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말에 시골에 다녀 오려고 계획 했었는데

(허리케인 왔던 바로 그 뒤)

중간 쯤에 위치한 마을에서 홍수가 나는 바람에 버스가 못 다녀서

무산이 됐었습니다.

 

 

시아버님이, 그럼 언제 올거니 언제 올거니, 다시 시간 조정해서 왔다 갈 수는 없는 거니,

 

 

사장님한테

노인네 애간장이 타신다고

선처를 호소하고 허락을 받아서

이번에 닷새 동안 가을 휴가 겸 다녀 왔어요.

 

 

데미안의 초입 부분에 나오는

양지의 세계와 음지의 세계를 동시에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의 내 인생.

천덕꾸러기로 한 평생 취급 하는 나의 친정과

미친 존재감으로 환영 받는 나의 시댁.

 

 

 

말만으로도 아련해야 할 '친정 엄마' '내 엄마' 로 부터

항상 거절당하는 사랑 때문에

치유가 됐나...싶으면 이쁜아짐 마음을 또 다시 한 번 찌르고 또 한 번 상채기 내는 내 엄마.

나도 엄마 자식인데 나는 왜 이렇게 몰라 줘 엄마는?

올 여름에 또 크게 한 껀 이쁜아짐 마음 상한 일이 있어 가지고

엄마한테 구박 받는 꿈이 컴백을 하여 자다가

남편이 자면서 엉엉 우는 저를 흔들어 깨우는 사태가

다시 종종 일어나고 있습니다. 악몽의 귀환.

어젯 밤에도 이런 꿈을 꾸었습니다.

이런 밤 후의 아침엔 눈꼽이 더 덕지덕지 끼어 있습니다.

눈물 마른 눈꼽. 덕지덕지 덕지덕지. 아 드러…

 

 

 

아...이 지독한 음지의 세계.

어둡고 춥고 쓸쓸하고 외롭고 마음...너무 아프고.

 

 

 

무조건 귀엽고 무조건 예쁘고 무조건 사랑스럽다는 내 남편이라는 사람의 부모님들.

아...이 따뜻한 양지의 세계.

편하고 즐겁고 기분...너무 좋아지고.

 

 

 

월요일 12시 30분 버스를 타고 출발,

4시 45분 정시에 시골 도착.

마중 나오신 시아버님께 남편이 잠깐 가게 들어 갔다 나오겠다고 말을 했습니다.

 

 

 

이 사람이 감자칩이 먹고 싶다네요.

그거만 한 봉지 얼른 사서 나오겠습니다.

 

 

 

아버님 얼굴에 화색이 도십니다.

 

 

트렁크 안에 짐 싣고 감자칩 들어 있는 비닐 봉지도 싣고.

 

 

 

얘, 그런데 집에 가서는 너희 어머니한테 꼭 네가 산거라고 분명히 말해야 한다.

 

 

네 아버님.

 

 

 

아버님이 수퍼 마켓에서 감자칩 못 사게 되신지 좀 되죠.

혈압 관리 하시느라 금지 목록에 낀 것 중의 하나.

과자를 좋아하지도 않는 제가

언젠가 부터 감자칩 한 봉지를 꼭 챙겨서 시댁으로 갑니다.

소금 조금 덜 들어 갔다는 것은 꼭 확인해서 한 봉지 삽니다.

 

 

 

두 분이 생활하실 때 확실하게 지키는 식이요법 규칙도

제가 가 있는 동안은 무장해제를 하시는 시어머님이라

얘, 너는 아버님 그런거 드시면 안되는데 아버님 먹고 싶게 그런걸 왜 사오니?

이런 말 절대 저희 시어머님 인품에 하시지도 않고

그건 그 아이가 먹으려고 사온 거라니 당신은 먹지 말아요,

라고도 절대 안 하시니

제가 한 봉지 사갑니다.

 

 

 

남편은 정말로 제가 먹고 싶어서 사가는 줄 알아요.

제가 다른 과자는 입에 안대도 감자칩은 가끔 먹기는 하니까.

 

 

 

아버님, 정말 무서운 속도로 감자칩을 드시더군요.

남편은 그 옆에서 질세라 같이 먹어 대고.

순식간에 덜어 내 놓은 것이 바닥나서 남편이 다시 주방에 와서

조금 더 가져 가도 되냐고 물어 보면서 당신도 빨리 와서 먹으라고.

안 그럼 자기랑 아버지가 다 먹게 생겼다고.

원래는 적어도 이틀에 나눠서 내 놓을 계획으로 큰 봉지로 산건데

두 사람 먹는 속도가...

저는 옆에서 몇 개 집어 먹다가 남편한테 그냥 남은 것도 다 아버님과 먹으라고 했어요.

 

 

이것으로 아버님한테는 효도 한 건.

 

 

저녁 먹고는 브릿지 게임 하자고 제안해서 어머님한테 효도 한 건.

 

 

 

어머님이 브릿지를 정말 정말 좋아하시 거든요.

그런데 아버님은 안 좋아하세요.

브릿지는 네 명이서 하는 게임이라

평소에는 두 분이서 같이 좋아 한다 해도 하실래야 하실 수가 없는 카드놀이.

 

 

 

사실 저도 별로 안 좋아해서

머릿수 넉넉할 때는 저랑 시아버님이 0순위로 빠지거든요.

 

 

 

그런데 이번처럼 저까지 해야 네 명이 되는 상황에서는

제가 합니다. 매일 밤이라도.

어머님이 너무 즐거워 하시는 걸 알기 때문에.

저 만큼이나 안하고 싶어하는 아버님 빼도 박도 못하시게

삐끼질까지 해 가면서.

 

 

아...진정 나는 효부상을 타서 신문에 한 번 나야 함.

텔레비젼에 나오면 더 좋고.

장한 사위상 따위는 없는 세상에, 기괴할 정도로 불공평한 상이라 심기 매우 짜증나긴 하지만

상금이 걸려 있다면...참자. 돈 앞에 장사 없다.

언제 상금 걸린 효부상 공모 나오면

본인 아닌 척하고 꼭 추천서 넣어 볼테다.

 

 

 

 

언젠가 어머님이 저녁 먹은 뒷처리 하시면서

살짝 저한테 말씀 하시길

네가 하자고 말 해라. 그래야 네 아버님이 군소리 없이 하실거다.

 

 

 

어머님이 하자고 제안 하시면

아...그거 머리 아프고 그거 하려면 머리 많이 써야 하는데 지금 너무 피곤하고...

블라 블라 블라....

결국 하시긴 하시죠. 본인이 안하겠다고 하시면 게임을 못 하니까.

그런데 안 하고 싶다는 본인 입장 피력을 30분 쯤 하세요.

어머님은 이 과정을 패쓰하고 싶으신 거죠.

처음엔 아들이 어머님 마음을 읽고 야심차게 제안 했다가 같은 결과가 나왔어요.

어머님이 그걸 보시고는

얘야, 네가 해 보렴.

 

 

그래서 한 번 그렇게 해 봤더니

 

 

아......

 

 

5초 정도의 긴 신음.

 

 

30분이 5초로 줄었으니 어머님 생각이 맞았네요.

 

 

그 다음 부터는

어머님 코치 없이 제가 그냥 알아서 말합니다.

내 말 한 마디가 이렇게나 확실한 효과가 있다니... 그 힘을 쓰는 재미로.

 

 

기왕 하는거 재미 붙여 보자고

저도 적극적으로 게임에 임하기 시작했고

실력도 이젠 왕초보를 벗어나

지금은 제법 규칙을 익혔습니다.

 

 

 

첫 날, 어머님이

단촐하게 '네 명'이니 벽난로 앞에서 브릿지 테이블 펴고 저녁 먹자고 하셔서

 

 

 

브릿지 테이블을 벽난로 옆에 펴고

상을 차리고

저녁을 먹으면서

 

 

불 옆에서 밥 먹으니까 정말 좋아요.

아버님, 불 때 주셔서 고맙습니다.

따뜻하고 좋아요.

벽난로 불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평화로운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우리 밥 먹고 나서 그릇만 치우면 여기서 바로 브릿지 게임 하면 되겠네요?

어머나 편리해라~~~~~

 

 

 

아버님은

이번엔 신음 소리가 3초로 단축.

 

 

 

어머님은 흐뭇한 표정으로 식사 계속 하시고

남편도 옆에서 묵묵히 먹던 행위 진행하고.

너무들 같이 맞장구 치면 짜고 치는 고스톱 같아지면서

아버님이 오갈데 없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듯한 외로운 느낌을 가지게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나머지 두 사람이 의연하게 대처하니

분위기가 훨씬 낫더군요.

 

 

 

브릿지는 2인 1조로 두 팀의 대결인데

예전에는

베테랑이신 어머님과 아버님이

초보인 사람들 중 하나씩과 팀을 이뤘는데

이렇게 하는 걸 아무도 좋아하지 않아요.

어머님이 너무 진지하게 게임에 임하셔서 팀 동료인 사람이 너무 부담을 느껴서.

어머님은 모르시지만,

어머님을 통해 브릿지를 배운 다른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견해.

 

 

 

저도 그렇고

둘째 시누 남편도 그렇고

큰 시누 남편도 그렇고

어느 날, 커밍 아웃을 하듯 다들 이 얘기를 하고 얼마나 웃었던지.

 

 

 

남편이,

당신만 그런게 아니고 다들 그렇다고 하네요ㅋㅋㅋ

이제부터는 꼭 제가 부인하고 한 팀이 되겠다고 할께요.

그럼 부인이 브릿지 더 재밌게 하실 수 있는거죠?

 

 

 

그래서

이제는 꼭 어머님과 아버님을 한 팀으로 묶고

다른 한 팀은 초보들이 알아서 꾸리고.

이렇게 하니까 게임이 훨씬 더 재밌어요.

어머님께는 죄송하지만.

 

 

 

어머님 아버님하고 한 팀이 되고

이쁜아짐과 남편이 한 팀이 되서는,

어머님의 엄청난 집중과 진지함에 대조되게

막가파 식으로 플레이를 했는데..

 

 

고스톱 칠 때도

항상 못 먹어도 고, 가 제 스타일이라. 

 

 

돈 내기 할 때도 저런 식인데

돈 내기도 아닌 게임에 호기를 못 부릴 이유가 없죠.

비딩도 아주 시원시원하게 했습니다.

 

 

 

어머님이 저를 한 팀으로 맞아

저를 브릿지 세계에서 정도를 걷게 하고픈 희망으로 너무도 진지하게

꿈나무 키우는 태도로 올인하셨을 때는

카드만 내 손에 쥐고 하라는 대로 하는 꼭둑각시인 듯한 기분이 들어 영 재미없더니

중간급 실력의 남편과 한 팀이 되서

베테랑 팀하고 맞붙으니까 더 재밌어요.

뭐든 지시 받는 것 보다 내 멋대로 해야

활기가 생기는 이쁜아짐.

 

 

 

송구스럽게도...

저희가 이겼습니다.

점수 차도 아주 아주 컸습니다.

 

 

 

남편이 더더욱 저를 존경하는 눈빛으로 봅니다.

도대체 이 여자가 해낼 수 없는 일은 무엇이란 말인가...하는 듯한

경외의 눈빛으로 이쁜아짐을 쳐다보는 남편을 향해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뽀뽀만 한 번 쿨하게 날려 줍니다.

장님이 문고리 잡았다는 한국 속담은 얘기해 주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어쩌다 운이 좋아서 이긴 거라는 겸손도 떨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재미나게 놀 때는 시간이 참으로 빨리도 가요.

사람은 역시 자기랑 궁합이 맞는 사람들과 더 많이 어울려 살아야

정신 건강에 좋음.

 

 

 

닷새가

하루 밤 짧은 꿈처럼 그렇게 가 버리다…

 

 

 

점심 먹고 거실 한 복판 카우치에 벌렁 드러누워 책 좀 보다가

잠이 가물 가물 올라치면

당신 목소리 조금 낮춰요, 쟤 잠 들려고 해요.

넌 위층가서 담요 한 장 가지고 내려와서 덮어줘라.

하는 어머님 목소리를 들으며 빠져 드는 낮잠.

 

 

 

이걸 처음에 겪었을 때는

감동, 이라는 두 글자를 새기며 잠에 빠져 들었어요.

나에게도 이런 일이 생길 수 있구나.

이 정도면 ‘금이야 옥이야’ 대접이다.

좋다. 이런 대접 받는 것.

 

 

 

며느리가 단잠을 자기를 바라는 시어머님의 바램에 어긋나지 않게

이 효부,

달디 단 낮잠을 두 시간 쯤 잡니다.

너무 짧게 자면 어머님 서운하실까봐.

 

 

남편은 연주 일정 때문에 며칠 더 있어야 해서

오는 길은 저 혼자 왔는데

그 댁 아드님 곱게 남겨 두고 오는데도 시아버님은 또 눈에 눈물이..

 

 

 

이럴 때 마다 당황.

솔직히 난…눈물까지는 안 나는뎅…아..괴롭다....

나같은 진정한 효부가 눈물이 안 나는데 억지로 쥐어 짜는 가식을 보일 수는 없고...

이럴 때 재채기라도 한 방 나와주면 좋으련만..

아...괴롭다...

 

 

 

 

연말에는 시간 빼기가 어려워 질 것 같긴 하지만

사흘이라도 꼭 왔다 가도록 해 보겠다고 말씀 드려서 조금 진정시켜 드렸어요.

나태한 생활로 자꾸 이쁜아짐 빈정 상하게 하는 얄미운 남편이

이런 부모님 덕에 오늘도 겨우 겨우 유부남 신분 유지하고 있습니다.

난 효부니까 

당분간 이 분들의 아들, 조금 더 데리고 살아 주려고요. 

 

 

 

어제 오랜 만에 찬장 정리를 하다 극적으로 마른 오징어 두 마리를 발견해서

물에 불려 놨는데

요거 요거

꼭 남편 있는 시간에 간장에 조려서 반찬 만들려고요.

오늘 비도 오는 것이 날씨까지 도와주네. 냄새 진짜 안 빠질텐데~

아조~ 잘 됐다~

 

 

 

남편 얄미울 때 마다 하는 반찬이

오징어 요리, 초절임무 종류, 그것도 남편이 방에서 나올 때 마다 일 없이 계속 뚜껑 열어 보고.

같이 산 지 오래 될 수록 싸우기도 지겹고 힘에 부쳐서

다소곳하게 이런 식의 고문을 하게 됩니다.

여차하면 동치미도 담그려고요.

이건 익어 가는 동안 일주일은 너끈히 사용할 수 있음. 아싸~

후후 기분이 갑자기 좋아지네~~~

 

 

 

사랑하는 남편아 어여 볼 일 마치고 빨랑 빨랑 집에 들어 온나

마눌님 준비 완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