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직장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가 오늘 저보러 동네에 와서

공원에 가서 김밥 먹고 왔습니다.

 

 

같이 일하던 동안에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저녁 한 번을 같이 못 먹었는데

제가 사무실 뛰쳐 나오고 나서 부터

벌써 저희 동네에 세 번째 왔어요 이 사람이.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하루 종일 벌어지는 회사라

가장 최근에 일을 시작했던 그 사람이

제가 그만두고 가장 큰 고통을 받을 거라는 걸 저도 알고 있었기에

울먹이는 목소리로 전화 오면 얘기 듣고

할 얘기가 너무 많아서 얼굴 보고 직접 얘기 하고 싶다고

자기가 이쁜씨 동네로 오겠다고 해서 저녁 한 번 먹고

 

 

또 한 달 쯤 있다가 전화가 와서

할 얘기가 또 있다고 해서

이번엔 다른 직원도 함께 합세해서

세 사람이 역시나 또 저희 동네서 저녁 먹고.

저녁도 맛있게 먹고 얼마나 웃고 재밌게 얘기를 했는지

밤 열한시가 거진 다 되도록 놀았습니다.

 

 

 

지난 주에 또 전화가 와서는

정말 미안하고 면목이 없어서 회사 일로 다시는 전화 안 하려고 했는데

라며 운을 떼길래

이번엔 주말에 만나자고 했죠.

낮에 만나서 천천히 할 얘기 다 하자고. 

너무 고맙다면서 오늘 아침 열 시까지 저희 동네로 오겠다고 하길래

그 날 하루 다 비워 둘테니

(어차피 할 일도 없었음요)

토요일까지 알람 맞춰서 일어 나지 말고

일단 늦잠을 실컷 자고

일어 나거든 전화를 달라고.

 

 

 

그럼 내가 준비하고 있다가 전철역으로 나갈테니

편한 신발 신고 오라고 했어요.

전철역에서 15분 정도 걸으면 공원이 있으니 공원가서 얘기 하자고.

 

 

아침에 일어 나서 수퍼 가서 간 소고기 한 팩이랑

오이 한 개 사오고

밥 안치고

김밥 준비 했어요.

 

 

한 여름에는 탈나기 쉬워서 김밥 먹는거 아니라던데

요 며칠은 폭염 지나고 견딜만 하길래

그냥 쌌어요.

먹고 싶어서.

 

 

통 두 개에 나눠 담고 남편 몫은 접시에 담아서 주고

샤워하고

그저께 내 맘대로 혼자 잘라 놔서 거울만 보면 두통을 불러 일으키는 머리 정리해서 핀 꼽고.

 

 

평생을 미장원 다니면서 숱 많다고 구박 받는 머리인데

이게 길기까지 하니

아무리 틀어 올려도 연짱 90도 넘어 가면서 폭염 주의보 날릴때는

머리통에서도 땀이 흐르더군요.

이제는 나이 먹어서 머리카락이 그렇게 빨리 자라지는 않지만

그래도 염색만 하고 다듬은 지는 몇 달 되다 보니

갑자기 너무 답답해서 미치겠는 거예요.

 

 

셋째 성은 평생 머리숱이 없는 걸로

하도 고민을 하길래

머리숱이 없으면 어떠냐고 스타일로 볼륨을 주면 돼지,

그러면 저를 이글이글 타는 눈빛으로

그러나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곤 해요.

 

 

넌 몰라...

입 닥쳐...

 

 

셋째 성은 몸에는 잔털이 무지 많은데 머리에는 털이 없고

저는 몸에는 털이 없어요.

팔, 다리에 털이 하나도 없어요.

이것도 무슨 이상 증상의 하나 일런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몸에는 털이 없고 모든 털은 머리로 몰려서

언니들 세 명 머리숱 다 합친 것보다 제 머리숱이 더 많아요.

 

 

이제는 미장원을 따로 가지 않고

큰 언니가 염색이니 파마니 커트니 다 전담해 주는데

머리 할 때 마다

머리숱 많다고 타박.

 

 

저도 미용 기술을 배워 보니깐

힘들긴 하겠더라고요.

같은 돈 받고 해주는데 머리숱이 많으면 일이 그만큼 더 힘드니까.

 

 

그저께 갑자기 이 머리털들이 너무 답답해 보이고 짜증이 나서

혼자 막 잘랐어요.

언니랑 시간 맞추기도 어렵기도 하고

대충 끝만 조금 잘라내는 거면 나도 이젠 머리 자르는 가위 있겠다

한 번 혼자 해 보자 이래 가지고

끝만 조금 잘라 낸다고 시작은 했는데

 

 

원래 레이어가 있는 머리를 맨 끝만 잘라내면 어떻게 되겠어요.

조금 이상한 거예요.

그래서 이것만으로는 안되겠다 싶어서

사이드 뱅을 한 번 쳐볼까 해서 옆에 머리 자르고.

그럼 중간 머리는 또 어떻게 되겠어요.

그래서 혼자 궁리를 하고

인터넷 찾아 보고 주접을 떨면서 또 여기 자르고 저기 자르고.

계속 이 짓을 하다가

마침내 다 되었다, 하고 가위를 내려 놓고 머리를 말렸더니

 

 

80년대 행실 나쁜 로커같이 되어 있네요?

 

 

허 참...

 

 

남편은

더 야성적으로 보인다고

참 잘 하셨다고 하는데

저 사람 눈이 나쁜게 저한테는 얼마나 다행인지..

 

 

어쨌든

머리를 올리던 묶던 길게 내려 놓던

핀으로 수습을 여기 저기 해야 하는 상태입니다 지금.

 

 

손님을 만나러 나가면서

의상은 꽃무늬 맥시 드레스를 골랐고

머리는 어찌할까 하다가 밑은 풀어 해치되 위는 모자를 쓰자 하고

챙이 큰 모자를 쓰고 나갔습니다.

 

 

저를 보더니만

계속 웃으면서

완전 완벽 바캉스 차림이신데

자기는 너무 케주얼하게 입고 와서 너무 미안하다고 하길래

절대 그런 마음 갖지 마시라고

 

 

저는 원래 동네 돌아 다니는 차림이 이렇습니다.

이거 차려 입은 거 아니예요.

동네 계란 한 판을 사러 나갈 때도 저는 코디를 다 염두에 두고 입고 나갑니다.

이것은 꾸민 모습이 아니고

저의 원래 모습이예요.

지난 번에도 그러시더니 이렇게 자꾸 저의 평상시 편한 차림을 보고

차려 입고 나왔다고 하시면 곤란해요.

 

 

 

라고 말했습니다.

모 머리 망친 거 떠나서

저 말이 틀린 말이 아니긴 합니다.

모자는 절대 벗지 말아야지,

이 다짐만 되새길 뿐이죠.

 

 

 

공원 거진 다 가서 손님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런데 가게가 없나요?

 

 

하길래,

 

 

뭐 사실려면 전철역 근처에서 샀어야 했는데

거기 벗어나면 공원까지는 그냥 주택가예요.

뭐 사셔야 하는데요?

 

 

했더니,

 

 

아니 뭐 먹을 거라도 좀 사려고...

 

 

 

아침 안 먹고 바로 나오셨구나...

나도 배 고픈데.

후훗, 이 가방 안에 김밥 있어요.

 

 

 

공원 도착 했더니,

 

 

어머 이쁜씨,

여기 미국 같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원 좋다고 정말 행복해 하더라고요.

 

 

살아 보니

동네에 이런 공원이 있고 없고가 삶의 질에 아주 큰 차이더라,

여기로 남편이랑 운동 삼아 산책 온다고,

로 시작해서

 

 

조기 보이는 강은 이스트 리버 고요,

조 옆은 야외 수영장이예요, 공짜예요.

고 옆으로 가면 테니스 코트 있고 달리기 할 수 있는 트랙있고요,

트랙 밑으로 가면 뽕나무 있어요.

지나 가면서 오디 종종 따 먹습니다.

 

 

잔디밭에 준비해 간 자리 펴면서

여름 두 달 동안엔 여기서

월요일엔 야외 영화 보여 주고

목요일엔 밴드 공연 있어요.

 

 

아 이쁜씨 여기 너무 좋아요.

너무 행복해요.

회사 일 따위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요.

 

 

 

김밥 꺼내서 내 주었더니

 

 

아 저는 오늘 너무 감동이예요.

스트레스가 쫙 풀리는 것 같아요.

이쁜씨 너무 고마워요.

 

 

 

김밥 먹으면서

그간 있었던 사장의 만행 에피소드들을 쏟아 내고

저는 미친듯이 웃으면서 듣다가

심각한 주제로 갔을 때는

본인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고

신분 유지 목적으로는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없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상황도 덤덤히 준비 중이라고 하더라고요.

덧붙여서

사람이 석 달을 채 못 붙어 있는 그 회사에서

올드 타이머로 있는 다른 두 사람도

자기처럼 신분 문제 때문에 있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자기는 그렇게 하면서 까지는 여기(미국)에 있고 싶지 않고

있는 날까지는 그저 고객들 생각해서 일을 잘하고 싶을 뿐이라고.

 

 

 

저 나오고 나서는 사장이 더 막장으로 치닫고 있다고 하는데

얘기 들어 보니까

사무실도 확 다운 사이즈 해서 옮겨야 하는 상황이라고 하더군요.

 

 

저도 회사 나오고 나서

사장 생각하면 생까고 모른척 해도 괜찮은데

고객들 불쌍해서

제가 계속 사장 이메일 상대해 줬었어요.

아무렇지도 않게 저더러 잘 지내고 있냐고 물어 보면서

이건 뭐고 이건 뭐냐고 물어 보길래

참 이렇게 얼굴 두꺼운 것도 복이다,

내가 이 반에 반만큼만 얼굴이 두꺼웠으면 나도 돈 좀 만지고 살았을 수도 있었는데 하면서

이건 어떻게 된거고 저건 어떻게 된거고.

다 대답해 줬어요.

 

 

제가 하던 일을

그 회사 안에서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없고

새로 왔던 경험도 하나 없던 저 직원한테 급기야 공식적으로

이쁜이가 하던 일 니가 다 해라,

해서

일을 다 떠 맡았는데

자기는 아는게 없는데 사장은 일은 안 가르쳐 주고 일만 던져 놓고 가고

고객은 전화를 하고

미치겠다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염치없지만 이렇게 이쁜씨한테 부탁을 하러 온 거라고.

대충만이라도 설명 좀 해 달라고 해서

그래서 오늘 만난 거예요.

 

 

주디(가명)씨가 명심해야 할 것은

사장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모른다는게 말이 안돼지만 진짜 모릅니다.

자기가 안하고 직원들이 다 알아서 해 준 시스템으로 영업한 세월이 오래라.

알면서 안 가르쳐 주는 줄 알고

제가 약올라 잠 못 잔 세월이 석 달이고

나중엔 지도 몰라서 저러는 구나 해서 혼자 알아 내려고 고민하느라 잠 못 잔 세월이 석 달입니다.

제가 알고 있던 것과

알아낸 것은 다 전수해 드리지요.

 

 

그나마 저는 오래 전이라도 일 년 정도 했었던 일이라

어느 정도 기초 지식이라도 있었는데

저 사람은 그것도 아니니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사장 때문이 아니고

주디씨나

저나

오로지 고객들 생각하는 마음이 목적이니

저한테 미안해 하지는 마시고

우리 공부해 봅시다.

 

 

김밥으로 배 채우고 난 뒤

저는 질문에 답하고

예전 직장 동료는 열심히 메모하고

결과가 궁금했던 저의 예전 고객들 케이스 하나 하나 물어 보고 대답 듣고.

제가 다음 번에는

실질적인 케이스를 예로 들고 오시라고.

어차피 설명해 주고 가르쳐 주는 김에 당장 처리해야 할 실무 케이스로 공부하는게

더 실속있지 않겠냐,

 

 

미안해 하지 말고

다음 주건 그 다음 주건

물어 볼 거 있으면 미리 전화 달라고요.

 

 

 

공원에서 세 시간 조금 넘게 저렇게 있다가

자리 털고 일어 나서

저한테 시원한 거 한 잔 꼭 대접해야 한다길래

전철역 근처 스타벅스로 가서

모카 프라프치노 얻어 마셨어요.

 

 

 

프라프치노 마시면서

그 친구가 가져 온 랩탑으로

(과외받을 준비를 정말로 철저히 해 왔음)

몇 가지 보여 줬어요.

여기 가서 이거 보고 이건 여기 가서 보고

얘기해 주고

 

 

전철역 배웅하면서

나는 일 할 때는 정말 체력이 안돼서 주말이 이런거 할 염두도 못 내는 사람인데

주디씨가 괜찮으면

내가 다른 일 잡기 전까지는

매주 와도 괜찮으니까 나한테 미안하다는 생각은 하지 말고

그저 미리 스케줄 조정하게 전화나 해 달라고.

우리는 그 사람(사장)으로 피해를 받는 인생을 최소화 해야 한다는

인간적인 양심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니까

할 수 있는데까지 같이 해 보자고.

 

 

 

모 그 사람이 악행을 저질러서 그 죄값을 나중에 받고 그럴런지는 저는 모르겠는데

그 양심없는 행동을 너무 잘 아는 그녀를 거쳐간 우리들,

최소한의 인간적인 양심으로 이렇게 까지 하는 우리들,

동호회 하나 만들자고,

제가 그랬네요.

 

 

여태 살면서

직장 동료는 같이 일하는 사람이지 내 친구가 아니다,

하면서 같이 일하는 직장 동료랑 퇴근 후에 밥 먹으며 친하게 지내거나

(억지로 가야 하는 회사 회식을 제일로 싫어했던 사람, 나)

그만두고 나서까지

동료들하고 연락 계속 하고 산 역사가 없는 이쁜아짐인데

참 이 사장 인물이예요.

 

 

 

나는 항상

내가 너무 게으른 것과

내가 세상을 사는 자세가 마음에 안들어

자책에 빠져 사는 사람인데

오늘 저 예전 직장 동료와 오후 한 나절을 보내고 났더니

 

 

나는 적어도

내 배 불리자고 남의 돈 받아만 먹고 남의 등쳐 먹는

그런 인생은 살지 않았었고

앞으로도 그렇게는 살지 않을 거라는거.

 

 

항상 하는 도돌이표 찍고

원점으로 돌아온 둣

이젠 무슨 직장을 어떻게 구해야 하나...

고민하느라 잠 못 이루는 밤이 다시 시작됐어도

 

 

오늘은 왠지 좀 기분이 괜찮네.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한 것도 같은 것이..

 

 

집에 돌아 오자 마자

모자 벗어 던진 후

머리띠하고 올려 묵은 머리는

거울을 보니 좀 귀여운 듯도 하고.

후훗.

 

 

너란 여자,

어쨌든 당분간은

계속 이 세상에 살아야 하는 여자.

 

 

 

후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