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뭘 손만 댔다 하면 다 죽이잖아요.

봄만 되면,

동네 꽃 가게에 모종 나오는 거 기다렸다가

궁댕이 들썩 들썩 거리며

허브는 종류별로 다 사다가는

한 달을 못 넘기고 죽이고 또 죽이고.

 

 

제 손에 안 죽어 나가는 건

파랑 알로에 밖에 없는데

나는 왜 끊임없이 봄만 되면 이렇게 뭔가를 키워 먹고 싶을까,

사다 놓고 내가 못 먹는 건 둘째치고

저것들도 생명인데

왜 자꾸 나는 키우지를 못하고 죽이기만 하는 걸까,

하나 사다 하나 죽고 나면

죄책감에 실망감에 머리를 쥐어 뜯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모종을 사다 나르고..

몇년 째 반복되는 이 허브들 사다 죽이기.

 

 

 

 

지난 번 시댁에 갔을 때

시어머님이 씨앗 주문하시는 회사 카탈로그를 보다가

새싹 키우는 재배기를 보고 마음을 확 뺏겼더랬어요.

시어머님께, 이거 한 번 해보고 싶다고 제가 수선을 피웠더니

시어머님이 당신 주문할 거랑 이거랑 해서 액수 맞춰서 주문하면

50% 오프 쿠폰 쓸 수 있겠다 하시더니

저희 집 주소로 친히 주문을 넣어 주셔 가지고.

 

 

재배기 이름은 'microgreens growing kit' 라고 아마존에서도 팔더군요.

 

 

손바닥만한 크기의 물 빠질 수 있는 구멍이 뚫려 있는 플라스틱 통 두 개에

뚜껑,

그리고 버미큘라잇(vermiculite) 이라고 하는 거, 흙은 아니고

씨앗이 잘 트게 하는 그런 역할을 하는 물건인가 봅니다.

아무튼 저걸 먼저 깔고 그 위에 불린 씨앗을 놓으라더군요.

그렇게 들어 있어요.

 

 

완전 치사 빤쓰로 씨앗은 포함이 안되서 따로 주문했어요.

보라색 무랑 브로컬리 두 가지.

(씨앗이 비쌌어요)

 

 

 

오마나, 이번엔 이것들이 정말로 싹을 틔우고 자라더군요.

이미 자라던 것들 사다가 죽이기만 하다가

씨앗으로 싹을 키우기도 처음,

정말로 키우기도 처음.

대단한 감동의 지난 열흘이었습니다.

 

 

 

수퍼마켓에 가면

무순이니 브로컬리니 알팔파니 파는 것들 보니

3불에서 4불 그렇길래 길러 먹으면 좀 싸려나? 싶었는데

(정말로 사다 먹기는 딱 한 번이었고만)

씨앗 값이 그만큼 들어서 좀 실망.

씨를 더 싸게 살 수 있는 데가 없나 요즘 열심히 검색 중입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키우는 재미는??

그건 재밌더군요.

정말로 싹이 트고 물만 뿌려 줬는데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것 보니

너무 신기한 거예요.

꼬맹이들 있는 집이면 아이들이 참여해서 키워도 좋을 것 같아요.

어른인 나도 이렇게 신기한데.

 

 

 

내친 김에,

동네 99전 가게에서 유효 기간 지난 씨앗도 사 봤어요.

사면서도 얼마나 웃었던지.

옆에 있던 남편한테,

자기야 이거 세일인데...유효기간이 2009년에 끝난거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로메인이랑 베이즐, 이렇게 두 개 사와서

흙 사다가 심어 봤어요.

남편이 옆에서, 아주 흥미로운 프로젝트가 될 거라면서

제 정신 건강에도 이 편이 더 좋을 것 같다고 하더군요.

 

 

살아 있는 화분 사다가 죽이느니

씨앗 사다 심으면, 싹이 안 나면 그만이고,

살아 있는 것 죽였다고 속상해 하지 않아도 될테니 이 편이 훨씬 좋겠다 하면서요.

 

 

 

오마나,,,,,

 

 

그런데 그저께요,

로메인 씨앗 심은 화분에서,

싹이 올라 왔어요.

 

 

아침에 보고 너무 놀라 가지고

오 마이 갓을 열 번쯤 외치면서 남편 깨워 가지고 보여 줬어요.

정말 눈물이 날 만큼 감동적이었어요.

내 손에, 내 손에...이렇게 씨앗이 틀 줄은...흙 속에 심은 씨앗이

이렇게 살아 꿈틀대며 흙을 치고 올라 오다니...

오 마이 갓...

이것도 다음 번에 사진 올릴께요.

 

 

혹시 관심 있으신 분들,

 

 

한국말로는'새싹 키우기'

영어로는 'sprouting'

 

 

으로 검색하면 많은 정보들이 나와요.

저렇게 검색 시작하면

재배하는 기구들도 여러 가지고

(좋은 건 100불 넘어 가는 것도 있더군요. 흐미)

씨앗 파는 웹싸이트들도 많이 나오고요.

 

 

저런 새싹들은

직사광선을 피해서 키우는 거라고 하네요?

유리창 가나

아니면 실내 불빛만 가지고도 잘 자란다고 해요.

큰 도시의 한 뼘만한 아파트에 살면서

하루에 거실에 빛 들어오는 시간이 얼마 안된다고 안타까워 하면서

수 많은 화분을 죽여 내보낸 후에 찾은

작지만 큰 행복.

 

 

새싹들 자라는 것 보고 흥분의 도가니가 되어

녹두 불려서 지금 숙주 나물도 하고 있고요,

(이건 그냥 물 빠지는 용기만 있으면 된다는 군요. 검색해 보니.

심지어 검은색 비닐 봉지에다 구멍 뚫어서도 키웠다는 것도 봤어요.

숙주나물 키우기로 검색하면 많은 정보들이 있어요)

 

 

응용 버전으로

조금씩 갈아서 샐러드 위에 뿌려먹던 아마씨,

그것도 오늘 셋팅해 봤습니다.

흥미 진진합니다.

 

 

 

단촐하게 무순하고 브로컬리로 시작했다

열흘이 지난 시점인 오늘 날,

저희 집 창가와 거실과 부엌 구석에 몇 가지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지...

 

 

잘 되면

몸빼입고 광주리이고 채소 장사 나갈지도 모르겠네요.

 

 

시식한다고

일부러 보리밥 지어서

검색해서 고추장도 생전 처음으로 볶아 봤는데

문제는 고추장이 떨어져서

냉장고 구석탱이에서 2009년도에 제가 담근 고추장을 꺼내서 볶았는데..

집에서 담근 거라 당연히 방부제 안 들어 갔고

오랜 만에 열어 보니 곰팡이가 쓸었길래

곰팡이 피해서 한 숟갈 덜어 볶은 건데

이거 괜찮은가 모르겠네요.

 

 

2009년에 유효기간 지난 씨앗도 싹이 텄는데

2009년에 담가서 곰팡이 쓴 고추장 한 숟갈 먹었다고 크게 탈이 나진 않겠죠?

안 괜찮아도 이미 먹었으니 할 수 없고.

 

 

고추장이 상했던지 어쨌던지

지금 칼럼을 쓰고 있는 이 순간

보리밥은 제대로 화답을 하고 있습니다.

 

 

 

방에서 야구 보던 남편이 조용히 나와서는

살포시 거실 창문을 열고는 다시 들어갑니다.

자기는 괜찮은데

제가 신선한 공기가 필요할 것 같다고 하면서.

소리만 요란하지 별 것 아니라는데도 그러네.

 

 

봄,

봄,

봄이 왔어요~!

보리밥 먹고 방구뀌는 봄이 왔어요~!

 

 

 

해가 바뀌고

계절이 바뀌어

그 길었던 밤들이 가니

싹이 트고

새로 자라고

해가 길어지고

이렇게 봄이 다시 왔다.

 

 

이렇게 나는 계속 살아가는 거다.

보리밥을 먹고 방귀를 뀌면서

나는 이 봄을 살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