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6일 2010년, 뉴욕 데일리 뉴스 일요판 부록, 48페이지에 걸친 월드컵 특집.

B조, 아르헨티나, 그리스, 한국, 나이지리아.

신문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피파 랭킹 7위, 16강 진출 확률 90%

그리스 피파 랭킹 12위, 16강 진출 확률 40%

한국 피파 랭킹 47위, 16강 진출 확률 40%

나이지리아 피파 랭킹 20위, 16강 진출 확률 40%

 

 

한국 피파 랭킹이 생각보다 낮아서 ??? 했다가

더 흥미로운 것은, 전문가들이 진단한 16강 진출 확률이 나머지 세 팀이 똑같다는 것.

아 재밌네.

 

 

제 나름 월드컵 준비는 지난 달 대청소 하면서 때마침 나와 준

응원 의상과 도구들 꺼내서 잘 챙겨 놓은 것.

티셔츠 내 것, 남편 것,

반다나 두 장,

태극기 두 장.

 

 

저 사는 동네가 아스토리아.

뉴욕의 그리스 타운이잖아요.

그리스를 제외한 해외에서의 그리스인 인구 밀도가 전 세계에서 제일 높은 곳이 저희 동네라고 하더라고요.

 

 

매일 다니는 길목 중에 제일로 장사 잘 되는 카페에서는

며칠 전부터 흰 테잎으로 여기 저기 줄 긋고

단체 응원 준비 하더라고요.

술집마다 다들 '월드컵 전 경기 생방' 싸인 걸어 부치고.

 

 

남편하고 전략을 짜면서

 

 

내가 벌써 이 집에서 월드컵이 네 번째네.

1998년, 2002년, 2006년 그리고 올 해.

그 때 마다 태극기 창문에 걸어 달았는데 이번처럼 고민이 된 적은 없네.

 

 

이 영세민의 고민인 즉슨,

그리스인인 빌딩 주인이 워낙에 마음이 좋은데다

어찌 어찌 이 이쁜아짐이 참 잘보여 가지고

해마다 갱신해야 하는 계약서를 몇 년 째 고대로 살고 있다는 지금 상황인 거죠.

계약서를 새로 쓰면 일년 짜리냐 이년 짜리냐에 따라

4%를 올리느냐, 6%를 올리느냐 그 문제가 걸려 있는데

한 4년 전 부터 아예 계약서도 안 가지고 오더라고요.

그래서 마냥 그 월세 그대로 살고 있는게 몇 년 째.

지금 12년 째 살고 있으니 정석대로라면 계약서를 최소 여섯 번은 갱신 했어야 하는데

지금 껏 딱 세 번 갱신 했어요.

 

 

이거 눈치없이 그리스랑 한국 경기에 태극기 걸었다 밉보여 가지고

계약서 들이 밀면 어떡하나..

그런데...내 마음도 중요해서 나는 꼭 하던대로 태극기를 걸고도 싶은데...

 

 

남편이 그냥 걸라고 하더군요.

빌딩 주인 아들하고 우리가 친하니까 갑자기 월드컵 경기 때 태극기 걸었다고

월세 올린다 소리는 안 할 것 같다고

자기가 어떻게 그 집 아들한테 더 사바사바를 하던지 할 테니

부인은 부인 하고픈대로 온 빌딩 사람들이 다 보는 우리 집 안방 창문에 태극기를 거시오.

 

 

책임 질거지...?

그럼 나는 하고 싶은 대로 한다. 진짜로.

 

 

자기가 책임 진다고, 호언 장담을 다시 한 번 하길래

저는 속으로 좀 놀랐어요.

저 소심한 사람이 좀 걱정을 해야 정상인데.

어째 저래 의젓하지?

 

 

저희가 도달한 결론은,

일단 태극기는 건다,

한국의 선전을 기원하고 월드컵 분위기를 돋우는 의미에서,

그러나 이 곳은 그리스 인들 밀집 거주 지역이니

한국이 이길 경우 지역 사회의 평화를 위해 경기 후 태극기는 내린다.

승리는 우리 것이고 불필요하게 지역 주민들 감정을 자극할 필요는 없다,

패배는 그 자체로 가슴이 찢어진다, 약 올리면 안된다,

매너 차원에서라도 그게 좋다.

 

 

여튼, 그래서 저는 어제 첫 날 A조 경기 앞두고

태극기 자알 걸어 놓고 두 경기 다 시청 하고요.

남편은 알람 7시에 맞춰 놨다고 편히 잘 주무시라고.

내일 아침에 경기 봅시다. 쪽쪽쪽 하고 상쾌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에 핸드폰이 울리대요.

큰 조카가 한국 방송에서 축구 안 해 준다고 이모는 뭘로 보고 있냐고.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전화 받으면서 시계 쳐다 보니 7시 35분.

그 쯤에서 전화 벨 소리 듣고 같이 화들짝 일어난 남편.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더군요.

 

 

이게....알람이....내가 분명히 맞춰 놨는데....왜 안 울렸지...?

이게....어떻게 된거지....?

 

 

집세 오르는 것 보다 축구 못 보는게 더 심각한 상황인 건 알아서

어제만 해도 호언장담에 의연 하더니만

알람의 비작동에는 저렇게 쫄았구나.

 

 

시작한 지 몇 분 안됬네. 괜찮아.

 

 

조카한테 하마트면 못 볼 뻔 했다고 전화 해줘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전화를 끊고는

경기 보기 시작 해가지고

바로 골이 터지는데 소리도 못 지르고. 얌전히 끝까지 봤네요.

 

 

골이 터져도 소리를 못 지른 건

이제는 집세 오르는 걱정은 접었지만

토요일 아침이다 보니, 이웃들 수면 방해 할까봐서요.

 

 

나도 내가 축구 보면서 내 팀을 응원할 권리가 있는 것 처럼

이웃들도 주말 아침엔 늦잠 잘 권리가 있으니.

남편이랑 둘이 몸 비비 틀면서 하이 파이브나 하고.

창문도 안 열고 조용히...흐흐흐....하면서.

 

 

후반 15분 쯤 되서,

 

 

이게 좀 시건방진 생각일지는 몰라도 태극기 그냥 지금 조용히 내릴까?

 

 

남편이, 그냥 놔 두라고 하대요.

경기 아직 안 끝났으니까, 그냥 놔 두라고.

이기고 있다고 중간에 무슨 짓 섣불리 해서 나쁜 일 생기는 거 싫다고.

 

 

그래서, 끝까지 놔두고요.

경기 다 끝나고 나서 사뿐히 창가로 올라가서 태극기 내렸습니다.

오늘, 내일 이틀은 그냥 동네서 납싹 엎드려 있을라고요.

축구가 다 뭐고 월드컵이 대체 뭐냐, 라는 무심한 태도로

지역 사회를 이틀만 더 멍한 눈으로 배회하고

늦어도 수요일에는 태극기 다시 올리고,

고 때 부텀은 계속 걸어 놓으려고요.

 

 

남들이 부부 사이 좋다고 말 할 때 마다

다들 남편이 엄청 착해서만 우리가 잘 사는 줄 아는데

사실 저도 노력 많이 했어요.

 

 

연애 시작하면서 보니까 이 남자가 야구를 엄청 좋아 하길래

야구가 좋아, 내가 좋아,

야구 보는 거 싫어, 지루해,

연애는 뭐하러 하셔. 야구나 보셔!

이럴려다가

이왕이면 나도 같이 즐기는게 좋겠다 싶어서

 

 

야구라고는 규칙 한 개도 모르던 제가

바로 야구 카페에 가입을 했더랬어요.

어디로 여행을 가도 아는 만큼 보인다, 이런 말 줏어 들은거 생각나서

즐기려면 나도 뭘 알아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

야구 카페 가입을 했더니

사람들이 저 같은 초보가 하는 질문도 다들 잘 대답해 주고 격려해 줘서

그렇게 야구에 재미를 붙였어요.

 

 

그 때는 남편이 학교 끝나고 제 집, 이 아파트에 와서 죽치던 시절이었는데

저는 그 때나 지금이나 텔레비젼 없어도 사는 사람이거든요.

토,일 주말 경기는 공중파에서 해주지만 주중 경기는 케이블에서만 해 주는데

저는 당연히 케이블 없었죠.

 

 

그래서 둘이

라디오를 틀어 놓고 (이 무슨 아날로그 중에서도 아날로그스러운 일인지...)

맥주 마시면서 중계를 들었어요.

불 꺼 놓고 둘이 어깨 동무하고 맥주 홀짝 거리면서.

그러다 주말이 되면 텔레비젼으로 보면서

이야...이게 눈으로 보니깐 더 재밌네. 이러면서.

 

 

이 남자가 좋다고 하는거, 나도 같이 즐겨 보려고 저는 야구 공부 많이 했어요.

 

 

게임 보고 나면 바로 카페로 달려 가서

누가 어떻게 잘 했고 누가 어떻게 못 했는지

전문가 수준 팬들 얘기 경청하고 또 나름 질문도 던지고 하면서.

 

 

2002년에 월드컵 한국에서 한다고 저는 신이 잔뜩 나서

티셔츠를 보내라, 태극기도 보내라 이러면서

그 때 한국에 있던 큰 언니를 닥달하고 하면서도

이 남자랑 내가 축구를 같이 볼 수 있을까?

그 생각 했었지요.

 

 

미국 사람들은 축구라는 운동 경기를 아직도 희화하 하잖아요?

멀쩡한 손 두고 왜 발이랑 머리만 같고 용을 쓰는지 하면서.

미국인들에게 축구란 '지루한 운동 경기' . 아직도 그렇잖아요.

 

 

왼갖 운동 경기,

자기가 직접 하는 건 하나도 없어도 보기는 또 다 챙겨 보는 사람이라

혹시나 하고 월드컵 참여를 독려 했더니

생각보다 잘 따라 주더라고요.

 

 

내가 처음 김치를 내 집에서 익히면서 막 사귀기 시작한 보이 프렌드인 이 사람을 집에 오라고 하고는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코를 킁킁 거리려나? 어떻게 반응하려나.

김치 냄새 이상하다고 주접이라도 떨며는 어떻게 내가 처신해야 하나.

이 집에서 나쁜 냄새가 나서 미안해요, 라고 하고 바로 냉장고 넣어야 하나,

아닌데, 더 익혀야 되는데 그건 안되는데.

아니면 어따대고 이 귀한 음식에다 냄새가 난다고 하느냐 이런 싸가지 같으니 하고

궁댕이 차서 내 쫒고 헤어져야 하나.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이 사람이 집에 왔는데

아무런 동요가 없어서 제가 10분 쯤 참다가 물어 봤거든요.

뭐 이상한 냄새 안 냐나고.

 

 

그 때 태도가 마음에 들어서 나는 이 사람하고 오늘까지 온 건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김치를 익히는 중이고

이 냄새가 한국 사람이 아닌 사람들한테는 불쾌하다고들 하던데

그 냄새 모르겠냐고, 안 맡아 지냐고 물어 봤더니,

 

 

뭔가 색다른 냄새가 나긴 했는데 딱히 불쾌하거나 싫지는 않았다고,

그러더라고요.

그 냄새가 또 자기한테는 싫다 한들,

남이 잘 먹는 음식에 불쾌감을 표시하는 건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나.

 

 

저것을 시작으로

그 이후로도 남편은 자기는 안 먹는 한국 음식을 제가 할 때 마다

십 여년 동안, 아 이거 대체 무슨 냄새야? 이런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stink 라는 단어를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어요.

지금은 한국 음식 어지간히 잘 먹어도 절대 진도 안 가는 범위가 마른 오징어 인데,

이게 왜 그렇게 구린 냄새인지는 저는 죽었다 깨나도 모르겠지만

여튼 미국 사람들은 괴롭다니 그렇다 치고.

 

 

마른 오징어 구워 먹고 그 냄새가 아파트를 꽉 채웠을 때

남편이 선택하는 단어는,

funky.

저게 최고로 괴로운 냄새나는 음식을 제가 했을 때 하는 말.

썸띵 스멜스 펑키.

 

 

태도가 마음에 들어서 계속 사귀다가 내가 결혼까지 해 줬다. 아저씨.

나는 연애 시절에 저 사람 좋아하는 야구를 부지런히 공부하고 열심히 옆에서 같이 봐 줬더니만..

2002년에 월드컵을 성실한 자세로 함께 보더니

그 이후로는 정말 축구까지 챙겨 보더만요.

 

 

토,일 아침 11시에 

프리미어 리그 생방 해주는 걸 언젠가 부터 열심히 챙겨 보더라고요.

2002년에는 축구 규칙도 하나도 모르던 사람이

그래도 이런 저런 운동 경기 봐오던 가락으로 빨리 습득을 하는 듯은 싶었는데

이제는 심판 욕 하면서 보는 경지가.

 

 

어제는 첫 날 두 경기 다 봤는데

프랑스 선수들 엔트리 보더만

얘 어디 소속 얘 어디 소속 얘 어디 소속 얘 어디 소속,

 

 

일 없으면 월드컵 전 경기 다 볼 태세임.

 

 

저는 조용히 내린 태극기 곱게 다시 잘 접어 놨고요

지금 가게에 뭐 사러 가야 하는데

나가서 집 주인 만나면 평소보다 더 살갑게 인사해야 겠어요.

마치 방금 일어 났다는 듯 눈꼽 떼는 제스쳐 해 가면서.

그 쪽에서 먼저 축구 애기를 하거들랑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해야지.

 

 

어머나, 축구? 월드컵?

미국에서 그런거 보는 사람도 있어요?

아우 난 늦잠 자느라 아무 것도 몰랐네..

 

 

하품 한 번 하면서 뒤돌아서서

나는 묵묵히 내 갈 길을 가리라..

씨익...V.

 

 

가게서 보리 음료 사와서는 오랜 만에 마른 오징어도 구워야지.