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아파트가 지금 빌딩에 거주하면서 관리하는 수퍼가 공석이예요.

 

한 일 년 정도 엄청나게 부지런하고 싹싹한 젊은 가족이 있었는데

몇 달 전에 나갔어요.

아저씨가 집 나갔대요.

경찰 오고 나중에 사복 형사들까지 왔다 가는

심상찮은 일이 벌어 진 후에

부인도 어린 애기 둘이랑 짐싸서 나갔고요.

 

 

빌딩 주인은 할아버지신데 이 분은 이제 거의 모습을 보이는 일이 없고

이 집 아들이 집주인 노릇 인계 받은지가 오래 됐어요.

수퍼가 갑자기 공석이 되고

아들 집주인이 낮동안 와서 쓰레기 처리니 간단한 건물 앞 비질이니

페인트 칠, 수리 이런거 하고 있고요.

 

 

이 사람이랑 남편이랑 베프된지 몇 년 돼요.

집 주인이나 저 아들이나 같은 동네는 살아도

이 건물에 살고 있지는 않으니

혹시라도 촌각을 다투는 비상 사태가 생길 때를 염두에 두고

(뭐 건물이 불이 났다든지 이럴 때요.

지하실 안에 다른 집들 열쇠 맡겨 놓은 것들도 있고 어쩌고 저쩌고)

건물 지하실 열쇠를 남편이 하사를 받은 그 이후 부터.

 

 

건물 지하실 열쇠를 자기 집 열쇠 꾸러미에 낑겨 넣으면서

자기를 얼마나 믿으면 그러겠냐고

어찌나 감개 무량해 하던지.

마치 미국 국무 장관이나 된 양.

 

 

저 열쇠를 간간이 사용은 하는데

촌각 다투는 비상 상황은 개뿔도 없고요

아침 일찍 전기 회사 사람이 와서 미터 읽는다고 할 때

아들 집주인이 자기가 오기 귀찮으니까

남편한테 전화해서 지하실 문 열어 줄 수 있겠냐고 부탁.

 

 

남편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 나서 후다닥 옷 줏어 입고

아주나 비장한 표정으로 어깨를 쭉 펴고 나갔다 옵니다.

 

 

저런 일 있는 날은

아들 집주인이

꼭 뭔가를 저희 집에 주고 가고요.

맥주 두 어병이든지

빵이라든지

암튼지 저런 인사 치레를 꼬박 해요.

 

 

동명이인인 저 두 사람이 수다는 또 얼마나 좋아 하는지

남편 불러내서 둘이 지하실 가서 수다를 떨고요

남편은 저기서 동네 소문은 죄다 줏어 듣고 와서 저한테 다 얘기해 주고요,

 

 

나는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

지금 팔십 쯤 된 4층 몇 호 말 많은 그 혼자 사는 할머니가

젊었을 때는 팜프파탈이었다는 둥,

집 주인 할아버지 사촌이 40년 전에 이 빌딩에 살 때

저 할머니가 꼬셔서 바람이 나서

가정이 파탄 났었다는 둥 이런 얘기에

 

 

옆 동 4층에 술주정뱅이 영감이

지난 밤 남의 집 현관에 오줌을 쌌다는 둥,

별 추접은 얘기까지.

 

 

셋째 성한테 가서 또 이런 얘기 해주면

셋째 성은

니네 아파트는 무슨 옛날 달동네 사람들 나오는 연속극 얘기 같다고

시트콤 써 보라고 하면서 깔깔깔.

 

 

지금 저희 빌딩 추세가

몇 십년 오래 묵은 세입자들 반,

그 다음은 왔다 갔다 자주 이사 나가는 젊은 한국 사람들 반,

이런거 같아요.

아무래도 맨하탄 접근성이 좋은 동네다 보니

건물은 후졌어도

동네 분위기 자체가

911 테러 이후부터 꾸준히 젊은 사람들이 늘어 오고 있고

술집에 식당에

먹고 놀자판 이런 분위기예요.

 

 

집주인이 한국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월세 절대 안 밀리고 살면서 여기 저기 고쳐 달라 불평 절대 안 한다고)

집이 비기만 하면 여지 없이

젊은 한국 사람들이 들어 오는데

어학 연수생들이 많은거 같아요.

오래 안 살고 이사들을 금방 금방 나가면서 짐을 많이 버리고 나가요.

 

 

 

집주인하고 친하다 보니

그리고 그 집주인이 저희 라이프 스타일을 이젠 꿰뚫고 있다 보니

어느 집 이사 나가면

남편한테 바로 전화 옵니다.

 

 

뭐 뭐 뭐 있다고.

 

 

남편이 전화 끊고 저한테 물어 봅니다.

 

 

뭐 뭐 뭐 있다는데요?

 

 

그래? 그럼 어디 가서 보자.

 

 

그래서 제가 가서 쓸만하고 필요한 것들 지정하고 먼저 나오면

남편은 집주인과 또 한 바탕 수다를 떤 후

물건들 가지고 집으로 옵니다.

 

 

지금 거실과 부엌 살림 휙 둘러 보니

내 주머니에서 돈주고 산 건 나무 책장 하나고

나머지는 다 저렇게 해서 가져 온 것들이네요.

때 묻고 구질구질한 것들이 아니라

이건 사서 두 세달이나 썼나?

싶은 그런 깨끗하고 거의 새 것인 상태인 것들만 가져다 놓은 것인데

그 때 그 때 가져온 것들이

저희 집 세간살이의 80%는 차지하는 듯 합니다.

아 웃겨.

 

 

빌딩 지하실이 꽤 넓은데

거기가 완전 보물 창고예요.

몇 십년 세입자들 들고 나면서

버리기 아까운 물건들 집주인이 차곡차곡 모아 놓은 것들.

뒤지면 뭐가 있어도 다 있을 것 같은 가구점 웨어하우스 같아요.

이제는 이사 나가는 집 소식이 없어도

집에 뭐가 고장나서 내버리면 제가 남편한테 시켜요.

 

 

다음에 폴 만나거든

스탠딩 램프 있나 한 번 물어 봐.

 

 

타겟에서 40불인가...그렇게 주고 샀던

방에서 쓰던 한 십년 쯤 썼던 램프가

완전 고장이 나서 지난 주에 내다 버렸거든요.

새로 사기 전에 한번 물어나 보라고 시켰더니,

 

 

있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가져 왔습니다.

 

 

 

저 아들 집주인이 이번 연휴에 친구들 가족이랑 여행 간다고.

 

 

아파트에서 쓰레기 내놓는 날이 일주일에 두 번이라네요.

목요일 밤, 월요일 밤.

목요일 아침에 출발 예정이고

쓰레기는 밤에나 내보내야 하는데

여태는 이런일 있으면 아버지 집주인이 와서 하셨거든요.

 

 

남편이 자기가 해주겠다고 제안을 한거예요.

 

 

아들 집주인은

또 남편이 진짜로 편하고 좋은지

늙으신 아버지 일부러 와서 하게 하느니 이렇게 하는게 좋겠다 싶었는지

그럼 그러자고 했다네요.

자기가 아침에 봉투에 다 담아 놓을테니

밤 9시 이후에 길로 봉투들 내놓아만 달라고.

 

 

처음으로 큰 프로젝트를 맡은 남편은

이 일로 인해 이야기가 필요하다면서

전 날, 그 전 날

미팅이라며 두 번이나 이 아들 집주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참 대단한 일

철두철미 하게 한다..

 

 

 

목요일 당일은

저 사람이 스케줄이 빡빡 했거든요?

돈 버느라 바쁜 건 아니고 순전히 노느라.

 

 

제 큰 조카 양이 사 준 야구표로

저희는 3년 만에 오후 한 시에 있었던 야구를 보러 갔었고

야구 보고 와서는

바로 옷만 갈아 입고

맨하탄 다운 타운가서 친구들 보러 시내 놀러 온 막내 여동생하고 술 마시러 갔었고

9시 30분에 집에 와서는

또 바로 옷 갈아 입고

 

 

대망의 프로젝트,

쓰레기 봉투 내다놓기 하러 나간다고.

 

 

밖에 선선하고 공기 좋으니 나도 구경하러 나갈란다, 했더니

구경만 하고 절대 나는 개입하지 않는다, 는 다짐을 해달라길래

다짐 해주고 쫒아 나갔어요.

 

 

 

어깨를 막 으쓱하면서

지하실 문을 열쇠로 열고

저한테 설명을 해주는 거예요.

 

 

이게 재활용 봉투고 이게 일반 쓰레기 봉투예요.

이렇게 장갑을 끼고 할 거예요.

내 놓는 김에 통에 있는 것들도 정리를 해야겠어요.

 

 

부탁하지 않은 것까지 한다고 오바를 하시네 이 양반이.

 

 

쓰레기 통들이 있는 곳과

밖의 길 중간에 있는 계단에 앉아서

선선한 밤 공기 즐기면서 구경을 했어요.

엄청난 사명감에 취해서 콧노래를 부르며 빌딩 쓰레기를 정리하는 남편을 구경했어요.

 

 

저 사람은...

참 단순하기도 하고

담백하기도 하네...

이런게 뭐가 이렇게 신나는 일이라고 저렇게 재미나게 할까.

어쨌든 바람은 시원하다.

어쨌든 저렇게 좋아하니 일단...초는 치지 말자.

초치지 말고 나도 바람이나 쐬면서 저 사람 즐거워 하는 이 순간을 맞춰주자.

뭐 돈드는 일도 아니니까. 에효...

 

 

 

큰 봉투를 나를 때는

우리 남편 천하장사라고 박수 쳐 줬고요.

 

 

처음 해보는 일인데

어쩜 이렇게 잘 해?

봉투는 어쩜 이렇게 차곡차곡 잘 쌓을까?

최고다 최고

진짜 잘 한다~

 

 

 

 

남편 쓰레기 봉투 나르는 동안

저도 응원하느라 계속 바빴고요,

일 잘 마치고 집에 들어 왔습니다.

 

 

 

이게 끝인줄 알았는데

어제는

자기가 저녁 한다고 부엌 잔뜩 어질러 놓더니만

저녁 먹자 마자

일 복으로 갈아 입더니 잠깐 일하고 오겠다는 거예요.

 

 

밖에 빗자루로 좀 쓸고 오겠대요.

 

 

아니,,,지네 집 청소나 좀 하지.

이 설거지는 어떡하고??

 

 

오바 중인 건 분명한데

저렇게 신나 하는데다 처음 있는 일이라 일단 잔소리는 삼켰어요.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이번엔 그냥 놔 두기로 하고

빌딩 밖 빗자루 질 한다고 남편 나간 후에

저는 꾹 참고 저녁 설거지를 하고

쓰레기 챙겨서 내다 버리러 나가서요,

열심히 빗자루질 하는 남편한테 인사했어요.

 

 

 

어머나...안녕하세요?

수고 하시네요~

 

 

 

그러고 지나가서 쓰레기 버린 다음에

들어 오는 길에  인사 또 했어요.

 

 

그럼 계속 수고 하세요~~

좋은 밤 되세요~~

 

 

그랬더니

 

 

네. 고맙습니다. 헤헤~~

 

 

 

참....

 

 

 

오늘 아침은요,

일어나서 거실로 나와

커피 내리고

한 잔 머그에 담아 마시고 있는데

방 안에서 기척이 나는거예요.

 

 

엥...이 기척은 뭐지? 설마...?

 

 

어머나. 정말로 일어 나서 침대 정리를 하고 있네요?

이 시각

아침 7시 54분.

 

 

저 사람이 일요일 아침 저 시간에 절대 일어날 사람이 아니거든요.

 

 

이건 또 무슨 일이래...

오래 살다 보니 저 사람이 이 시간에 일어나는 걸 다 보네...

 

 

하고 있는데

어느새 침대 정리 마치고

일 복을 챙겨 입더니만

빌딩 정리 좀 하고 오겠대요.

 

 

헉...

 

 

어제 오후에 필리스 아줌마를 잠깐 봤는데

쓰레기장 지저분하다고 불평을 했대요.

저 아줌마는 하루에 한 번 정도 아버지 집주인에 꼬박 전화해서

무언가 시정 사항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그런 타입 세입자.

 

 

이걸로 아버지 집주인한테 전화하고

그럼 노인네가

놀러 간 아들 대신해서 나와서 쓰레기 치우고

이렇게 될까봐.

이런 일 없이

자기한테 쓰레기 봉투 내다 놓기 프로젝트를 믿고 맡겨 준 친구한테

놀러 간 며칠 동안 자기가 완벽하게 빌딩 관리 해 줬다고 자랑하고 싶은걸까.

 

 

 

그러고 나가더니

한 시간 후에 들어 오더군요.

자기가 쓰레기 통에서 봉투에 말끔하게 옮겨 담아 놨고

빗자루로 빌딩 앞도 한 번 쭈욱 쓸어 놨다고.

 

 

오바 오바 오바...

 

 

 

아들 집주인은 오늘 돌아오고

내일은 여기로 출근을 할텐데

만나면 그럴까 봐요

우리 남편 조수로 트레이닝 시켜 달라고.

저렇게 좋아하는데

키워서 데리고 쓰시라고.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