리 남쪽 바다에서 밀려온 조가비들은 웬지 좌절감을 준다.

특히 오랜 세월 풍파를 헤치고 파도를 타면서 조금씩 버리고 흘리고 비운 후에 뭍에 온 부러진 조각들은 나이든 지인을 연상시킨다. 늙고 병든 지인들이 변하고 살면서 받아들인, 어쩌면 체념한 자세를 닮았다. 단단하고 견고한 껍질은 사람만큼 고집세다. 제 모습을 제대로 갖고 있지 않으니 자신의 사연을 제대로 들려주지 못한다. 떠나온 바다에 가진 미련으로 과거는 바다와의 비밀로 지킨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가슴에 숨기듯 조각난 조가비의 사연은 조가비의 몫으로 남겨두고 일어섰다.

그러다가 불쑥 돌아서 “무엇이 중요한가?” 물었다. 조각난 조가비가 대답했다. “몸체가 흩어져 사라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살아있을 적에 사랑을 받았느냐?가 중요하다.” 맞다. 유리 그릇들에 담긴 고요를 받아들이며 변하는 자연의 진리도 함께 받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