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남편하고 함께 하는 것 중에 이쁜아짐이 제일 좋아하는 건,

손잡고 동네 돌기.

 

 

남편이 직장 일로 한참 바쁘던 시절에는

평일에는 꿈도 못 꾸고, 주말에도 어쩌다 어쩌다 한 번.

그것도 집 앞 수퍼 마켓이나 채소 가게 정도.

지금처럼 한 시간 코스로 돌고 오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남편이 직장과 안녕하게 된 이후로, 가장 좋았던 점.

이야~~산책할 수 있다~~!!!

 

 

그러다 제가 일을 하면서 부터 또 8개월여 뜸~ 했다가

이번에 제가 직장과 안녕하고 부터는 한 시간 코스 산책을 거의 매일(비오는 날만 빼고) 합니다.

두 사람이 산책에 완전히 맛이 들린 나머지 심지어 요즘은,

싸구려 우비라도 장만해서 비오는 날도 나오자, 이런 방안도 논의 중이고

어떤 날은 한 번은 상가 쪽, 집에 와서 밥 먹고 조금 쉬다 이번엔 공원.

이렇게 하루에 두 시간 한 날도 있고요,

 

 

요즘처럼 70도 내외의 기온에 햇빛이 나는 날이면 

산책 하기에 아침, 오후, 저녁 아무 때나 다 좋습니다.

 

 

운동도 안 받는 찌질한 체력 가지고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걷기 아니면 요가인데

(예전에 짐에서 자전거 타기 30분 하고 3일 드러 누웠던 과거가...)

 

 

이 성격에 기계 위에서 한 시간을 걸어라, 하면 지루해서 절대 못 할 거 같은데

남편이랑 손 잡고 동네 돌 때에는 한 시간이 얼마나 재미나고 즐겁고 유쾌하게 지나 가는지.

앞으로 남편도 좀 더 바빠질 듯 하고

(이렇게 저렇게 걸쳐 놓은 데서 하나 둘 소식이 오고 있네요 요즘)

저도 오늘 내일이라도 일자리만  잡혔다 하면 바로 튀어 나가야 하니까

할 수 있을 때 열심히 하자, 해가지고 매일 매일 나갑니다.

 

 

남편이나 저나, 따로 친구들하고 볼일 만들어서 나가는 일이 극히 드문 사람들이라

일 관련 볼 일 아니고는 요즘도 둘이 집에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요.

남편이 텔레비젼 앞에 앉아 있을 때 저는 거실에서 컴퓨터를 한다거나,

남편이 텔레비젼 앞에 앉아 있을 때 저는 부엌에서 음식을 만든다거나,

남편이 텔레비젼 앞에 앉아 있을 때 저는 그 옆에 누워서 책을 읽거나 신문을 보거나,

남편이 텔레비젼 앞에 앉아 있을 때 저는 창가에 놓인 화분 쳐다 보고 앉아 있거나,

그러면서 왔다 갔다 한 두 마디씩 하고 밥 먹고.

 

 

어른 걸음 열 발짝이면 구석구석 안 닿는 곳이 없는 이 넓~은 원베드 아파트에서

둘이 많은 시간을 '따로 또 같이'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산책하는 한 시간 동안은,

서로 상대방에게 100% 집중하면서 얘기 할 수 있어서 좋고

우리 두 사람이 같은 곳을 바라보고 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이 참 좋아요.

함께 남은 인생 살자고 한 결혼 생활의 축소판 과정이라고나 할까요.

 

 

결혼 생활,

둘이 함께 같은 방향을 향해 긴 여정을 가는 것.

꼭 잡은 손처럼 둘이 함께 여정에 있는 어려움도 즐거움도 같이 하는 것.

상가로 가던 공원으로 가던 목적지보다 오고 가는 동안의 즐거움이 더 의미있는 것처럼

결혼 생활도 그렇게

목표와 목적을 정해 놓고 숨가쁘게 사느라 지금을 희생하는 것 보다

지금 하루 하루를 소중하고 행복하게 살면 나중 도달한 목적지가 생각처럼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여정을 즐겼으니까 그걸로 보람있을 수 있는 것.

 

 

그래서, 결혼 생활의 축소판인 그 한 시간 산책 동안에 우리 부부가

서로에게 100% 집중해서

얼마나 대단하고 질적으로 훌륭한 부부간의 대화를 하느냐..하면,

 

 

예를 하나 들자면 이렇습니다.

 

 

어느 집 화단에 개나리가 핀 걸 올 봄 처음으로 보게 된 날,

 

 

어머나 이거 피었네. 이제 진짜 봄이네.

한국에도 이거 많다~

나 살던 동네도 이거 많았는데... (미아리 고개를 추억하며)

한국 이름은 개나린데...여기 이름은 뭐야?

 

 

남편은 조금 갸우뚱 하다가...

 

 

아...잘 모르겠는데요.

 

 

아하. 이 꽃나무 이름이 '아..잘 모르겠는데요' 구나. 알려줘서 고마워.

 

 

저렇게 이쁜아짐의 왕유치 생활 유머로 심드렁하게 받아치면

왕유치 아줌마랑 사는 남자 왕유치답게,

 

 

아하하하 아하하하.

아니예요 부인. 꽃나무 이름이 '아...잘 모르겠는데요'가 아니고요,

제가 이 꽃나무 이름을 모른다고요.

아하하하 아하하하

부인 왜 이렇게 귀여우세요. 아하하하 아하하하~

 

 

이런 식의 대화가 저희가 산책 중에 나누는 대화의 60% 입니다.

 

 

정상인들이 우리 부부의 저런 대화를 엿듣는 다면

분명 한 쌍의 또라이 남녀로구나...할테지만

당사자인 이 유치부부는 맨날 저런 식의 썰렁한 한 마디와 웃겨 죽겠다고 배꼽잡는 행위를

질리지도 않으며 반복합니다.

 

 

쓸데없는 얘기하면서 웃기 60% 빼고 나머지에서 39%쯤은 맛있는 것에 대해 토론, 

마지막 1% 정도, 가뭄에 콩 나듯 한 번씩 진지한 얘기.

 

 

그제 산책 길에, 거진 다 집에 왔을 무렵에 저 1% 상황이 발생을 해서

둘이 말싸움 상황까지 번졌더랬죠.

집 도착 5분여를 앞두고, 남편이 이제는 말할 때다, 이렇게 굳은 각오를 했는지

결연한 목소리로 얘기를 꺼내 더라고요.

 

 

지금까지 둘이 합의가 안되서 꽤 오랜 시간 동안 옥신각신 해오던 문제였는데

결단을 내리겠다는 태도로 단호하게.

 

 

저의 입장은, 남편이 엄한 소리를 하고 있다, 현실성이 없다,

이런 쪽이었고요.

 

 

남편의 오른 손과 이쁜아짐의 왼손을 맞잡은 채로

남편이 '부인, 이 문제는 이렇게 처리합시다' 라는 말을 결연하게 내던지자 마자

1초 후부터 바로 제 왼손이 젖기 시작합니다.

 

 

남편이 긴장하거나, 불안할 때 손에서 땀이 심하게 나거든요.

저 아저씨도 맨 정신으로는 비행기 못타는, 비행 공포증이 있는 사람.

특히 이륙할 때가 절정.

이륙 직전에 비행기가 활주로 진입하는 순간부터 손 바닥에서 땀이 비오듯 합니다.

그래서 어디든 비행기 타고 갈라치면 미리 공항 안 술집에서 위스키 두 잔 기본으로 마셔 줘요.

 

 

큰 결심하고 단호하게 자기 생각을 용감하게 내던지고 나서는

이제 뒷감당은 어떻게 하나 싶었는지

바로 손바닥에서 땀이 비오듯.

 

 

남편 손에서 땀이 저 정도 나올 때는 보통 제가 잡고 있던 손을 느슨하게 풀고

손가락 두 개 정도만 걸치는 식으로 자세 변경을 하는데

제가 이번엔  잡고 있던 손 안 풀었습니다.

자세는 변함없이 하고 할 말은 다 하고요.

기존 입장 저도 되풀이. 나도 강경하게.

 

 

5분 동안 설전을 벌이다 집에 도착.

화장실에서 손 씻고 나오자 마자 컴퓨터 켜고 (방해하지 말라는 메세지)

남편은 방 안으로 들어 가고. 30초도 안되서 다시 나와서는

자기는 밖에 나가서 좀 더 걷고 오겠다고.

그리고 좀 전에 말했던 건, 당신 하고 싶은대로 하자고.

 

 

제가 대답을 안하니까,

 

 

제 말 들으셨어요? 당신 원하는 대로 하자고요.

 

 

...왜?

 

 

(완전 뾰로통한 목소리로) 그래야 당신이 행복 하니까욧!

 

 

이러고는 팩~ 토라진 얼굴을 하고는 바로 휑~ 하고 나가 버리네.

저는 남편 나가자마자 형식적으로 노려보고 있던 컴터 앞에서 발딱 일어나 가지고

냉장고에서 당근 꺼내서 채썰어 볶고 시금치 무쳐 놓은 것 꺼내고 단무지 얇게 썰어 가지고

꼬마 김밥을 말기 시작했습니다.

 

 

꼬마 김밥 열 줄을 말아갈 때 쯤엔 시간이 30분 쯤 흘렀어요.

한 김 식은 시점이 된거죠.

속상해서 집 나간 사람, 집에 다시 들어오는 보람과 들어올 명분 있으라고

이쁜아짐, 서방님께 친히 전화를.

 

 

뭐 먹을거 사 갖고 들어 올거야?

 

(골난거 다 풀어지고 예의 발랄한 목소리로 돌아왔더군요.

남편도 30분 동안 체념하고 마음 다스리기 끝난 시점)

뭐 사 갖고 들어갈까요? 필요한거 있으세요?

 

아니, 그거 접때 했었던 그거 얇은 김밥 싸 놨다고...

 

아 네. 지금 금방 들어 갈께요.

 

응.

 

사랑해요. 아 그리고,

......전화해 줘서 고마워요.

 

응. 얼른 들어 와. 보고 싶으니깐.

 

아 네. 금방가요 금방. 헤헤헤.

 

 

저래서. 싸움도 참 유치하게 화해를 하고 사는 요즘입니다.

 

 

길거리에서 설전이 오가던 그 순간에  제가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지나가는 남들도 잘 안들릴 만큼

낮은 볼륨을 지켰다는데에

내가 참 많은 발전을 했구나... 얼마나 대견했던지.

예전 같았으면

남이 지나가거나 말거나 듣거나 말거나 쳐다 보거나 말거나

꽥꽥 고래고래 하고 싶은 말, 소리 다 지르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남편이 집에 가서 얘기하자고 사정하면

휙 돌아서 혼자 성큼성큼 와 버리고,

집에 와서는 이제 물만난 고기처럼 더 기세 등등해서

본격적으로 미친소 날뛰기 짓 시작하고.

이래서 결국은 남편이 다 잘못 했다고 싹싹 빌어도 본체 만체

며칠 동안을 말도 안하고 본체 만체 쌀쌀맞게.

 

 

저랬던 과거의 모습에 비하면 오늘 날의 이쁜아짐은 개과천선도 이런 개과천선이 없네요.

이 사람이 마누라한테 고작 소신껏 의견 피력하기를 얼마나 겁이 났으면

이렇게 손바닥에 땀을 비오듯 흘리나...

지금 이 상황이 비행기 이륙 만큼이나 이 사람한테는 두려운 상황이구나..

비록 이 사람의 의견이란 것이 내 생각엔 여전히 말도 안되는 소리이긴 하나,

그래도 나는 지금 이 사람의 땀이 흥건한 손을 놓지는 않으리라.

 

 

이 손을, 놓지는 않으리라...

둘이 함께 맞잡고 있는 이 손을 놓지는 않으리라.

이렇게 같이 앞을 보고, 이렇게 끝까지 집으로 가는거야.

이 손, 나는 놓지 않는다.

 

 

흥분하지 말자, 흥분하지 말자. 저러면서 집까지 왔거든요.

 

 

저 날 오후는 김밥 맛있게 먹고 아무 일 없었던 듯 저녁 나절도 잘 보내고

이 일에 관해선 다시 언급을 안하고 그렇게 그날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에 제가 얘기했어요.

이번 일, 당신이 말한 대로 그럼 그렇게 하자고.

 

 

이게 결혼 생활 8년째 접어든 이 시점에

내 의견 굽히고 남편 의견 접수한 게 처음 있는 일이라지요.

사소한 것은 기분 내키면 알랑방구까지 살살 뀌면서 어르고 달래고

살랑 거렸다가 선심 쓰는 척 생색도 내고 하지만 

굵은 사안은 절대로 양보라는 걸 안하는 이쁜아짐이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그렇게 하기로 했어요.

 

 

두 사람 다 걸린 일이고, 어차피 결혼 생활이 둘이 함께 하는 건데

매번 '나를 따르라' 장군 노릇 하기가 좀 거시기 하고

나는 한 번 져주기도 이렇게 속이 터지는데 그간 이해를 충분히 해서 동의를 했던

아니면 집안 시끄러울까봐 울며 겨자 먹기로 항복을 했던

남편은 참으로 속이 안으로 썪었겠구나 싶기도 하고.

 

 

제가, 당신 뜻대로 합시다, 한 이후로

남편은 너무 너무 행복해 하면서 방긋방긋, 방실방실 해맑은 태도로

일곱살 소년같은 아무 걱정없는 표정으로 다시 텔레비젼 앞의 자기 자리를 열심히 지키고 있습니다.

 

 

저 날 불끄고 잠자리에 누워서는

남편의 오른 손이 제 왼손을 더듬 더듬 찾아 꼭 쥐더니만

정말 가슴 저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절절한 감사 인사를.

그렇게 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부인. 사랑합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가 매일 매일 산책하는거 그게 아무리 쓸데없는 소리가 대부분이라도

그게 정말 쓸데없는 건 아니고

부부간에 그렇게 쓸데없는 소리라도 많이 해온 것이

갈등이 생겨서 진짜 대화가 필요할 때 잘 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당신 한참 바쁠 때 우리가 그걸 못했어서 그게 나의 큰 스트레스 였다고.

지금 우리가 이런 시간 함께 하는게 은행에 돈 더 있는 것 보다 저는 백배는 더 좋다고요.

 

 

우리가 그렇게 함께 걸으면서 한 그 모든 실없는 얘기들,

우리끼리만 통하는 농담들,

그게 우리가 '진짜 얘기'를 잘 할 수 있는 밑천이라고. 우리 재산.

 

 

이 얘기하면서 또 다른 한 시간 코스 하나 생각해 냈어요.

트라이보로 브릿지.

저희 사는 퀸즈에서 맨하탄과 브롱스를 연결해 주는 이스트 리버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인데

독립 기념일에는 강 건너 맨하탄에서 하는 불꽃놀이 구경하려 꽤 많은 사람들이 올라 가요.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것 중의 하나가 맨하탄 야경 같아요.

화려하면서 적당히 쓸쓸한 기분도 들게 하는.

 

 

7시 쯤 나가서 맨하탄 마천루 뒤로 넘어가는 저녁 해 구경 합시다.

 

 

좋아요 좋아. 내일 당장 가요~~

 

 

그래, 일자리야 구하면 되고 돈이야 벌면 되지.

너무나 상투적인 러브스토리 희망 사항이지만

정말로 진심으로 절실하게, 우리 이렇게만 살아서 인생 말년에도

지는 해가 물들이는 저 예쁜 하늘처럼, 그런 부부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