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딩 주인의 배려로

아파트 뒷편의 아무도 모르는 조그만 골목같은 공간에

화분 열 몇 개 놓고 나만의 소박한 농사를 짓고 살기 벌써

3년째? 4년째?  되나?

 

너비로는 어른 한 걸음 정도.

바로 그 옆으로는 펜스가 쳐져 있고 다른 건물이죠.

이 옆 건물은 주거 아파트가 아니고 종교 단체가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희 아파트 사는 사람들하고 사이가 안 좋아요.

종교가 문제가 아니고 사람들이 문제라.

 

 

15년 전, 처음 이 아파트에 이사 왔었을 때는

한국 사람들 가는 조그만 교회였어요.

저희 집 거실이 저 건물을 맞보고 있는데

수요일 저녁이면 찬송가 소리 희미하게 들리고

일요일 아침에 예배 보는가 보다...하는 정도.

 

 

그렇게  5년쯤 지나고

10년쯤 전에

이 교회가 이사를 갔어요.

한인 아니고 다른 사람들 종교 단체가 사서 이사를 들어 왔어요.

그 때 부터 정신이 번쩍!!!!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 교회에서는 마이크를 쓰다 보다 하는 정도로 들리던

일요일 오전에만 들리던 그 소리가

오마나

마이크 볼륨 이빠이, 자다가 벌떡 일어 날 정도로.

요일도 없음,

새벽 다섯시 부터 저 난리,

일요일 밤 열 한 시 넘어서 까지 저 난리.

 

 

처음엔

311에 수도 없이 전화를 했고 (이 게으른 사람이)

지역 경찰서에 전화해서 하소연도 하고

 

 

신고하면 경찰이 꼬박 왔다는 가요.

하지만 왔다가 몇 마디 하고 가는 거지

법적으로 무슨 조치를 취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법대로 하자면 90데시빌 이상이어야 한다나?

그 90데시빌이라는게 나이트 클럽에서 음악 빵빵 울리는 정도라고

지역 경찰서에서 친절히 저한테 설명해 주더군요.

 

 

그럼 우리는...그냥 이렇게 소음 공해 속에 고통받고 살 수 밖에 없다는 얘기로군요.

 

 

법대로 하는 건 포기하고

나름대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반항을 해서

(바람 불고 날 좋은 날

창문 활짝 열어 놓고 마이크 볼륨 있는대로 올려서 시끄럽게 하길래

저 쪽 창문에 대고

나는 스피커 네 대 돌려 놓고 음악 있는대로 볼륨 올림)

창문은 닫게 만들었어요.

 

 

 

양심이 있으면 너네 창문이라도 닫으라고.

우리도 이런 날엔 창문 열고 바람 쐬고 살게.

 

 

나만의 성역인 텃밭으로 나가면

저 건물의 지하 공간이 있는데

창문이 지상 위로 있죠. 제 화분들 바로 앞에.

 

 

어느 날,

열린 창문으로

목소리로 감지하자면

열 살이나 됐으려나...

정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헤이 워먼!

 

 

이러더군요.

저 꼬맹이가 설마 나한테 수작을 부리는 건 아닐테고.

우습게 생각했나 보죠.

여자들 남자들 차이가 엄청나다고

그렇게 종교든 가정 교육이든 그렇게 받고 자라는 아이 였을 거라 봅니다.

입구에서 부터

여자, 남자 가르는 종교 단체다 보니.

 

 

대꾸하기 싫어서 저는 화초들 물만 줬어요.

 

 

헤이 유,

아 임 토킹 투 유.

유 프롬 차이나?

헤이 유.

아유 데프?

헤이 차이니즈 워먼, 아 임 토킹 투 유.

 

 

 

이 때 마침 저희 집 거실 창문 너머로 남편이

 

 

베이비, 이즈 에브리띵 오케이?

 

 

이러고 물어 보더군요.

 

 

소리에 민감한 남편이라

무슨 말소리가 들렸대요. 그래서 그냥 확인차 물어 봤던 거라고.

 

 

 

이 말 듣고 제가 기다렸다는 듯이

기차 화통 삶아 먹은 소리로 다다다다 해대기를,

 

 

나 원 참,

내가 화초들 물 하나를 맘편히 못 주네.

기가 막혀서.

이 옆 빌딩에서 웬 어린 놈의 자식이 나더러 헤이 워먼 이러면서

나더러 귀 먹었냐고,

인간들이 말이야 다다다다 다다다다 (욕)

 

 

 

이 소리 듣고 어른이 저 애를 창문에서 끌어 가더군요.

자기네 나라 말로 해서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어요.

아이 야단치는 건 같았는데

물론 저한테 미안하다 이런 말은 없었고요.

 

 

지난 달 초?

두어 달 전 쯤에

 

 

틴에이져 너댓 명이 저 비슷한 짓거리를 하더군요.

아오...열 확 받는 거예요.

제가 이번엔 물주던 통 집어 던지고

저기로 바로 쫒아 갔어요.

 

 

문 두드리는데 이 자식들 안 나오더군요.

 

 

집으로 뛰어 와서 핸드폰 집어 들고 바로 다시 달려 가서

또 두드렸어요.

안 나오더군요.

팔짱끼고 조용히 기다렸어요.

 

 

 

5분 쯤 되니까

이것들이 기어 나옵디다.

열 대여섯 살쯤 된 머시매 다섯 명.

 

 

팔짱끼고 정문에 버티고 서 있는 저를 보더니 화들짝! 하더군요.

사태 파악이 조금 됐는지

 

 

미쓰. 미쓰. 아 임 쏘리 로 시작해서

자기들은 별 뜻이 없이 그저 친구 하고픈 마음에 어쩌고 저쩌고.

 

 

됐고.

어른 데리고 와.

나 지금 경찰 불렀으니까

어른 데리고 와.

일단 내가 니네 사진부터 찍어놔야 겠다.

 

 

 

이러고 핸드폰 꺼내 들었더니

난리가 났네.

제발 그러지 마시라고. 사진은 왜 찍냐고.

 

 

나한테 소리 지른거 너지? 내가 니 얼굴이랑 옷 봤거든?

난 얘만 경찰한테 얘기할 거니까 나머지 니네는 빠져.

너 경찰하고 직접 대면하기 싫으면 빨리 여기 있는 아무 어른이나 데려 와.

 

 

여기 지금 어른은 아무도 없고

자기들은 그런 뜻이 아니었고

블라블라 이러고 있는데 밴 한 대가 앞에 서더니 덩치 산만한 아저씨 한 분 내리더군요.

뭔가 심상치 않아 보이니 빠른 걸음으로 저한테 오길래

제가 쟤네들 보호자냐고 어른끼리 얘기 좀 하자고.

 

 

그래서 저 아저씨가 어쩌고 저쩌고 나불대는 사내 녀석들 단호한 제스쳐로 막아 놓고

열 발짝 쯤 떨어져서 얘기 시작했어요.

 

 

나는 이 옆 빌딩 아파트 사는 누구고

(이름까지 정식으로 소개 했어요)

이 아파트 빌딩과 당신들 이 건물 사이의 그 조그만 공간에 화분 키우는 사람이고

화분에 물 주러 갔더니

오늘 아침 쟤네들이 창문 사이로 나한테 이러더라.

 

 

이 일이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

이번엔 내가 누군가와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왔는데

내가 너네 종교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메인 플로어 문은 두드리질 않고

여자들 가는 입구를 두드렸는데

쟤네들이 듣고도 안 나왔으며

내가 지금 기분대로라면 그냥 메인 플로어 가서 누구라도 나오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너네 종교를 최대한 존중하는 입장에서

지금껏 그냥 마당에서 기다렸다

 

 

 

니네들 허구헌 날 새벽부터 오밤중까지 시끄럽게 마이크로 질러 대는 소리만도 미쳐 죽겠는데

 

 

이런 소리는 일체 안 했어요.

 

 

정확한 거 하나만 잡고 들어가기 위해.

 

 

내가 당신들 공간을 침해한 것도 아니고

나 사는 공간에서 내가 키우는 화분들 물 주는 일에

왜 내가 당신들 아들들한테 해꼬지를 당해야 하느냐, 고 물었어요.

 

 

제가 하는 말마다

미안하다고 계속 그러더군요.

 

 

지난 번

꼬맹이가 그랬을 때는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지만

이번엔

틴에이저 아이들이고 한 명도 아닌 다섯 명이라

내가 위협을 느꼈다.

(과장)

그래서 경찰을 불렀다.

(뻥)

허래스먼트로 고발하려고 경찰을 불렀는데

경찰한테는 우리 집 주소를 줬다.

내 남편이 지금 경찰 기다리고 있다.

경찰 오는대로 남편이 경찰과 함께 여기로 올 것인데

(개뻥)

남편이 경찰 기다리는 동안

나는 책임지고 있는 어른하고 한 번 먼저 얘기라도 해 볼 생각으로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개뻥의 연속)

 

 

 

 

밴으로 아이들 데리러 온 저 아저씨가 마침

저한테 선두 주자로 약 올린 녀석 아버지더군요.

 

 

다른 애들은 모르겠고

나는 저 애 얼굴만 확실히 봤으니 경찰한테 저 애만 얘기 할 거라고.

그런데 이렇게 보호자를 만났으니

당신이 당신 아들과 다른 아이들한테 얘기를 한다면

내가 경찰한테 보호자랑 얘기 잘 됐다고 말하고 돌려 보낼 용의가 있다고 했어요.

(집에서 경찰 기다리는 남편 없는데

뽀록 나기 전에 모양새 있게 처리 해야 하니까)

 

 

정말 정말 고맙다고

자기가 애들한테 얘기 하겠다고

선처를 바란다고 하더군요.

 

 

당신과 당신들의 아들들에게 말해 달라고 했어요.

그녀를 내버려 두라고.

나는 나에게 허락된 공간에서

나의 식물을 키우는 사람일 뿐이므로

당신들의 아들들에게

그런 놀림을 받을 이유가 없다라는 거

 

 

꼭 주지시켜 달라고.

그럼 이번은 그냥 경찰 돌려 보내 겠다고.

 

 

 

집에 가서 저 눔 자식이 애비 쪽팔리게 했다고  뒤지게 맞았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고 제대로 된 훈육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내내 조용합니다.

 

 

남편이 저녁에 얘기를 들으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간만에 마눌님 한 건 하셨네요.

이런 모습 정말 오래 간만에 봅니다.

오랜 만에 보니 참 귀여우세요.

 

 

 

웃기냐.

난 얼마나 열이 받았었는데.

 

 

자기가 그 당시 현장에 없었고

상황 다 끝난 후에 보고만 받았으니 저리 여유롭게 웃는거지

만약

진짜로 내가 경찰 부르고

당신은 여기서 기다리다 경찰 오면 저리로 오라고

저게 진짜 상황이었으면

 

 

마눌님 제발 그러지 마시라고

내 치마자락 붙들고 사정했을 것임.

안 봐도 뻔함.

 

 

일 다 원만하게 처리한 후에

저 사람들이 여자 알기를 너무나 개떡같이 알아서 하는 수 없이

당신 팔았다,

경찰 기다리고 있는 시츄에이션으로.

말했더니

 

 

정말 머리는 좋으시다고.

잘 하셨다고.

 

 

 

하다 하다

언제는 밤 열 시 반에

자기들 펜스 고친다고 전기 톱 돌리고 난리를 치길래

제가 소리 질렀을 땐

(야 니네 진짜 지금 이래야 해? 낮밤으로 저 위에서 시끄럽게 하는 걸로 모자라 

이제는 이런 것 까지 이 시간에 해야 해?)

들은 척도 안하다가

남편이 옆에서 보다 끼어 들어

얼마나 걸리겠냐고 하니까

5분이면 된다고. 미안하다고.

 

 

뭐 이런 그지같은 경우가 있어요.

 

 

옛날에 한 번

너무 열 받아서

한참 저기서 뭔가 하고 있을 때

그냥 메인 도어로 돌진해서 한바탕 지랄하고 온 적이 있는데

남편이 그러더라구요.

저들이 우리한테 민폐를 끼치는 건 맞는데

저 사람들 입장에서 기분 나쁠 일을 우리까지 하지는 말자고

어쨌든 저 사람들 종교의 규칙이니까

그건 우리가 망치지 말았으면 한다,

 

 

해 가지고

제가 저 이후로 그 잘난 남자들만 써야 하는 메인 도어로 돌진하는 일은 그만 뒀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엄청난 참을성으로

여자들과 아이들이 이용하는 문만 두드렸어요.

 

 

옛날 같았으면

 

 

이것들을 그냥 확, 해 가지고

앞 뒤 안가리고

다 쪼사 버리고

경찰 정말로 부르고

난리를 쳤을 텐데

 

 

잔머리 조금 굴리면서

애 아버지랑 얘기 하면서도

저는 아주 차분하고도 예의있게 저 할 말을 했고

그러고 났더니

지금까지는 애 녀석들이 저 안 괴롭히고 조용합니다.

 

 

 

옛날엔

인터넷이고

길거리고

직장이고

 

 

한치도 물러남이 없이

너가 잘못한 거잖아,

웃겨,

내가 니가 뭘 잘못 했는지를 알려 줄까?

 

 

 

이러면서 살았는데

한 번도 대충 조용하게 물러난 적이 없었는데

그 땐

세상 사는거 내 맘대로 안되는 울화를

저런 싸움에 폭발 시켰던 듯.

 

 

 

지금은 일단

이게 싸울 일인지 아닌지

한 번 생각이라도 해 보고

싸울 일이 맞다면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또 한 번 생각해 보고

 

 

이러고 사니까

싸울 일이 거의 없고

몇 년 만에 한 번 이렇게 싸우게 되더라도

기운 덜 쓰면서 약게 싸우게 되네요.

 

 

 

세상이 변한 건 아니고

내가 세상을 사는 태도가 변한 거겠죠.

 

 

 

사사건건 짚고 넘어 가기엔

이제는 그럴 기운이 없네요.

짚고 넘어간다고 지랄 쳐 봐야

나한테 크게 남는 것도 없고.

안 짚고 넘어 가도 내 인생에 크게 지장 없는 사사로운 일들은

그냥 대충 넘어가고

 

 

그러다

그냥 넘어 가면 안되는 일이다 싶은 감이 오면

그래도 기분대로 마구 지랄치지 않고

좀 약게 처신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으로.

 

 

 

평화가 다시 찾아 온 저의 텃 밭에서는 깻잎이 아주 잘 자랐어요.

잘 자란 깻잎을 오늘 서른 장 쯤 땄고

동네 정육점에서

삼겹살을 사다

저녁을 맛있게 먹었어요.

 

 

화분에 물주러 갈 때 마다 조용하더군요.

이번엔 봐 주고 그냥 넘어 갔지만

어디 또 한 번만 건드려 봐라.

담 번엔 아주 아작을 내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