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사흘 째..

 

남편은 출장 나흘 째..

(밴드 일로 갔지만...기분이다. 까짓거 출장이라고 이름 부쳐 주지 뭐)

 

집에 혼자 하루 종일을 있자니,

컴퓨터 조금 하다 텔레비젼 앞에 널브려져 있다가

또 다시 컴퓨터 조금 하다 그 다음 다시 텔레비젼 앞으로.

 

혼자 밥 먹는 걸 워낙에 싫어 해서 밥도 대충 먹는 둥 마는 둥.

 

 

 

 

토요일, 언니들하고 플러싱 가서 술 가게에서 막걸리 두 병, 백세주 두 병, 

삼겹살도 한 팩 사고 부추도 한 단 사고.

 

내일은 비가 온다니 부추 빈대떡 부쳐서 막걸리 마셔야지~~

 

 

하고는, 그 날 저녁 당장 막걸리 한 병을 맛만 보자 하고 땄는데

(몇 년 만에 사 온 막걸리라 당장 먹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대요)

어느 새 1리터 병이 비어 버렸네.

뭐 아직 한 병 더 있으니까.

 

일요일, 비 시작.

부추 빈대떡 부치고 이번엔 제대로 막걸리와 함께.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노래까지 부르면서. 그래 나 돈 없어서 집에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는다.

그런데 이건

비 오는 날, 부추 빈대떡과 막걸리는

옛날에는 궁상 시럽다, 했을런지는 몰라도

요즘을 사는 현대인에게 그것도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

이렇게 날씨 딱딱 맞춰 해 먹자니, 궁상이 아니라 환상이라는 생각이 들더이다.

 

그래서 두 번째 막걸리 병을 다 마시고 나니까

그제서야 한 병은 남겨 뒀다 남편 오면 같이 마실 계획이었던게 생각이 나더군요.

나도 모르게 너무 자연스럽게 두 병을 혼자 다 마셔 버렸네.

이건 타 날씨 탓이야....비 때문이라고...

하면서 어쨌든 증거 인멸, 빈 병은 깔끔히 치우자 해서 내다 버리고.

아직 백세주가 있으니까, 저거나 이제 건들지 말고 남편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자, 다짐.

 

 

다음 날, 월요일, 또 비.

 

 

흐미....

저는 정신 건강 상태가 날씨에 매우 크게 영향을 받는 사람인데,

어쩌다 하루 비는 괜찮습니다.

비 오는 날에 어울리는 음식 해 먹어 가면서

하루 정도는 어찌 어찌 버티는데

연짱으로 오면 이제 좀 힘들어 집니다.

 

 

아...날씨는 잊어 버리고 책이나 읽자.

 

 

장 영희 에세이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을 펴들고 읽기 시작.

 

토요일에 셋째 성 집에 갔더니 도서관에서 빌려온 한국 책이 예닐곱 권 정도가 있길래,

읽을 만한 걸로만 추천하라고.

제가 얼마 전부터 쓸데없는 책은 안 읽는다, 로 노선을 정립 해 가지고요,

그냥 한국 책이면 손에 잡히는 대로 읽는 쪽이었는데

이게 하다 보니까 읽으면서 도중부터 한심하기 짝이 없는 내용,

다 읽고 나면 시간 아까워서 짜증나는 책이 정말 너무 많더라고요.

 

 

그렇게 심하게 자질 미달인 출판물들을 책이랍시고 내가 잡히는 대로 다 읽기엔

시간 아깝고 머리 아깝고 그리고 들이는 체력이 너무 아까운 거예요.

예전엔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으면, 게으름의 극치나 아주 좋은 팔자, 유유 자적,

이런 개념들이 떠 올랐는데

지금의 저에게는 침대에 누워서 책 읽는 것도 '체력 소비'의 개념이 된지 오래거든요.

 

 

한참 몸이 안 좋았을 때, 침대에 누워서 며칠씩 천장만 바라 보고 있었을 때,

아 내가 그간 누워서 책을 보던 일 조차 체력을 요하는 일이었구나, 깨달았거든요.

 

 

결혼 생활이 일 년, 이 년, 삼 년...지나갈 수록

싸움도 기운이 좋아야 한다고 웬만한 일은 안 싸우고 대충 지나가게 되는 것처럼

한정된 기력, 질 나쁜 책 읽는데는 소비하지 말자, 힘을 아끼자,

이렇게 마음 먹어서

한 일년여 전부터는 셋째 성이 빌려다 놓은 것 모조리 가져 와서 읽고 내가 반납하던 시스템에서

이제는 셋째 성 스크린을 거칩니다.

읽을 만한 것만 추려 달라고.

 

 

그래서 이번에 가져온 건, 저 책 하나인데, 읽다 보니까

글 쓴 사람 성격이 저랑 비슷한 구석이 많아서 재밌고

문체도 요즘은 보기 힘든 겉멋이 안 들어가서 좋고 내용도 편안하고.

'샘터'에 기고했던 글들은 모은 거라는데,

책은 보니까...작년 5월에 초판 인쇄를 했다고 되있고,

그리고 넉 달 후에 암투병 끝에 저자는 세상을 떠났다고 하네요.

 

 

내용은 암 투병에 관한 무겁고 우울한 그런 것은 전혀 아니고요.

 

 

저자랑 나랑 비슷한 점이 많아서 재밌었다, 라고 했는데 그 중 하나.

 

 

제가 이 칼럼 쓰면서, 내가 성장하게 됬고, 나를 치유하게 됬다고,

그냥 나는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 뿐인데 이렇게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감사하다고,

그렇게 칼럼에 쓴 적이 있는데...

 

 

(나는 남을 가르칠 위치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삶의 연륜이 풍부한 사람도 아니고,

특정 전문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도 아니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시판에서 수다를 하는 사람이니,

기분좋은 수다를 떨어야 겠다.

 

잘 나지도 않은 사람으로 별로 잘 나가지 못하는 인생을 살고 있는 내가

가볍더라도 그저 기분 좋은 얘기라도 할 수 있으면 그것 참 다행이겠다.

나의 이야기를 하면서, 제가 속으로 영글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내 이야기 들어 주세요, 하고 글을 쓰면서

내 이야기를 하는 자체로 내가 갖고 있는 문제들이 많이 해소되는 느낌이 들어요.

그러면서 내 자신의 현재 위치도 다시 한 번 보게 되고, 감사할 건 감사하게 되고,

안되는 건 안되는 대로 또 어찌할까 차분히 궁리하게 되고.

 

나는 그간, 칼럼을 통해 내 이야기를 하면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었어서, 나는 그래서 많이는 지지리 궁상하지 않고

이만큼 무사히 온게 아닐까.

정말로 나는 운이 좋았구나.

 

                            2009년 새해를 맞으면서 썼던 글 중에서)

 

 

이분도 샘터에 기고를 하는 것에 대해 저랑 많이 비슷한 생각을 하셨었더군요.

그 부분 발췌해 봅니다.

 

 

 

무엇보다 글을 쓰면서 나 스스로 위로를 많이 받았다. 매일 비슷한 일상을 살고 있는 데다가 생활 반경이 좁아서 딱히 다른 글감이 없는 나는 한 달에 한 번, 그냥 내 마음 그대로를 고백했다. 가끔은 교수라는 직업 때문에 체면이 좀 신경 쓰이기도 했지만, 숨김없이 내 마음을 고스란히 내어 놓았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나면 못나고 삐뚤어진 나를 누군가 있는 그대로 받아 주는 느낌을 받았고, 그래서 내가 살아가는 방식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조금은 더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런 의미에서 독자들은 나의 고해 사제였다.

 

 

 

한 살에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를 절었고,

젊은 나이에 유방암, 항암 치료 끝에 유방암은 완치 판정을 받았는데

몇 년 후 척추로 전이가 되서 이번엔 척추암,

그리고 작년에 세상을 떠나셨다는데,

저는 요즘 정신 건강 상태가 좋지가 못해서 아주 슬프고 절망적인 이야기는 일부러 피해오고 있었거든요.

분노하고 파 헤쳐야 하는 큰 사건도 일부러 피하고 있습니다.

비겁하게 사는 인생이겠지만

자세히 알게 될수록 더 깊이 나도 슬퍼지고 절망할까봐

요즘 일단 바깥 세상 이야기 일부러 안 듣고 귀 막고 눈 막고 그러고 있어요.

 

 

그래서 이 책도 셋째 성이 저자 얘기를 하길래

암 투병하는 얘기가 주된 거면 안 읽으려고 했다가

그런거 아니라고 해서 받아 왔는데 읽기를 잘 했네요.

 

 

저게 어제.

 

 

오늘, 또 비.

 

 

사흘 내리 비는...

내가 오늘까지도 혼자 있으면 안되겠다, 내 정신력만으로는 감당이 안된다고 자가 진단.

남편이 하필 날씨 이럴 때 집을 비우게 된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나

나에게는 남편 말고도 내 사람들이 또 있으니.

셋째 성한테 저녁 먹으로 오겠냐고,

성이라도 와서 밥 먹을 일을 꽈야 내가 이 폐인 모드와 싸울 구실이 된다고,

그런데 날이 이래서 오기는 좀 귀찮지..? 했더니,

 

 

셋째 성은 제가 삼겹살 구워 주겠다는 줄 알고

귀찮은 건 절대 아닌데

(본인 말로 자기는 '특공대'라고 하니까.

제가 음식이 있다, 하면 물불 안 가리고 가지러 오거나 먹으러 오는 특공대래요)

삼겹살은 너네 신랑 오면 둘이 먹어라. 나는 됬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한국 채널에서 한우 고깃집 보여 줘 가지고

내가 지금 소고기가 먹고 싶다, 꽃등심 사다가 된장 찌개 해서 간단하게 먹지 뭐.

했더니, 바로 알았다고.

 

 

퇴근하고 바로 오면 6시 반쯤 된다길래 시간 맞춰 밥 눌렀는데

15분 정도 늦었더군요.

손에 들린 비닐 봉다리 받아 보니,

절대 동생 집이라도 단 한 번을 빈 손으로는 못 오는 그 눔의 성격.

 

 

델몬트 황도 캔 네 개가 들어 있더군요.

 

 

오다가 떨어 뜨려서 두 개가 찌그러 졌다고 찌그러 진 것부터 먹으라는

친절한 설명.

상 차린 것 보더니,

 

너는 찌개해서 고기만 간단하게 구워 먹자고 사람을 부르더니 또 뭘 이렇게 많이 했는데?

아휴...아주 갈비집 같구나...

 

 

찌개는 찌개고, 고기 구워 먹자하면

파무침에 무채 절임이랑 계란찜은 기본 아닌가요?

상 차려놓고 나면...뭘 한다고 정성껏 하긴 했는데 별로 폼이 나지 않는 것 같아

항상 아쉽고 외려 속이 상하는구만..

 

 

저녁 먹고, 셋째 성은 느긋하게 저희 집에서 세수까지 하고

자기 집에 케이블이 없으니 이 참에 한국 드라마 하나 보고 가겠다고

한국 채널들을 열심히 돌리다가

저희 집 리모콘 너무 더럽다고 리모콘 깨끗이 닦아 주고,

 

 

어떻게 하면 리모콘에 때가 낄 수 있니?

 

 

그래서 저도 그건 모르겠다고 성심성의껏 대답해 줬어요.

그렇게 놀다가 열시 넘어서 자기 집으로 가고

저는 전철역까지 성 배웅해 주고 들어와

많이 나아진 기분으로 칼럼을 씁니다.

 

 

오늘 밤만 잘 넘기면,

 

 

내일은 비가 이제 더 이상은 안  올거라고 하고,

출장 간 서방님도 집에 올거고,

그럼 삼겹살 구워서 백세주는 그 때 마시면 되겠다.

 

 

오늘 하루 잘 넘기면,

내일은 나으리라.

 

내일은 오늘보다 나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