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하고 싸우고 둘째 언니네 가서 하루 자고 왔어요.

 

 

날도 더운데

이 좁은 집에서 얼굴 부대끼며 불편하게 있는 것 싫어서

혼자 한 김 식혀야 하는데 이번엔 잠깐 동네 한 바퀴 도는 걸로는 안되고

하루밤 정도는 떨어져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신혼 때는

남편을 쫒아낸 적도 있는데

남편은 집에서 내쫒기면 갈데가 술집 밖에 없어요.

친구들이고 자기 식구들이고 다 멀리 살아서

지하철타고 어디 가서 하루밤 신세질 데가 없는데

 

 

저는

언니 1,

언니 2,

언니 3,

중에 한 집 골라 가면 되니까

갈데도 없는 사람 내쫒는건 너무 치사한 거 같아서

내쫒지 않고 제가 나갑니다.

 

 

집을 나가도 나는 귀한 몸이라

둘째 언니한테 차로 모시러 오라 하고

자고 난 다음 날은 큰 언니한테 차로 둘째 언니네 데릴러 오라 해서 집으로 왔습니다.

 

 

둘째 언니나

큰 언니나

전쟁 치뤘구만, 하고 눈치는 채도

왜 싸웠느냐고 물어는 안 봐요.

저도 얘기 안해요.

 

 

잠시 머리 식힐 피난처가 필요한 것 뿐이지

남편과 전쟁을 해도

이제는 자세한 얘기는 언니들한테 안합니다.

 

 

 

신혼 때 한 번 대차게 싸우고

인터넷에서 이혼 서류 프린트해서 침대 위에 던져 놓고

여행 가방에 짐싸서

둘째 언니네 가서

거기서 일주일 출퇴근 한 적 있었거든요.

하루 열 시간씩

일주일에 닷새씩 일하면서

집에 오면 애들 치닥거리하고 쓰러져 잠이 드느라 안그래도 비쩍 마를대로 마른 언니가

제가 한 번 저러고 갔더니

새벽기도를 시작했더군요.

 

 

 

몇 달 지나서 그 집에 놀러 갔다가

화장실에 있는 기도 수첩을 우연히 봤어요.

그 때 쉬야 하면서 무심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언니 기도 수첩 줏어서 들여다 보고

나는 내 성질 못 이겨서

남편과 뒤집어 엎고 싸우고 와서

언니 집에 일주일 있다 간 것 뿐인데

 

 

언니는 저 땜에

갓난쟁이 둘째랑 세 살 첫 째 베이비시터한테 맡기면서

베이비시터 값 주고 나면 얼마 되지도 않는데

다만 얼마라도 남는 그 돈이 필요해서 일하러 나가던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을 그 시절에

40일 새벽 기도를 시작했던 거예요.

 

 

하루 하루 기도 제목에

제 이름이 써져 있고

남편 이름이 써져 있고.

 

 

 

나는 그 동안

희희 낙낙거리며 아무 생각없이 살았고만.

 

 

 

저 때 이후로

언니들한테 자세한 얘기 안해요.

이번 부부 싸움으로 이혼할 것도 아니고

어쨌든 다시 집으로 들어가서 화해하고 다시 살 건데

화 났을 때 미주알 고주알 얘기하면

언니들 속만 상할 것이니.

 

 

 

 

부부 싸움 한 김에

언니들이랑 하루 논다, 조카들이랑 하루 논다,

이런 셈 치고

그냥 가서 있다 오는 거예요.

 

 

남편이 저한테 너무 섭섭한 말을 했는데

제가 그걸 따지기조차 싫어서 하루 정도 시간이 필요했던 거거든요.

 

 

하루 자고 큰 언니가 데릴러 와서 둘째 언니 집 나서는데

코스코에서 산 복숭아 챙겨줘서 여섯 개 들고 왔어요.

한 박스에 열 개 들어 있는 거던데 여섯 개 주더군요.

저는 과일이라고는 먹고 싶어서 친히 사다 먹는게

사과랑 수박 뿐인데

남편은

매일 아침이 과일이예요.

사과 한 개, 바나나 한 개, 오렌지 한 개.

이렇게 아침으로 먹고

모든 과일을 다 좋아하죠.

 

 

가을이면 한국 배 사다 먹이고

어찌나 좋아 하는지 큰 거 한 개 깎아서 저는 한 쪽 맛만 보고

다 남편 먹으라고 줘요.

접시에 고인 즙 한 방울까지 알뜰히 다 먹어요.

망고도 철 돼서 조금 싸지면 사다 한 개씩 주면 껍질 싹싹 다 핥아 먹고.

딸기면 딸기

블루베리면 블루베리

안 좋아하는 과일이 없어요.

언니들도 잘 알아요.

나는 과일을 잘 안 먹고

남편은 과일에 환장 한다는 것을.

 

 

 

집 나갔던 마누라가

얻어 온 복숭아 냉장고에 넣으면서

 

 

언니가 당신 먹으라고 줬어.

 

 

했더니

 

 

울먹 울먹 하더군요.

한 3초 정도.

 

 

 

그러고는 곧바로

어른 주먹만큼 큰 복숭아였는데

네 개를 먹더군요.

 

 

 

제가 집 나간 이후로 아무 것도 안 먹고 있었던게 분명합니다.

집 나가기 전에

저는 최소한의 배려로

밥도 새로 해 놓고 나갔거든요.

그 전 날, 그러니까 싸우기 전이죠.

그 좋아하는 카레를 한 솥 해 놨었거든요.

카레랑 밥이랑 다 있었는데

일요일 오전 부터 제가 돌아 온 월요일 오후까지 밥 안 먹었나 봅니다.

 

 

 

너무 맛있다면서 환하게 웃더군요.

 

 

 

방긋방긋 환하게 웃으면서

복숭아 진짜 맛있다고

뭘 이렇게 여섯 개 씩이나 주셨냐고 좋아하는 남편을 쳐다 보자니

 

 

 

내가 저런 사람이랑...

대체 왜 싸움이라는 걸 하지???

내가 왜 이 사람이랑 인생 사는 고민 자체를 하는거지???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한 김 식힌 후니까

얘기를 했어요.

왜 섭섭 했는지.

섭섭한 한 마디에 왜 내가 절망 했는지.

 

 

 

눈물이 앞을 가리더군요.

 

 

 

저 사람도 나랑 살아서 힘든 것 많은 거 저도 잘 알기 때문에

그 부분도 얘기 했어요.

내가 미안한 것들.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들.

다 안다고.

당신한테 화가 났다기 보다

 

 

 

그냥 내가 지금 많이 슬퍼.

 

 

 

한참을 울었어요.

 

 

 

남편이 이번 달 부터는 바빠질 줄 알고 좋아했었는데

고용 조건 계약서까지 다 서명해서 보냈구만

그것도 물 건너 간 듯 하고.

남편도 실망, 저도 실망.

 

 

 

오늘은

이 폭염에

양복 차려입고 이력서 스무 장 뽑아서 아침에 나가는 남편을 배웅하고

남편 나가자 마자

방에 들어가서 에어컨을 끄고.

 

 

가서 별거 없으면 대충 하고 일찍 들어 오라고 했는데

다섯 시 다 돼서 전화가 왔더군요.

지금 지하철 탈 거라고.

점심은 먹었냐니까 제발 화내지 말라고 하면서 안 먹었다고 실토 하더군요.

(제가 끼니 거르는 거 제일 싫어하는거 알아서)

 

 

 

전화 끊자 마자 방에 에어콘 켜고

펜 스테이션이면 집에 오는 시간 30분.

냄비에 물 올리고

팬에 핫 소세지 굽기 시작하고

양파 다져넣고 대충 파스타 소스 만들었어요.

 

 

도착한 남편한테 얼른 방에 들어 가서 땀 식히고 있으라고 한 다음에

파스타 접시에 담아서 멕였어요.

저도 한 접시 담아서 같이 먹으면서

 

 

방 시원하지?

당신이랑 전화 하자 마자 에어컨 켜 놨어.

 

 

 

그럼 오늘 하루 종일 에어컨 안 키고 있었어요?

 

 

에웅 자기 없이 나 혼자 집에 있을 때 에어컨 안 키고 있는거 잘 알믄서~

 

 

 

이 사람이.

옛날 기억 다 까먹었나.

찌는 더위에도 긴 팔 셔츠입고 거기에 양복 걸쳐 입고

오전만이라고 해도

사무실 들어가기 전에

외근하느라 밖에 돌아 다니는 남편이 얼마나 더울까 싶어

최소한의 부부 간 의리를 지키고자

 

 

내가 직장 때려치고 남편 덕 좀 보면서 편하게 살아 보자 하고

아무리 하루 종일

랩탑만 끼고 폐인 생활만 했어도

에어컨은 안 키고 살았다.

잉여 인생 네티즌의 본분을 다하는 동안에도 땀을 뻘뻘 흘렸고

너무 더우면 동네 수퍼 마켓가서 놀았고

도서관가서 놀았고

이제 집에 오는 지하철 탄다고

전화 받으면

집에 오자 마자 시원하라고 그 때 에어컨 켰다.

 

 

 

내가 집에서 더운게

당신이 밖에서 돌아 다니며 더운 것만 하겠냐 싶어서.

 

 

땀 바가지로 쏟아 가며

팬에 쏘세지를 굽고

냄비에 파스타를 삶고

소스를 만들어서

저녁 멕이고

 

 

찬물에 샤워를 하고

수퍼마켓 가서 맥주 사와서 안겨주면서

야구나 보면서 좀 쉬라고 했더니

 

 

세상 온갖 달콤한 말은 다 갖다 부치면서

어쩌고 저쩌고 어쩌고 저쩌고

 

 

나는 당신을 꼭 호강시켜 줄꺼라고.

 

 

마음은 제가 믿어 의심치 않아요.

다만 현실적으로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또 모르죠.

사람 일이라는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바다에 가고 싶어요.

대도시의 폭염 주위보 속에서 보내는 여름은 힘들기만 하고

마음은 답답한데

바닷가에 가서 하루 놀고 오면

기분이 좀 나아질 것도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