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예전에 그 악덕 사장 밑에서 같이 일했던 귀염둥이 총각 동료한테서 몇 달 만에 전화가 왔었어요.

전화를 못 받아서 저녁에 메세지를 확인하는데

 

 

안부 전화겠거니 하면서 듣기 시작했는데

웃음이 터져 가지고

남편이 깜짝 놀라서 방에서 뛰쳐 나오더라고요.

부인이 큰 소리로 웃으시다니...이 무슨 일인가 하는 얼굴로.

 

 

데이빗인데 메세지가 웃겨서 내가 다 듣고 얘기해 줄께.

 

 

하고 기나긴 메세지를 듣는데...

 

 

그 날이 5월 15일이었어요.

한국어도 아주 잘하긴 하지만 정확히는 영어권인 총각이고요,

영어로 얘기를 할 때는 참 조리있고 똘똘한데

한국말로 할 때는,

말투가 어딘가 좀 어리숙하달까, 젊은 사람 같지 않고 좀 구수한 한국어를 구사한달까,

암튼지 재밌어요.

 

 

그 만의 구수한 한국어로 남긴 메세지의 시작이

 

 

네 네 안녕하세요 이쁜님

네 저 데이빗이예요.

오랜만에 전화 드리는데 뜬금없지만

다름이 아니고 오늘이 5월 15일 그러니까 한국에서는 스승의 날이라고 해서

이쁜님이 생각나서 전화 드렸습니다.

 

 

 

스승의 날이라 전화 했다는 대목에서 제가 웃음이 터져 가지고...

제가 생각이나 했겠어요?

 

 

이쁜님이 물론 저의 선생님은 아니시지만 블라블라블라

저한테는 무척 고마운 분 중의 한 분 이시고 블라블라블라

함께 일할 때 좋은 말씀 많이 해주시고 블라블라블라

제가 앞으로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블라블라블라

이쁜님을 자주 생각은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을 전화를 드리고 싶어서 블라블라블라

남편 분은 하시는 일을 잘 되고 계신지

이쁜님 몸은 건강하신지 앞으로도 몸 건강히

 

 

제가 그 긴 메세지를 듣는 동안 배가 아프도록 웃었어요.

 

 

깔깔대면서 이 얘기를 남편한테 해주니까

남편은 웃는게 아니고 표정이 심각해요.

너무 감동적이래요.

울먹이기 까지 해요.

너무나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하면서...

 

 

 

ㅍㅎㅎㅎㅎㅎㅎㅎㅎㅎ

 

 

 

며칠 후에 전화를 했더니 이 총각도 안 받길래 메세지 남겼어요.

 

 

스윗한 메세지에 감동 받았다고

너무 고마웠다고.

같이 일했던 다른 분들도 연락해서

맨하탄에서 언제 다같이 저녁 먹자고.

 

 

요렇게 남겼더니

 

 

이틀 쯤 후에 전화가 왔어요.

그런데 제가 또 못 받았어요.

계속 둘이 폰 태그 중.

 

 

메세지가

 

 

시카고에 있다고 여름까지 여기 있을 것 같다고.

 

 

그래서 어제 제가 전화를 했더니 이번에 받더라고요.

마침내 통화가 됐어요.

 

 

그 회사 나오고 한 동안 새 직장도 안 잡히고 해서 고군분투 하더니

목소리에 자신감도 묻어 나고 여유도 느껴지더라고요.

제가 아주 잘 됐다고 어떻게 시카고까지 가셨냐,

그럼 생활은 어디서 하냐,

밥은 어떻게 먹고 있냐,

이런거 부터 물어 봤어요.

 

 

같이 일 할 때

저 총각이랑 저랑 딱 둘만 도시락싸서 다니는 사람들이었는데

같이는 자주 못 먹었지만 싸오는 도시락 보면 항상 정갈하고 균형잡힌

샌드위치와 과일들.

한국 음식은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하더라고요. 김치도 못 먹고.

도시락은 누가 싸냐고 물었더니

 

 

새벽에 부모님이 일어 나셔서

어머니는 샌드위치 만드시고

그 옆에서 아버지가 과일을 그렇게 정갈하고 예쁘게 씻고 깎아 담아 주신다고.

셋이 함께 그렇게 일찍 집을 나서서 각자 일터로.

 

 

그 때 부모님 정성 담뿍 담긴 도시락들이 생각나서 그것부터 물었어요.

 

 

아우 내가 아줌마라 어쩔 수가 없어요. 이런거 부터 궁금하네.

 

 

했더니 대충 사 먹는데요.

지내는 곳은 회사서 마련해 준 호텔에서 지낸대요.

 

 

우와~~~~

데이빗씨 이제 잘 나가는 구나~~~

우와 회사에서 호텔도 제공해 주고~~~~

우와~~~ 너무 있어 보여요~~~~

 

 

제가 막 호들갑 떨면서 좋아했더니

쑥스러워 해요.

 

 

그렇게 근황 얘기 주고 받는데 비밀이라면서 저만 알고 있으래요.

 

 

딱히 비밀은 아니긴 하지만

아직은 부모님만 아시는 일이고 어쩌고 저쩌고 어쩌고 저쩌고 하더니

이쁜님한테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어쩌고 저쩌고 하더니

요는

여름까지 시카고에서 일하고

가을에 대학원 진학하게 될 거 같다고.

 

 

참 잘했다고 또 막 축하를 해주고 법썩을 떨었어요.

저는 원래 공부 더 하겠다는 건 무조건 찬성인 사람이라

(내가 등록금 대 줄 것 아니니까)

잘 생각 하셨다, 대견하다, 열심히 하시라, 마구 북돋워 줬죠.

 

 

한 군데는 리젝이고

두 군데는 웨이팅 리스트에 있고

한 군데는 입학 허가를 받았고

시험을 다시 보고 내년에 재도전 할까 어떡할까 고민 중이라길래

 

 

 

내 의견 물어 보지도 않았구만

저는 또 다다다다....

 

 

그 시험이 더 잘친거 뽑아 쓰는게 아니고 평균으로 들어가는 건데다

다시 친다고 점수를 확 올리기 쉬운 시험도 아니고

일 년 더 준비하는게 얼마나 도움이 될 지는 모르겠다,

공부도 때가 있는 거니까 작정하고 밀어 부칠 때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그냥 시작하시라,

어차피 빚지고 하는 공부

졸업이 일년이라도 빠른게 좋다,

지금 허가받은 학교도 굉장히 좋은 학교예요. 하면서

대학원 론은 어차피 이거나 저거나 다 노비 문서니까

일단 시작해서 공부만 열심히 한 다음에 졸업해서는 또 돈버는데 집중하시면 되고

전 그럼 데이빗씨가 공부 마치고 회사 차려서 저 데려가서 쓸 것으로 믿고 기다리고 있겠다고.

 

 

 

나이는 점 점 더 먹을테고

실력도 없고

성질도 안 좋은 사람이

뭐 어디 하루 아침에 좋은 직장이 나타나겠어요?

이제는 사회 생활 거의 포기 단계인데

거꾸로 매달아도 시계는 가니 지금부터 저는 데이빗씨만 믿고 기다릴래요.

 

 

 

그랬더니 막 좋아해요.

자기 밑에서 제가 일해주면 자기가 영광이라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데이빗씨는 좋은 성품을 가진 사람이니 잘 하실 거라고 덕담을 또 얹어 주고.

 

 

 

사람은 환경과 상황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인간성이 존재하는데

일하는 곳에서의 인간성이 진짜 인간성이거든요.

데이빗씨는 아주 아주 드문 보석같은 성품을 가진 사람이예요.

그 성품을 잘 지켜서 공부로도 성공하면 꼭 데이빗씨가 바라는 그런 일 하는 사람 될 거예요.

 

 

 

이해 관계가 얽히지 않은 상황에선

너그럽고 맘 좋은 사람으로 포장하는게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일하는 곳에서는 

내가 여기서 돈을 벌어야 하고 살아 남아야 하는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에

내가 굳이 안해도 될 일을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한다든지

그런거 할리가 없잖아요.

지 잘 되려고 내 뒤통수나 안 갈기면 다행이지.

참 저런 인간이 밖에서는 존경받는 뭐뭐뭐 라니 기가 차다, 하는 경우 흔한 일이고.

 

 

 

 

보나스로 여자 친구 얘기 물어 보니까

또 어쩌고 저쩌고.

결혼까지 가는 인연은 다 따로 있으니까 지금 너무 속 끓이지 마시라고.

혹시 완전히 끝나게 되면 빨리 알려 달라고요.

접때도 얘기했던 우리 큰 조카양 이번에 대학 졸업합니다.

했습니다.

 

 

 

시카고에서 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그 때 꼭 저녁 먹자고 해서 그러자고 했어요.

학교 문제 결정되면 또 연락 드리겠다고 해서 꼭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같이 일할 때

그 미친 사장이 속 뒤집을 때 마다 서로 위로 하면서 쌓은 정이 참ㅎㅎㅎ

거기서 일하던 그 반 년의 세월은

밤마다 잠도 못자고

괴상한 스트레스성 피부병까지 생기고

잇몸 들떠서 치과 들락거리며 항생제 또 먹어야 한다고? 괴로워 하고

하루 하루가 지옥이었는데

그 때 같이 일했던 사람들은 정말 다 하나같이 진국이예요.

 

 

사회 생활 하면서 이런 사람들 하나도 만나기 힘든데

저는 셋이나 만났네요.

그 지옥의 직장에서.

 

 

 

다른 여자 동료들 두 명도 두어 달에 한 번씩 전화가 와서 같이 밥 먹고 그래요 지금도.

원래 친하게 지냈던 신입이었던 친구도 전화 계속 하고

새초롬했던, 저에게는 상사의 위치였던 다른 동료도

지금은 동료의 관계가 아니니 와인 한 잔 마시고는 자기 사생활 얘기도 꺼내 놓고

이쁜씨 라고 안하고

'언니'라고 부르고.

제가 언니라고 안해도 된다고 그냥 하던대로 이쁜씨로 부르라고 했는데

그 경우 바르고 동료끼리 갖출 선은 확실하게 지키던 이 새초롬 아가씨가

이제는 언니라고 해야죠. 언닌데. 이러면서 팔도 잡고.

오마나 이 사람한테 이런 싹싹한 면이 있었다니...놀랐다니까요.

남자 친구 얘기까지 하길래 제가 속으로

오마나 이런 얘기까지? 하고 정말 놀라면서도 또 적극적인 오지랖으로 조언해 줬어요.

 

 

 

진심을 드러내는 걸 두려워 하는 것과 자존심을 지키는 일은 별개의 일일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해보시라,

사랑의 확인은 여자만 필요한 게 아니고

남자도 내 여자의 진심을 알아야 확신을 가질 수 있지 않겠냐,

내 마음만 가지고 밀어 부칠 수 있는 20대의 사랑도 아닌데.

 

 

 

저렇게 얘기 했었는데 그 이후 이야기를 못 들어 봤어요.

조만간에 세 사람이 모여 같이 저녁 먹게 될 것 같아요.

그 때 들어 봐야지.

 

 

 

둘째 언니한테 전화해서

스승의 날이라고 전화를 받았다, 얘기해 주니까

워낙에도 웃음이 많은 언니가

까르르 까르르 넘어가요.

 

 

너무 귀엽다~~~ 하면서.

 

 

 

내가 아주 배가 아프도록 웃었다.

미국에서 큰 애가 한국의 스승의 날은 어찌 알고 기억을 하며

그렇다고 내 생각이 났다니...

아 웃겨.

그래도 속없이 마냥 착하기만 한 줄 알았더니 대학원 준비 하고 있었대.

너무 대견한 거 있지.

 

 

 

마음 착한 둘째 언니는 진심으로 그 청년 잘 됐으면 좋겠다고 자기도 또 너무 기뻐하고.

 

 

 

착한 사람들이 성공해서 잘 사는 거 보고 싶어요.

정말 신날 거 같아요.

 

 

그나저나 저는 입싸게 여기다 이 귀염둥이 총각 얘기를 이렇게 해도 되는 걸까요?

비밀이라고 한 건,

제가 다른 전 동료들하고 연락하고 만나는거 아니까

그 사람들한테 말하지 말아 달라는 걸로만 해석 했는데..

제가 여기다 이 얘기 했다는거 비밀입니다 여러분.

 

 

 

새벽에 일어나 어머니는 샌드위치 만들고

아버지는 과일을 깎아 준비한 도시락을 들고 이른 아침 집을 나서 

두 시간 동안  버스 타고 출근해 열심히 일했던 저 청년도

정말 저 집의 귀한 아들인데 말이죠.

가진 거 없고 있는 거 없어서 오늘도 하루 하루 일해서 먹고 사는 없는 집 자식이래도

귀한 자식인데.

 

 

뭐 귀하지 않은 자식이라고 칩시다.

구박 받고 미움 받는 자식이라고 쳐도

인간은 인간으로써

그 자체로 존엄하고 귀한 것을

지가 똑똑하면 얼마나 똑똑하고

사장이면 사장이지,

지가 월급을 주고 사람을 부린다고

그 돈 공짜로 가져 오는 것도 아니고 일 해 주고 받아 오는 거구만 말이죠.

제가 목격했던 인격 모독만도 엄청 났어요.

물론 저도 안 당한 일은 아니고요.

 

 

 

 

저 사장한테 복수하고 싶다고 한동안 저한테 전화가 자주 왔었거든요.

 

 

제가 말하길

다른 방법은 다 그만 두시라고.

회사 문 닫는 것은 고객들이 저 사장 실체를 알아서 고객들이 입소문 내고

가는 사람들이 없어 지면서 그렇게 망해야 순리인 거고

악한 사람을 응징한다고 선한 사람이 같이 그 흙탕물 속으로 들어가진 마시라고.

어설프게 흑색 선전하다 오히려 데이빗씨가 더 낭패볼 수 있다고.

그 밑에서 일했던 직원으로써 할 수 있는 가장 큰 복수는

그 사람이 제일로 무서워 하는 거, 돈. 그거 받아내는게 제일 큰 복수라고요.

노동법 변호사 만나고 오신 거, 그거 잘하신 거고

그 돈 다 받아내는게 데이빗씨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복수라고.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는데

저 착한 청년을 정말 그 사장이 밑 바닥까지 밟고 밟고

써 먹다 내 보내 놓고는

향후 취직도 못하게 레퍼런스 다 깽판치고.

저 회사는 자기 말고는 다른 누구도 전 직원에 대해 레퍼런스 못 주게 되있어요.

일 시작할 때 별 같잖은 회사 방침 열 몇 장 짜리 주면서 싸인하라 길래 읽어 보니

그 말이 있더라고요.

자기 말고는 아무도 레퍼런스 해 줄 수 없다, 해고의 사유다.

 

 

 

이거 읽고

일단 여기서 일을 하려면 이거 싸인은 해야 되겠고 해서 하고요,

일 시작하고 바로

저 상사급인 미국인 직원하고 친해지자 마자 부탁 했어요.

이 메일로만 컨택 하는 걸로 하면 내 래퍼런스 해 줄 수 있겠냐고.

그 친구가 물론 해주겠다 했고

거기 일하는 동안 다른 회사도 직접 연결해 주고 그랬거든요.

 

 

 

 

다른 직장에 취직이 너무 안되니까 저 귀염둥이 총각이 어느 순간 악에 받치는 듯한 태도가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조언했어요.

인터뷰 가서는 솔직하게 사장하고 사이가 안 좋아서 회사를 나왔다 얘기하고

레퍼런스로 사장은 주지 말고

제 레퍼런스 해주기로 한 그 미국인 친구한테 이메일로 부탁해 보라고 했어요.

레퍼런스 해 줄 수 있는지.

저 친구도 엄청 착하거든요. 해주겠다고 하더래요.

 

 

 

그러면서 제가 저 청년을 좀 진정을 시켰어요.

오버타임 한 거 그 돈 한 푼도 어김없이 알뜰히 받아 내는 거만 집중하라고.

그게 그 사장한테는 최고의 복수라고.

 

 

 

지금 그 회사 어떻게 되가고 있냐고요?

망해가고 있어요.

 

 

 

 

내 자식도 아니고

내 조카도 아닌데

힘든 시기 보내면서

좌절스러웠던 순간에 받치던 악을 

알차게 대학원 준비하는 에너지로 전환하고 합격까지 했다니

어찌나 대견한지..

 

 

긴 전화 통화를 마무리 하면서

 

 

"세상엔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공존하는데

세상이 좀 더 좋은 세상이 되려면

사람들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제대로 알아 보고

좋은 사람이 좋은 성품을 잃지 않고 자기 할 일을 할 수 있어야

나쁜 사람들이 나쁜 짓 하면서 호의호식하는 일이 어려워 질거거든요.

나는 데이빗씨가 좋은 사람인 걸 알아 봤으니까

데이빗씨는 계속 좋은 사람으로 공부 잘 마치고 좋은 일 많이 하셔야 해요.

나한테 희망을 줘서 정말 고마워요."

 

 

했더니

고맙습니다.

네 네 이쁜님 정말 고맙습니다.

저를 그렇게까지 잘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합니다.

 

 

 

참으로...

남들은 한참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사회 생활하는

10대와 20대 30대를

초지일관 불량의 아이콘으로 사느라

 

 

후진 40대를 보내고 있는 이쁜아짐은

이 심성 고운 청년의 앞날에 행운도 함께 하기를 기원하며

희망을 가져 봅니다.

 

 

차근차근 잘 다독여 관리하면

아마도 몇 년 후엔 즐겁게 일 할 수 있는 일자리가 생길 수도 있겠어...

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