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건강 관련 책 잔뜩 신청해서 가져다 놓고

몇 날 며칠을 붙잡고 있다 드디어 머리에 과부하 걸려서

다 팽개치고 요즘은 청소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이 달에 저희 결혼 기념일이 있거든요.

다음 주에는 저녁 한 번 나가서 먹기로 했고 어쩌면 영화도 볼지 모르고.

저는 이 달 초에 남편 결혼반지 수선해 줘서 그걸로 선물이다, 쳤고요.

 

 

남편 결혼 반지에 박혔던 알이 빠졌더랬는데

(비싼 돌이라고 돈 많이 주고 했고만 저렇게 빠져도 되는 건가요?

판 사람한테 가서 뭐라고 하니까 이상하다, 왜 빠졌지...이러고 말더라고요.

그 때 큐빅이라도 대신 넣어 달라고 했었어야 하는데..)

 

 

암튼 알 빠진 채로 그냥 끼길 벌써 몇 년인가 봐요.

제가 그냥 동네 보석상 아무데나 가서 비싼거 말고 큐빅 끼워 넣자고, 하루면 될거라고 해도

본인이 별 의욕을 안 보이더라고요.

알 부분을 밑으로 돌려서 끼면 감쪽 같다고 자기는 반지 빼서 맡기고 싶지 않대요.

 

 

올해는 제가 살살 구슬러서

이제는 거기다 알을 채웁시다. 우리 결혼도 10주년인데 말이야. 해가지고

보석상 갔더니

큐빅으로 채우면 20불에 돈 조금 더 얹으면 클리닝 싸악 해서 새 반지 처럼 해주겠다고 하는걸

저는 됐어요 그냥 큐빅만 해주세요.

이렇게 대답할 준비를 하고

 

 

옆에 서 있는 남편을 쓱 쳐다 보니

방긋방긋 웃으면서 아주 공손하게 저더러 알아서 해달라고.

 

 

클리닝도 하고 싶다 이 소린거죠. 아니면 됐다고 할텐테.

그래서 그것도 해 줬어요.

진짜 새 반지 처럼 멋있게 수리해 줬더군요.

남편은 입이 찢어져 가지고 저더러 선물 받고 싶은거 말하라길래.

 

 

제가 뭐라고 했을까~요?

 

 

결혼 10주년 기념 선물로

'화장실 청소' 해달라고 했어요.

 

 

일상적으로 대충하는 청소 말고 전문가의 손길을 거친 듯한

쌈박한 그런 청소.

를 원한다고.

확 디벼 달라고.

 

 

그래서 남편이 지금 페인트 칠하고 있어요.

빌딩 주인이 수퍼한테 페인트 칠 말해 주겠다 했는데

남편이 자기가 직접하고 싶다고

페인트랑 도구 빌려 왔더라고요.

 

 

 

아파트 빌딩이 워낙에 낡아서 뭘해도 태가 잘 안나긴 하는데

그래도 저렇게 해 놓으면 전보다는 낫겠죠 뭐.

 

 

수퍼가 하면 쓱쓱 쓱쓱 시원하게는 해도 꼼꼼하게는 안할 거라고

자기가 청소 선물 해주기로 한 거니까 자기가 페인트 칠하고 싶다고 했을 때

저는 흔쾌히 그러라고 했죠.

저 사람 요즘 시간도 많고 힘도 남아 돌거든요.

저런데 본인이 시간이랑 힘 쓴다는데 제가 굳이 말릴 이유도 없고.

 

 

페인트 칠하기 전에 밑작업도 꼼꼼히 하더라고요.

나같으면 귀찮아서 그냥 페인트 발라 버릴텐데

비눗물로 청소 싹 하더라고요.

마음에 든다고 격려를 해주고.

이게 이틀 전이고

 

 

오늘은 본격적인 페인트 작업 들어갔는데

열심히 일하는 사람한테 격려의 말 한마디가  필요할 것 같아서

 

 

사다리 위에서 페인트 칠하는 모습 섹시하다,

 

 

고 했더니

밥 먹으라는데 내려 오질 않네...

결국 큰 소리 쳐서 내려 오게 만들었어요.

 

 

 

지난 달 부터 지금 껏

제가 컨디션이 계속 안 좋은 상태라

저도 저지만 남편도 저 때문에 많이 스트레스가 쌓인 상태고요,

저 사람은 원래 자기가 가진 기운이 밝은 사람인데

제가 더불어 시궁창처럼 칙칙하게 만드는거 같아요.

 

 

 

남편이 약속대로 화장실 청소를 발 빠르게 이행하는거 보고

남편이 화장실에 들어가 있는 동안

저도 다른 곳 정리를 좀 했어요.

신발장도 정리하고

방도 조금 정리하고

옷들도 정리하고

부엌 찬장 정리하고

냉장고 맨 밑칸이랑 냉동실 정리

 

 

남편이 엄청나게 놀라고 있어요.

책 집어 던지고 침대에서 일어나서 몸 움직여서 요리도 아니고 '청소'를 하는 제 모습에.

 

 

클라짓 정리도 해야 하고

책장 정리도 해야 하고

냉장고도 마저 끝내야 하고

이 작은 원 베드 아파트에 정리할 곳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새삼 놀랍니다.

아직 갈 길이 멉니다.

특히 몇 년 간 쌓아 놓은 서류 뭉치들 제거. 으으윽...

짐이라는게 절대 줄지가 않네요.

되돌아 오지 않는 젊음처럼.

나이 먹으면서 쓸데없는 군살 늘듯이 그렇게 슬금슬금 늘어만 가요.

확 정리를 해야겠어요.

 

 

 

내일은

오랜 만에 둘째 언니네 가서 이틀 자고 올거예요.

애들 엄마 아빠가 다 집을 비우게 됐다고 와 달라는데

다녀 오면

남편이 페인트 칠 다 끝내 놓고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나면 다음 주에는

아무리 컨디션 안 좋아도

우중충한 낯빛 접고 밝은 얼굴로 남편과 저녁 먹어야 겠어요.

이게 진짜 나의 결혼기념일 선물 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